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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것을 따르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586회 작성일 2021-10-27 20:45

*** 가치 있는 것을 따르십시오. / 고린도전서 15:1-11

 

고린도전서 15:1-1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저마다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치가 어떤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별로 소용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가치는 그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귀하기도 합니다. 즉 가치는 상대적이기도 하고 상황과는 상관없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기 위하여 경험을 쌓고 실력을 연마합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는 ‘기능장 제도’가 있습니다. 기능장이라는 명칭은 어떤 한 분야에서 경험과 실력이 독보적인 사람에게 수여됩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도 영적인 기능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쳤을 때, 그곳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11:26,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복음이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안디옥에서 복음 사역자로 활동할 때가 44-46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까지 적어도 45년이 걸렸습니다. 이때, 안디옥에서 사역하던 바나바에게 붙여진 평가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평가가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이 들어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별칭으로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사람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 등. 부활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인데, 이렇게 부활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명확하게 풀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벌을 형성하여 서로 분쟁하는 것을 비롯하여 우상 숭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음행 등. 산적한 신앙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각 문제에 대하여 일일이 경고와 충고, 바른길을 제시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확신하도록 가르칩니다. 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입니다. 부활장의 마지막 절에서 이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 말씀은 종말의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당시보다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 이처럼 ‘가장 가치 있는 부활의 삶을 이루도록 힘쓰라.’라고 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욱 긴급하고 촉박한 일입니다.

 

※ 지금, 그리스도인이 따를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 철학의 시조(始祖)라고 부르는 ‘탈레스’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철학자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그러면 가장 쉬운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철학자는 “남을 충고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옛 초나라의 병법가인 ‘손무’는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白戰不殆)’라고 했습니다. 즉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싸움에서 이기는 능력의 비법이라고 합니다.

 

이 어록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치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알려면,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일꾼이 일하기 전에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자신이 할 일에 필요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마구잡이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가 일에 적합하도록 최상의 상태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목수가 톱이나 끌, 대패 등의 날을 날카롭게 잘 갈아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 번뿐인 인생도 최상의 삶을 이루려면 자신의 삶을 잘 정립해야 합니다. 무작정 빨리 가는 걸음보다는 바른 걸음이 중요하고, 화려하고 사치하는 생활보다는 가치 있는 인생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한 삶은 부귀영화도 명예 권력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 감격을 본문 7-10절에 잘 표현합니다. 감격의 핵심표현이 9절에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사도의 직분이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은혜’라고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와 복음 전도자의 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추구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적의식이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며, 자신이 추구하고 나아가는 푯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명확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고 마가복음 10:45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적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 모든 공생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 목적대로만 사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목적의식을 분명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받은 목적과 삶의 목적을 가장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고 부르시고 택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당연히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가치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목적을 이루도록 그에 필요한 은사, 즉 재능을 주셨습니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에서 잘 가르쳐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듯이 만일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면 당연히 무가치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내게 맡겨주신 것을 충성되게 수행하는 것이 내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 나의 가치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레위기 11:20-21절을 봅시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로되, 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왜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 다니는 곤충은 혐오해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날개의 목적은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는 놈은 더러운 놈이니 만지지도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외로, 다리로 뛰는 곤충은 인정해 주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날개에 힘이 없어서 멀리 날 수 없으면, 하다못해 나는 꿈을 안고 뛰기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뛰는 것마저 포기한 상태라면 이는 자기의 삶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존재이니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완전하고, 거룩하게 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힘쓰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도움을 구하고 물결 위를 걸으려고 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비록 바다로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물 위로 뛰어내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예 실패가 두렵고,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고 싶어서 주저앉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셔서 내버리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 3:15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와 목적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미지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아예 잊어버리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미지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와 분명한 목적의식을 알고 자신의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결과를 내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까지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이사야 43: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어서 21절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소유로 삼으신 가치 있는 인생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날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며 우리가 하는 일을 아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들 – 직장, 사업, 농사, 제조공, 사회생활 등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도구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게 주어진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믿고, 내 주인 되신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농부가 마을 변두리에 있는 버려진 농장을 샀습니다. 잡초는 사람 키만큼 자랐고, 울타리는 무너지고, 축사도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농부가 농장을 가꾸기 시작한 첫날, 마을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하나님과 함께 멋진 농장을 가꾸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목사님은 다시 농장을 찾아왔습니다. 농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으며, 많은 소가 있고, 곡식과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전혀 달라진 농장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놀랍군요! 하나님의 능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당신이 이루어낸 작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예, 그렇고 말구요. 하지만 목사님 이걸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 하나님 혼자 농장을 가꿀 때는 어땠는지…”

 

농부의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은 사람들의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6:3절입니다.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가꾸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나라와 민족과 택하신 사람들, 저와 여러분 그리고 모든 만물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나타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면,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일을 하도록 분별력과 재능을 선물로 주십니다. 재능이 부족하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의 재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잘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인정하시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이루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복된 인생으로 채워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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