설교문
자유와 책임과 보상
*** 자유와 책임과 보상 / 로마서 14:1-9
로마서 14:1-9,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미혹의 시대이며 불확실의 시대입니다. 사회 곳곳에 세상과 육신의 욕망을 따르게 하는 미혹이 깔려있고,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학문도, 심지어 종교까지, 제각각 제 생각대로 살면서 확실한 길을 제시하지 못한 채 정처 없이 흘러갑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에서는 ‘미국의 우려되는 현실’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소위 신좌익(New Left)이라는 학생 단체가 생겼는데, 전 미국 학생의 2%가 가입하고 10%가 동조적이라고 합니다. 신좌익의 지도자들이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파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나 도덕이나 정부나 기존 권위나 질서나 가치들을 부정하고 부서뜨리고 싶어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러면 그 대안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안은 없어도 좋고, 어떤 결과도 지금 있는 것보다는 환영한다.’라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강변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권위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어른들이 젊은 세대의 패륜을 나무라면 젊은 세대는 “왜 안 해야 하고,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도리어 반항적이라고 합니다. 이 사설은 ‘기성세대가 이미 도덕의 절대 권위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는데, 인제 와서 누구의 이름으로, 무슨 권위로 젊은 세대의 비도덕적 행위를 깨우치느냐?’고 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없는 세대에게 도덕을 가르쳐도 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또 일본의 어느 잡지에서는 최근에 주부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하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일본 주부들의 50% 이상이 ‘만일 들키지만 않는다면 바람을 피울 용의가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일찍이 ‘도스토옙스키’는 “하나님이 없으면 못 할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지금 우리의 세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악들이 넘쳐납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동조해야 합니까? 아니면 고통을 무릅쓰고 선도해야 합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무관심하게 수수방관해야 합니까?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자유에는 분명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며, 동시에 보상도 주어집니다. 본문 다음의 17절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셨고, 로마서 2:6-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로마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얼마는 이방인이었고, 얼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율법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음식과 절기를 구별하여 지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 교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유로운 신앙만을 알아서 이러한 구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교인들 간에는 음식과 절기를 구별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음식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의심하지 않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연약한 자'는 고기는 먹지 않고 오직 땅에서 나오는 채소와 열매만 먹었습니다. 그리고 절기 – 유월절, 오순절, 월삭, 장막절 등.- 에 관하여 유대인들은 ‘율법을 따라서 여전히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이방인들은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날을 같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의견 차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8-9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라.’라는 것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자유!(freedom)’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단어이며, 모든 생명이 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도 박탈할 수 없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믿는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일부입니다. 지금은 세계 최강의 국가인 미국도 156년간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독립전쟁을 선언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당시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1775년 3월 23일. 미국 식민지 대표들이 대륙회의를 열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호소하며 ‘패트릭 헨리’가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문 중 마지막 일부분입니다. “전쟁은 사실상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이미 싸움터에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빈둥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갖게 될 것이 무엇입니까? 쇠사슬과 노예화란 대가를 치르고 사야 할 만큼 우리의 목숨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렇게도 달콤한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게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택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입장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우리나라도 지금 정부를 상대로 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반대, 포괄적성교육 반대, 지방자치법 개정안 반대 등의 목소리를 내며 규탄하는 것도 신앙의 자유를 포함하는 진정한 자유를 위한 싸움입니다. 이처럼 법과 체제와 같은 세상적이고 외적인 자유도 중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인 내면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이 내면의 자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 8:31-32절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반발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 즉 우리의 영이 자유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억압할 수 없는 영적인 내면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말씀에서 “종의 멍에”란, 앞서 요한복음 8:34절에서 말씀하신 ‘죄의 멍에’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죄인데, 이 죄가 그리스도인을 옭아매는 멍에이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면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13-15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에서 자유 하다고, 자기 육체가 원하는 것을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 자유를 다른 사람을 섬기며 봉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데 사용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 자유의 사용에는 책임과 보상이 따릅니다.
자유의지(自由意志)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부여하신 의지이며, 외부의 구속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어떤 목적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다는 의지를 말합니다. 자신이 목적을 세우고 실행한 일에 대하여는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앞서 보았던 로마서 2:6-8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그리고 이사야 3:10-11절에서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한 책임을 물어, 상급이나 징벌의 보응을 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틀림이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잔을 대접한 행위까지도 보상하겠다고 하시며, 지극히 작은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면 징계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판단을 하시는 분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심을 본문 4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상급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산 사람에게는 징벌로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응하심이 얼마나 세밀하신지를 봅시다. 말라기 3:16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또 한 곳, 누가복음 12:48절입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 앞에는 두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며 다른 하나는 기념책입니다. 생명책은 예수님을 믿어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념 책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되는 말을 한 사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높이며, 모든 일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타나는 결과에서 양의 많고 적음을 생각하고 따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맡긴 분량에 대한 결과를 보십니다. 만일 내가 한 달란트를 받았다 할지라도 성실하고 충성되게 일하여 한 달란트를 더 남겼다면, 역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을 사람들의 시각으로 경중이나 다소를 따지거나 귀천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결산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께서 하시며, 하나님의 뜻과 각자에게 맡겨진 재능이 판단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하면 됩니다. 그 보응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하나님의 보응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들을 주님께 맡기고, 주어진 재능으로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서 성실하고 충성되게 일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이끌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고귀한 자유를, 하나님께 순종하며 진실하고 선한 일에 사용하여 하나님의 값진 보상을 삶에서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