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내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
*** 내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 / 고린도후서 4:16-5:10
고린도후서 4:16-5:10,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사람들의 말을 잘 믿는 편입니까? 그렇다면 성경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관한 믿음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자신의 오감(五感),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느껴지는 것을 신뢰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후,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말하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오감을 많이 의지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감각은 영감(靈感, 영적 감각)입니다. 영감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바크’의 대표작인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이라는 신비주의 소설이 있습니다. 전직 비행사였던 작가가 비행에 대한 꿈과 신념을 실현하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일생을 통해 모든 존재의 초월적 능력을 일깨운 우화형식의 신비주의 소설입니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다른 갈매기와는 달리 비행 그 자체를 사랑하는 갈매기입니다. 멋지게 날기를 꿈꾸는 조나단은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단한 비상의 꿈을 꿉니다. 조나단의 이러한 행동은 갈매기사회의 오랜 관습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져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고 끝내 그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됩니다. 동료들의 배척과 자신의 한계에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수련을 통해 완전한 비행술을 터득한 갈매기 조나단은 마침내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초현실적인 공간으로까지 날아올라 꿈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나단은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동료 갈매기들을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로 이끌게 됩니다.
이 작품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진정한 삶을 향한 깨달음을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다른 갈매기들이 해변에서 혹은 인간 세상의 쓰레기들에서 썩은 고기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 자신은 높이 더 높이 날기 위하여 창공을 비행합니다. 결국, 조나단은 높은 하늘에서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갈매기 조나단이 추구한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마치 ‘믿음’과 같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바로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면 넓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되며, 육신적인 것에 집착하면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성한 성품의 삶을 살지 못하면 세상의 썩어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결국, 독수리가 닭처럼 사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을 봅시다.
본문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영의 삶이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으로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영의 삶을 소망해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 4:18절과 5:1절을 봅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잠깐 있다가 없어질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망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의 교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지금 당장은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으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제라도 부르시면 우리는 당장 이 육신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태평스럽게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육신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4:7절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 육신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 같은 이 육신은 나이가 들면서 낡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주님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새롭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9-10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과 감각을 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육신이 누리는 잠깐의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위한 삶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사는 이유입니다.
※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생명의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화석(化石)’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자수성가하여 엄청난 재벌이 된 50대 중년의 사업가입니다. 그는 유럽 여행 중에 자신의 주치의가 수행 비서에게 건 전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주치의의 말은 ‘사업가가 말기 암이며 잘해야 앞으로 1년 정도밖에 더 살 수 없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절망감이 온몸을 감싸서 자포자기와 허무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헛살아온 것을 깨닫습니다. 정신없이 살면서 일구어놓은 일들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그토록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그보다 더 귀하고 의미 있는 일들을 다 놓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1년 앞두고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를 키워 준 계모를 찾아가 고개를 숙여 감사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만나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지내며 형제의 우애를 되새겼습니다. 수십 년 만에 옛 전우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이후로 의도적으로 잊으려 했던 말들도 떠올랐습니다. 그 말은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늘 “예수 믿으라.”라고 하면서 들려주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 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분투와 분주함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두 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자신도 별수 없는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인생은 먹고 살기 위한 삶 그 이상이며, 창조자가 준 시간은 귀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에 잠긴 채 이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주인공이라면 앞으로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마도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돈벌이를 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심정으로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동이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동이고 기도하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 1-5절을 봅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내용이 좀 어렵지요? 단어 풀이부터 해봅시다. “장막 집”이란, 일시적인 거주지인 ‘천막’을 말하는데, ‘인간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을 의미합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란 ‘영원한 삶을 위한 예복을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예복은 요한계시록 19:8절에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순종하여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예복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비록 지금 육신으로 세상에서 살지만, 영원한 집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길이며, 생명의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내 삶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고아들의 아버지이자 기도의 사람인 ‘조지 뮬러’ 목사님에 대한 일화입니다. 뮬러 목사님은 일생동안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고아들을 위해서는 많은 돈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 고아들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요청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았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나 갈등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고아원에 양식이 모두 바닥이 나서 점심 끼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아원의 총무는 뮬러 목사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전과 같이 식사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식당에 앉히고 배식을 준비하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식사 시간이 다가옵니다. 지금쯤은 배식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음식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조급해진 총무는 다시 목사님에게 ‘기도만 한다고 되겠느냐? 음식을 준비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테니까 기다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고아원 정문으로 트럭이 들어왔습니다. 그 트럭은 빵을 가득히 싣고 있었으며 ‘배달처의 사정으로 빵을 배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아원이 있어서 들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빵을 드려도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빵은 점심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식탁에 올랐습니다. 그 이후 믿음이 없었던 총무는 해임되었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입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나 의혹이 단 1%도 들어있지 않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온전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능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9: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4: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처럼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에는 인색하고 우유부단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말씀이 내게 엄청난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시련이 많고, 염려하는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마치 우물을 곁에 두고도 목말라 허덕이는 형상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위대하지만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사실로 인정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상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리 훌륭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능력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즉 믿음이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어느 권사님이 갑자기 다리가 마비되듯이 아파 왔습니다. ‘곧 낫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갈수록 더 많이 아파서 이제는 걸음도 잘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지금 봉사하러 가야 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실 줄 믿고 병원비 백만 원을 헌금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날의 일정표대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프던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은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종일 잘 걸어 다닌 것입니다. 권사님은 “50년이 넘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제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라.고 했습니다.
이 간증과 비슷한 상황의 성경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여 조롱을 받았고, 마음의 깊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성전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했으며,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후로 한나는 얼굴에 근심하는 빛조차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한 것입니다. 이처럼 내 삶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한 마음으로 믿고, 생활에서 그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11: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처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기도한 것을 이미 내게 이루어졌다고 믿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내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여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믿음을 구하시고 동시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본문 4절에서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성령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씩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맡기고, 감사하기를 연습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성장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연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