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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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970회 작성일 2022-07-04 16:49

***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 / 요한복음 6:5-12

 

요한복음 6:5-13,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 들어가는 말

 

우리 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먹는 것이 사람의 여러 본능 중에 ‘생존본능’에 해당하며, 사람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본능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많은 부분(마 6:25-34)을 의식주(衣食住)에 할애하십니다. 마태복음 6: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시간에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도 여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오병이어의 이적’이라고 불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으로는 주기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 사람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에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적의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말씀임을 의미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熬餠二魚)의 이적 이야기와 이적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예수님의 설교가 들어있습니다. 1-10절은 이적의 서론이며, 11-13절은 이적 사건, 14-25절은 이적의 후기입니다. 26-58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하는 비밀에 대한 가르침이 성찬식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적의 내용은 잘 아는 대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가 든 도시락으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셨다.’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에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의 의미를 부여하는 예수님의 설교가 뒤따르기 때문에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 어느 시대에나 변함없이 이러한 역사를 이루시며, 지금, 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심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생명의 떡”에 관한 것입니다. 이 표적을 기록한 이유는 어느 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영과 육의 삶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아래의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주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은 지금 우리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도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약한 자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알고 겸손하게 내어놓는 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히 그들을 고치시고 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셨습니다. 비록 세월이 흐르고 문화와 생활이 변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 이적의 이야기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진리는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시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라는 것입니다. 본문 아래의 53-5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이 말씀은 마치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우리와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게 되는 생명의 비밀을 나타내십니다.

 

※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 장군이 런던에서 구세군의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부스는 이에 대하여, “발이 동상에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약 2:15-17).

 

‘지그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부스 장군의 반문 속에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균형 잃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예수’의 그림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현대 기독인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가? 나는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본문 말씀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는 외적인 목적은 ‘사람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지는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무리가 피곤과 굶주림에 지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서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전합니다. 마태복음 15:32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가 마치 인간의 영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육신의 생활이 있고, 그 육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수천 명의 사람은 대부분이 소작인들이거나, 주인을 모시고 있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가야만 집에 당도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리고 지쳐 있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육신의 음식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성도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써야 할 일로 가르치셨습니다. 신명기 15:9-11절에서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12:33절에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생활의 필요를 돌보셨음을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됩니다. 이 일은 주일(안식일)에도 허용될 만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눅 6:9)입니다.

 

예수께서는 생활의 관심뿐만 아니라, 성도의 마음 씀씀이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주님은 어느 날, 예배가 있는 성전의 입구에 서서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부자는 금화를 넣었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헌금을 함에 넣었습니다. 그중에 가난한 과부가 드린 엽전 두 닢도 들어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날, 가장 많은 헌금을 넣은 사람으로 엽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꼽으셨습니다. 금화와 엽전 두 닢은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차이가 납니다. 주님이 보신 것은 물질의 양의 아니라, 드리는 이의 마음과 자세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소유가 어떠한 것이든지 그것으로 뜻하신 바를 위해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소풍 도시락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달걀만 한 보리 떡은 가장 맛없는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작은 물고기 두 마리 역시 호숫가 사람들의 볼품없는 반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그 도시락을 내놓았을 때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긴 가뭄으로 양식이 고갈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르밧 과부’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병 바닥에 고인 약간의 기름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내놓았을 때, 삼 년을 먹을 수 있는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왕상 17:10-16). 이들이 내놓은 것은 결코 큰 것도, 좋은 것도 아니며, 많은 양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씀씀이를 아셨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놓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 작은 것들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보잘것없는 재능, 극히 적은 물질이라 할지라도 있는 것을 아낌없이, 감사함으로 내놓는 것을 기뻐하시며, 바로 그것을 기적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자, 권력자, 부자 등. 특별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이라 할지라도 열심과 성실로 행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역대하 16:9상반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8:12절에서는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물질의 양이나, 대단한 능력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순종하여 행동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의 생활에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마중물’을 아시지요? 오래전 마을에는 우물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가 있었습니다. 그 펌프 옆에는 물을 담아놓은 통이 있었습니다. 이 물을 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해야 물이 올라왔지요. 이 물을 마중물이라고 했습니다. 종잣돈, 씨감자 등, 어떤 결과를 내는 데 필요한 투자들입니다. 헌신, 섬김, 봉사, 나눔, 선한 일 등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적인 투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런 생활의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지혜자는 전도서 11:1-2절에서 지혜로운 삶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로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시편 126:5-6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예수께서 관심 가지실 때까지 소리 질렀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헌신이든, 봉사든, 물질적인 도움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투자하고 뿌려야 기적도 나타나고 삶의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삶의 원리를 종합하여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이는 우리 각자가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한 보상, 즉 보응(報應)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 직장이든, 사업이든, 가정생활, 사회생활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이 보상은 매일의 생활에서도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때에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2:6-8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이처럼,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삶을 아시고 필요를 따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4: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내 몸의 일이든지 영혼의 일이든지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삶을 살피시고 보응하십니다. 때로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라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셔서 주님이 채우시고 보상하시는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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