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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가치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421회 작성일 2021-05-05 13:30

*** 그리스도인의 가치 / 누가복음 14:25-35

 

 누가복음 14:25-35,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본문말씀은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서 여러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월에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이해가 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결단과 순종’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오늘은 같은 본문말씀이지만 주제를 ‘그리스도인의 가치’라는 측면으로 살펴보려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중심 구절은 33-35절인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인 가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이적’이야기가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 맹인의 가치는 ‘쓸모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맹인의 가치는 ‘하나님의 일은 나타내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은 세상이 가늠하는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치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말기쯤에 베뢰아 지역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기적으로 음식을 먹이시면서 가르치셨고, 귀신을 내쫓으며 불치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경험하거나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리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 생명을 얻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두 가지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망대를 세우는 사람의 비유’와 ‘전쟁에 임하는 왕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어서 ‘쌍둥이비유’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비유를 연속적으로 하시면서 ‘비용과 보상’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합당한 보상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다 하신 후에 다시 마지막으로 ‘소금에 대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즉 ‘소금의 목적은 짠 맛을 내는 것인데, 소금이 이 짠 맛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어 버려진다.’고 하십니다. 소금은 맛을 내야 진정한 가치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은 삶이 진정한 가치를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복음 16:13절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비유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 사이의 확실한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이 따르는 것은 맹목적인 추종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가치판단에 따른 개념 있고, 의미 있는 믿음과 순종을 이루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가치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찬송가 549장을 봅시다. ‘내 주여 뜻대로’라는 제목이 있고, 좌측 위쪽에 작사가 이름에 B. Schmolck. 1704라고 되어 있습니다. ‘벤자민 슈몰크가 1704년에 작사했다.’는 뜻입니다. 이 가사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럽 역사를 바꾸어 놓고 유럽의 국가들을 재편성했던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이 전쟁을 30년 전쟁(1618년-1648년)이라고 하며,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하여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전역의 최고의 관심사였던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자유 인정을 둘러싼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종교전쟁’입니다. 이렇게 독일의 내전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30년의 전쟁 기간 동안 1천 6백만 독일 인구가 6백만 명으로 줄었고, 국토의 4/5가 황폐화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함께 당시 유럽에 퍼졌던 전염병까지 가세하여 유럽 전체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가톨릭의 승리였고 가톨릭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독일에는 유일하게 남은 개신교이자 루터교회인 ‘프리덴스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돌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넓은 지역을 종일토록 가톨릭의 핍박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위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부부는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보이는 것은 교회와 집이 몽땅 불에 타버린 잿더미였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은 서로 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나의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 분은 ‘벤자민 슈몰크’목사입니다. 훗날 이 기도에 곡을 붙이고 편곡한 찬송이 549장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밤낮으로 쉬지도 못하고 일한 대가가 집과 교회당이 불타고 두 자녀의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이 일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이와 같이 사람의 이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해를 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이 믿음의 순종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의 결론부인 33-34절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자신의 믿음을 순종으로 실천했을 때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자신의 뜻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 척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이시기 전에 먼저 해야만 하셨던 것이 ‘이스라엘의 복종 훈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주게 되면 불순종 때문에 오히려 멸망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6-27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설령 내가 무능하고, 약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면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일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당시에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던 세리나 어부가 대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26-28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우리의 능력이나 강함이나 부요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란스 헤브너’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진정한 헌신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헌신은 85%로 만족할 수가 없다.”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여러분에게 “여보, 내가 당신에 대하여 전부는 못해도 85% 정도는 성실할게요.” 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85% 정도만 성실하겠다면 나머지 15%는 성실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성실하지 못한 15% 속에는 온갖 것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신은 자신의 100%를 드리는 것이며, ‘삶의 전 영역’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과 순종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헌신이 없는 순종은 거짓이며, 순종하지 않는 헌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로마서 12: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에서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배’입니다. 헌신된 사람은 예배를 즐거워하며, 적극적인 예배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주일에 한두 번 모여서 순서에 따라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말씀 듣는 그런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는 매일 내 삶의 전 영역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즉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6-32절까지 긴 구절로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 순종하고 따를 수 있을지를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순종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십니다.

 

창세기 22:2-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네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순종과 100% 헌신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이 순종에 대한 보답으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16-18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행하여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고 헌신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으로 나타내는 자신의 가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치는 본문 33절의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진정한 헌신과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십니다.

 

마지막 부분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소금”은 ‘그리스도인’을 말하며, “”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도 좋고 신앙도 좋고 모든 것이 다 좋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공허할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며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됩니다. 우리 모두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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