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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921회 작성일 2022-04-11 15:06

***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 마태복음 21:18-22

 

마태복음 21:18-22,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시편 49:20절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는 말씀이 있고, 호세아 4:14절에서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목적을 띄고 있습니다. 각 개체는 자신의 자리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본분대로 살지 못하면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사람치고 일부러 힘들고 어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혹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도 생활 자체가 어렵고 힘든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쉽고 안전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하여 비결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산속에서, 바닷가에서, 촛불을 켜두고 밤새도록 빌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든 우상 앞에서 복을 빌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도 영원한 소망과 복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깁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원하는 소망과 복된 삶을 이루지 못하는 맹목적인 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의 경고성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기본 중에서도 기초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이 이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기본이 어떻게 우리 생활에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와 배경을 봅시다.

 

오늘 본문은 더 설명할 것도 없을 정도로 많이 다루었고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길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하는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여행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실 마지막 주간 월요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첫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고, 가까운 마을인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중에 길가에 있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아침에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열매를 기대하면서 나무를 살피셨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이 일을 보고 있던 제자들이 그 신기한 광경에 놀라서 물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금방 말라버렸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일을 통하여 ‘믿음의 기도에 대한 능력’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이 시간에는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의 본질에 관한 내용으로 살펴 보려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사건을 보여주신 목적이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본질을 잃어버린 나무를 통하여 역시 본질에서 벗어난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인들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1:12-25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아침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셨고,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이 어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보았고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 내용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과 사람들을 의미하며, 심판적인 선언은 본질과 목적을 상실한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이 저주가 결국 40여 년 후에 실제로 예루살렘에 일어났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로마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과 사람들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의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에 관심을 가졌지만, 예수께서는 기본과 목적을 잃은 성전과 사람들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 무화과나무의 본질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알아보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때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비록 지금은 힘이 들더라도 천적으로부터 안전하고 풀이 많은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지금은 수월하지만 결국에는 천적들이 많고 풀이 적은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을 기르는 목적은 양이 건강하게 자라서 번성하고, 기르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천적의 먹이가 되는 것을 원하는 목자는 없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기르는 목적은 오직 무화과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관상수나 목재로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 가꾸는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봅시다. 에스겔 15:2-4 상반절입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것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 6하,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 것이라.”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는 둘 다 열매를 얻을 목적으로 가꿉니다. 그런데 열매가 제대로 맺지 못하면 목재로도 사용할 수 없고, 관상용으로 보기 위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 본질이자 목적인 열매가 없으면 땔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곳, 하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 5:1-2절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 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유명한 ‘포도원 노래’입니다. 농부가 최선을 다하여 땅을 가꾸어 최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먹지도 못할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이는 포도나무가 자신의 근본과 목적을 잃어버렸다는 탄식입니다. 이렇게 본질을 잊고 목적에서 벗어난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7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렇게 목적을 잃은 나무, 즉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이러합니다. 5-6절입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본문 19절 말씀처럼, 그 징계는 나무에 대한 보호를 멈추시고,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며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포도원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이며, 나무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와 나무인 성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나무는 즉시 말라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포도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서처럼 무화과나무도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나무가 자신의 본분을 잊고, 목적에서 벗어나면 버려지듯이, 하나님의 백성도 본분을 잊고 목적에서 벗어나면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의 본질은 무엇이며, 부여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주일을 철저히 지키면서 사업을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 회사의 물건을 판매하는 점포를 운영하려고 하면 반드시 “주일에는 장사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지점개설을 담당하는 직원이 사장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주일에 장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선뜻 점포주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사장님께서 그것만 양보하신다면 일 년에 약 100개의 점포를 개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장은 그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주일 지키는 일을 계속 고집하면 일 년에 몇 개 정도의 점포가 개설될 것 같은가?” 그 직원은 “약 10개 정도가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그럼 10개만 개설하도록 하게.”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일을 어기면서 100개의 점포를 운영하여 많은 연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일을 지키면서 10개의 점포만을 운영하여 적은 연보를 드리는 것이 더 옳고 좋은 것이다.”

 

말씀 서론에서 읽었던 마태복음 7:21절을 다시 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기업의 사장은 하나님의 사람의 본분이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시편 50:4-5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이사야 43:7절을 봅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1:13절에서 말씀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주일(主日)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의 표징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며 목적입니다.

 

마태복음 본문과 마가복음 병행구절에서 예수께서 동일하게 나타내시는 결론은 ‘믿음의 기도의 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의 삶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분과 목적을 알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한 본질과 목적을 잃은 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 죽은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온전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시편 1:1-3절을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과 목적을 잘 수행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하는 모든 일이 모두 형통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수히 많은 유혹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유혹은 그리스도를 믿되 적당히 타협해서 살라는 세상의 목소리입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지금 당장은 편하고 잘 되는 것 같을지라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며, 영원한 생명을 복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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