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십니까?
***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십니까? / 로마서 14:1-9
로마서 14:1-9,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어떤 사람이 기분전환 겸, 취미 겸해서, 오리를 키워 볼 생각을 했습니다. 마당에 널따란 물통을 두고 절반이나 물로 채웠습니다. 퇴근하면서 오리농장에 들러서 청둥오리 한 쌍을 사서 물에 넣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오리에게 먹이를 주러 갔는데 오리가 물통 속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적여 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나 상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수영 전문가인 오리가 물통 턱을 올라오지 못하고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었을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퇴근길에 오리농장으로 가서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농장 주인은 오히려 딱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오리는 오리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르지요.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기가 막히지요? 오리가 물에 뜨지 못하고 헤엄치지 못해서 물에 빠져 죽다니요. 상식을 뛰어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영적인 일에서도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나 임재하심을 느끼지도 못하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배도 하고, 기도 생활도 하고, 나름대로 봉사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옛말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말도 있는데,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신앙생활은 오래되었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에 대한 탄식입니다. 영적인 성장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길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초대 로마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주의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한 편으로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있어서 교회관습에 대한 견해 차이가 생겼습니다. 특히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 사상이 새롭게 전파되고 확산하는 초기였습니다. 그래서 옛 율법적 습관을 따르는 ‘보수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자유로 율법에서 벗어나려는 ‘진보파’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로마교회도 이와 같은 갈등으로 서로를 비판하며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성도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두 가지 쟁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음식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절기를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음식 문제는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정결법(레 11장)에 따라서 ‘금지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하여 ‘육식을 피하고 채식을 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은 음식에 대하여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깨끗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25-26절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으면서 먹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약하다.’라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거나 먹는 사람들을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절기에 관한 문제는 유대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던 절기들입니다. 즉 유월절(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등의 3대 절기나 월삭, 속죄일, 금식일 등의 특별한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시한 이러한 특별한 날들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날이 차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절기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절기 자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문제들로 말미암아 로마교회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서로 물고 먹으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갈라디아서 5:15절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주님의 주인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그의 놀라운 연주로 청중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마자 그는 그가 연주한 바이올린을 청중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게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바이올린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부숴버린 바이올린은 길거리에서 아주 싼 값으로 구매한 이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계적인 명인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겠습니다.”
그는 새 악기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그 차이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연주를 마친 바이올린 연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은 제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가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음악은 연주하는 악기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연주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말처럼 많은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문제 삼습니다. 옛말에 “서투른 목수가 연장 나무란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환경 탓, 여건 탓, 남의 탓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인 신앙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권위도, 주인 됨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만 틀어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16:8절에서 말씀합니다.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물이 없다고, 길이 험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신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떤 불평과 원망과 의심과 두려움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오랜 가뭄이나 장마, 태풍,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곧 이를 주관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 나 자신이나 혹은 가족들의 일로 말미암아 불평하면, 이 역시 우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삶의 모든 불평과 원망, 의심과 두려움, 분노와 좌절 등은 이 모든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음식과 날에 대하여 서로 악한 마음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성도들에게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며, 사람들은 모두가 동등한 관계에 있습니다. 동등한 사람들은 서로가 판단하거나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7: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는 우리 사람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헤아릴 권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50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라고 하시며, 사도 베드로는 판단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1:17절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영과 육신의 생활을 주관하시는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 주님의 주인 되심을 어떻게 나타내야 합니까?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신앙인이었던 샤프츠버리(Anthony Ashley Cooper, 1st Earl of Shaftesbury, 1621-1683) 백작의 일화입니다.
샤프츠버리 백작이 런던의 대로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횡단 보도 앞을 지나가는데 어린 소년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저씨, 나를 도와주세요!” 아이는 자신이 그 넓은 횡단 보도를 건너기가 무서워서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백작은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서 내려놓았습니다. 백작은 이 일을 상기하면서 어린 소년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교훈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일을 어른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타내는 삶은 이 아이처럼 나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며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원자로, 온 우주의 주권자로 시인하고 도움을 구할 때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인생이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며, 자신의 구주가 되심을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32-3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녀 됨을 시인하겠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예수께서 보증해 주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나타내는 것은 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참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너무나도 타당한 말씀인 ‘나뭇가지가 그 나무의 본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불변의 이치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효과적인 삶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으면 영적인 생명에 관하여는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다는 것,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철저한 인정(認定)관계’를 말합니다. 특히, ‘나뭇가지가 나무줄기에 붙어 있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생활을 주님과 함께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나뭇가지가 줄기를 떠나는 순간 죽은 목숨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떠나는 순간 곧 영적인 죽음입니다. 옛말에 “늑대와 함께 살면 울음소리까지 늑대를 닮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되면 모든 생활이 주님을 닮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하나 하나가 주님을 닮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 8-9절(“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의 의미이고, 주님과의 동행이며,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입니다. 이렇게 모든 생활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순종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삶에 부어집니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주님께 아뢰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진정한 내 주인으로 모시며 순종하고 동행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