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토기장이 하나님
*** 토기장이 하나님 / 예레미야 18:1-12
예레미야 18:1-12,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사람은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삽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며, 나도 다른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온 세계가 실시간으로 상황을 볼 수 있어서 마치 하나처럼 움직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우리는 매일 접하는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노사연 씨가 부른 ‘바램’이라는 노랫말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땜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이 가사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으면서 인기가 있나 봅니다. 이렇게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내가 해야 한다.’라는 삶의 무게를 못 이겨 요즘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삶의 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즉, 홀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가 남긴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들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새들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 말에서처럼, 삶의 환경과 상황으로 힘들고 절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상황을 끊임없이 되뇌고 상상하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나를 옭아매게 됩니다. 우리는 정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다가오는 환경과 상황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내가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하기 38여 년 전인 남 유다 16대 왕인 요시야의 제13년에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 그리고 멸망 후 포로시대 초기로 이어지는 동안 남 유다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 시기는 남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일삼고, 악한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라고 권면하며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와 멸망이 예고되는 비극의 시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레미야서의 전반부로서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 말씀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에게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즉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남 유다가 비록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 뜻을 돌이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生死禍福)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뜻하신 대로 빚으시는 인생 토기장이십니다.
※ 토기장이는 결정권자이십니다.
전도서 3:1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은 다 이룰 기한이 있다.”라고 하십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무엇을 만들지를 계획하듯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는 결정권자이심을 말씀합니다. 잠언 16:9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물을 모두 만드신 후,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인간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사물을 만들 때는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것인가?’라는 목적을 세우고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각자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겨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43:21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14:4에서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 말씀은 사람이 넘어지거나 세움을 받는 모든 결정을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느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려 있고, 아내는 중증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이미 가정에는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명은 얼마 전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이들도 결핵에 걸려서 살아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지만 낳는다고 해도 폐결핵으로 돌볼 수 있을만한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 학생이 대뜸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안타깝지만 낙태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우리도 이 학생처럼 내 생각, 내 경험으로 사람을 보고 일을 판단할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깨닫기 쉽도록 당신께서 인생의 토기장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사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런지는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로마서 9:21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똑같은 진흙으로 뚝배기를 만들든지, 항아리를 만들든지, 종지를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백성들은 자기를 의지하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하셔서 버리고 떠나는 인생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돌아오라고 하시며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10:15에서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힌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결정권자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 내가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존 헌트’의 저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에서,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과 불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J.B.필립스의 책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Your God is too small)에서는, “네 인생의 크기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20-21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은 저마다의 목적을 따라 다양하게 있습니다. 다만, 이 그릇이 쓰임 받는 데 필요한 것은 자기의 목적을 알고 잘 준비되는 것입니다. 존 헌트나 필립스의 말처럼, 내 삶의 결정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잘 알지 못하여 나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분에 넘치는 존귀함을 너무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특별하신 사랑을 입은 유다 백성은 세상 쾌락에 젖어서 우상 숭배와 물질적인 부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존귀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을 전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 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1-2) 하나님의 탄식과 권면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라고 어긋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의 권한을 말씀하십니다. 본문 7-10입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이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기도 하시고 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은 쓰임 받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모든 생애에 역사하시는 섭리입니다.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고,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가장 어린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6-7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즉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그래서 잠언 16:3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계획하는 일들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계획을 말씀드리고, 내 생활에서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순종하면 재앙이 예고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구원을 약속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뜻을 따라 살면 구원의 약속이 재앙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 인생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영광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