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죽음과 부활
*** 죽음과 부활 / 요한복음 11:17-27
요한복음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들어가는 말
기독교 자유주의 잡지인 ‘크리스챤 센츄리(Christian Century)’의 편집장이었던 ‘마틴’ 목사가 쓴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틴 목사가 주일학교 교사를 했을 때, 3학년 반을 맡았는데 그 반에 학습지진아인 ‘스티븐’이 있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숙제를 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상자 속에 하나씩 넣어 오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상자를 열어 보이며 설명했습니다. 한 아이의 상자에는 꽃이 있었고, 다른 아이의 상자 속에서는 나비가 나왔습니다. 그다음 아이는 파란 나뭇잎을 꺼냈습니다. 스티븐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 상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틴 선생님은 그 순간 ‘지능이 모자라는 스티븐에게 남들과 같은 숙제를 냄으로써 망신을 당하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라고 생각하며 당황했습니다. 그때, 스티븐이 싱글싱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상자는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이 상자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틴 목사는 그때를 회상하며 잡지 종교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정말 놀랐다. 학습지진아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부활이 빈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이 깨달아야 할 진리이다.”
부활을 이야기할 때면 자주 ‘빈 무덤’을 말합니다. 빈 무덤은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기쁨을 말하면서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한다.’라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당연하게도 부활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밀알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생명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의 오묘한 관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베다니라는 마을에 사는 나사로와 두 동생을 방문했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 즉 불과 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 마을에는 나사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모 없이 어렵게 사는 가정이어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두 자매가 기둥처럼 여기며 살던 오빠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다급해진 자매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전했습니다. 자매로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며칠을 미루다가 조금 늦게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고 장례까지 치른 후였습니다. 마르다는 원망 섞인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한 가닥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는 그럴듯하면서도 동문서답(東問西答)처럼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현재적인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마르다는 종말적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는 ‘세상 마지막 때에는 살아나는 것을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화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본문 25-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음’에는 두 가지의 죽음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적(靈的) 죽음과 육신적(肉身的)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의 생명이 살아난 그리스도인은 육신이 죽더라도 부활을 약속되어 있으며, 육신이 살아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적인 생명까지 얻게 되면 영과 육신이 모두 살아 있게 됩니다. 이 비밀을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에 나타내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에서 ‘휴거(携擧)’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휴거’라는 말은 시한부 종말론자인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이 1978년 ‘어니스트 앵글리(Ernest Angley)’의 예수 재림소설 Raptured(광희의, 황홀한)를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즉 휴거는 기독교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죽음이란, 결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의미로 삶의 끝이라는 생각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절망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죽음이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이후, 사람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하나님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바사르’라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flesh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영이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은 짐승들처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없는 한갓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소망이 없는 세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소망이 없는 세상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죽었던 영의 생명이 부활한 거듭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 요한복음 5: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는 말씀은 죄로 죽었던 영이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두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라고 하셨습니다. 즉 ‘죽음’이 아니라 ‘잠들었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소망이 없는 세상적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다시는 죽음의 공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잘 죽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잘 죽는 준비란, 매일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확신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3-4절을 봅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부활을 말하기 전에 먼저 전제(前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죽음임을 나타냅니다. 아니,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죽으셨다구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죄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과 하와 이후로 전가(傳家)되어 온 인류의 죄를 말합니다. 이 인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신 가져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라고 합니다. 쉽게 표현해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죄의 대가(代價)로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의 자리를 예수께서는 “바깥 어두운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곳은 죄를 해결하지 못하여 영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가는 곳인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는 말씀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는 죽음을 예수께서 대신 감당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범죄한 나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영의 생명이 거듭나서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것이 영적인 부활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의 생명을 회복하여 거듭난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합당하게 사는 신앙의 삶을 ‘부활 신앙’이라고 합니다. 영이 죽은 세상 사람들과 영의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똑같아 보이는데 다른 것이 있습니까?
어떤 청년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당시의 유명한 스승인 ‘성 마카리우스’를 찾아왔습니다. 청년이 물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대고 욕을 한바탕 퍼붓고 오게.” 청년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왔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청년을 다시 공동묘지로 보내면서 “이번에는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을 하고 오라.”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다시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성자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욕설을 퍼부어 대니까 시체들이 성을 내던가?” 청년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이번에도 청년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청년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네.”
여러분, 이 성자의 가르침이 이해가 됩니까? 성 마카리우스가 청년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이 부활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의 환경이나 상황에 반응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6:12-13절을 봅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 말씀처럼 영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불법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과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한 일을 행하며, 영적인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의 일을 하며, 사람을 세워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27절에서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하시며, 디모데전서 6:18-19절에서는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영의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받을 보상이 있도록 부활 신앙이 생활화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행복한 우리 주님의 부활절에, 주님이 약속하신 우리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며 삽시다. 그리하여 마르다가 고백한 것처럼,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소망하며, 이 땅에서도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