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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시는 온전한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209회 작성일 2021-06-20 21:41

*** 하나님께서 보시는 온전한 사람 / 야고보서 3:1-12

 

야고보서 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로 꼽으라면 단연 핵무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핵무기를 얼마나 아십니까? 핵무기는 최초의 원자탄(핵분열), 수소폭탄(핵융합), 코발트탄, 3F탄, 중성자탄 등이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각각 22만 명, 15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전 세계 핵무기 보유 수는 2020년 1월 기준 9개국의 13,400기라고 합니다. 수소폭탄은 세계 5개국이 보유하고 있는데 수소폭탄의 위력은 원자탄의 85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무서운 무기들이 아슬아슬하게 세계의 평화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되지를 않아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하여 너무나 쉽게 사용되는 무서운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 즉 언어(言語)입니다. 본문 6절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라고 합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이 무서운 무기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옛말이나, 잠언 25:11절의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라는 말처럼, 사람을 이롭게 하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 잘못하여 패망하거나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은 전혀 다른 양면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언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놀라운 도구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문에서는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하십니다. 여러분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야고보서는 첫 절에서 명기한 대로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유대인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두 사람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편지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로 봅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편지는 여러 면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마태복음 5-7장인 산상수훈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서를 기독교의 도덕적인 내용을 통하여 행위를 강조한 교훈집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복음을 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의 방면에서 본 내용입니다. 즉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1:27절에서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에서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흔히 신앙적인 행위를 강조할 때는 성도가 환난의 환경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 편지도 초대교회 당시의 극심한 환난으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또 격려함과 동시에,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삶의 행위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음만을 중시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경계하며 2:20-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너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는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믿음으로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에게 있어서 행함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야고보는 신앙이 실제적인 면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진실도 아니고 가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말의 양면성 중에 생명을 이루는 면을 봅시다.

 

히브리서 13:1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입술로 나오는 찬송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며,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잠언 18:20절에서는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라고 했는데, 로마서 10:9-10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처럼 입으로 표현되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열매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흑암과 불 가운데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엄청난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말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5:28-29절입니다.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아십니다. 말라기 3:16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십니다. 그래서 좋은 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은 영광과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선한 말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선한 말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명약입니다.

 

옛날 시골 장터에서 박씨 성을 가진 나이 지긋한 백정이 고기를 팔고 있었습니다. 어느 장날, 젊은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한 양반이 말하기를 “어이 백정, 고기 한 근만 다오.”라고 하니 백정이 “예, 그러지요.” 하면서 솜씨 좋게 고기를 칼로 썩 베어 줬습니다. 또 다른 한 양반은 상대가 비록 천한 백정이긴 하지만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기가 민망하여서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정이 “예, 고맙습니다.” 하더니 역시 솜씨 좋게 고기를 잘라 주는데, 먼저 양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자 먼저 양반이 소리쳐 따졌습니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어째서 이 양반 것은 나보다 배나 많으냐?” 그러자 그 나이 지긋한 백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야 손님 고기는 백정이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 서방이 자른 것이니까 그렇지요.”

 

에베소서 4:29절을 봅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렇습니다. 만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긍정적이고 선한 말의 열매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과 영광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36-3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말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본문 9-11절을 봅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그리스도인의 말은 덕을 끼치고 생명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 말의 양면성에는 파멸을 이루는 면도 있습니다.

 

한 아이가 놀이터에서 장난감 새총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새총으로 쏘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아저씨를 맞추고 말았습니다. 아저씨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야! 너희 엄만 어디 계시냐?” 아저씨는 꼬마를 데리고 아이 엄마를 찾아갔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시는 겁니까? 이렇게 함부로 사람에게 새총을 들이대는데 크면 더 큰 죄로 교도소에 가겠네!” 그 아저씨는 마치 아이가 일부러 자신을 맞춘 것처럼 역정을 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의 어머니가 한마디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더 위험한 것을 가지고 계시네요.” 아주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멍하니 쳐다보는 아저씨에게 아이의 어머니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위험한 것은 바로 무서운 말이에요. 새총은 몸을 다치게 하지만 말은 마음을 다치게 하거든요.”

 

본문 6-10절을 봅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지만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의 경고처럼 잘못된 말은 인생을 파멸로 이끌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 길이 험하다고, 음식이 박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물이 없다고 수시로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27-28절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여러분, 두렵지 않습니까? 내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든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이, 죽겠네.’라고 하면 죽게 될 것이고, ‘이 망할 놈’이라고 하면 망하게 될 것이고, ‘아이 짜증나.’라고 하면 죽도록 짜증나게 될 것입니다. 말은 나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인도자도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양쪽에는 강도들이 달렸습니다. 그런데 한 편의 강도는 죽는 순간까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편의 강도는 비방하는 강도를 책망하면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즉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은 지옥으로, 한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했습니다.

 

말(言語)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만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말에 대하여는 세상에서도 무서움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하는 말이지만 스스로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시편 141:3절에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말, 즉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마음이 분노하여 격한 감정이 되었을 때는 그 감정을 담은 무시무시한 독이 말 속에 포함되어 전달됩니다. 어느 과학자는 ‘인간의 이런 독설이 식물을 마르게 한다.’라고도 했습니다. 한마디의 말이 겨울의 솜옷처럼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도 하지만, 가시덤불과 같이 마음을 아프게 찌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도 바울은 골로새서 4: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데이 C. 셰퍼드’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정리합니다.

데이 C 셰퍼드가 쓴 ‘세 가지 황금 문’이란 글에서 언어생활(言語生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말하기 전에 언제나 세 가지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 모두 좁은 문이다. 첫째 문은 ‘그것은 진실한 말인가?’이며, 둘째 문은 ‘필요(必要)한 말인가?’이며, 셋째 문은 ‘친절(親切)한 말인가?’이다. 이 세 문을 지나왔다면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하지 말고 크게 외치라.”

 

말은 너무 쉽게 나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말은 영광과 생명의 길의 인도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독한 말과 남을 판단하고 헤아리는 악한 말은 자신의 인생을 파멸과 죽음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한 입으로 하나님을 닮은 선한 말로 채우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영광과 생명에 이르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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