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생활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
*** 생활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 / 요한복음 2:1-11
요한복음 2:1-11(공동번역성경), “1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리 지방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2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3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4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하라고 하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6 유다 인들에게는 정결 예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 예식에 쓰이는 두세 동이들이 돌 항아리 여섯개가 놓여 있었다. 7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8 예수께서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 하셨다. 하인들이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9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물을 떠간 그 하인들은 그 술을 어디에서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잔치 맡은 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술맛을 보고 나서 신랑을 불러 10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 하고 감탄하였다. 11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리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 들어가는 말
예전에 청년부 성경공부 할 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성품’이란 ‘성질과 품성’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인자하심, 선하심, 공의로우심, 사랑이 많으심 등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속성’이란 ‘사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불변하심, 거룩하심 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대학생인 어느 청년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아픔이나 삶의 고통을 모르실 것인데, 어떻게 사람들의 고통이나 삶의 어려움 같은 것을 공감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그러면서 청년은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도우신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청년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면 구약에서 나타나는 전쟁과 피로 얼룩진 엄하시고 무섭고 두려우신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어느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과 보복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약성경 중의 일부만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나 같으십니다. 다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죄의 대가(代價)를 치러신 사랑의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말씀 모두에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에 바로 이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즉‘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함께하시면서 아픔과 고통, 기쁨과 즐거움까지도 함께하시는가?’라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우리나라의 옛 풍습도 그러했지만, 유대인들의 결혼잔치는 온 마을의 중대한 잔치였습니다. 신부가 시댁으로 가는 것은 수요일에 이루어지고, 실제 결혼예식은 밤늦게 행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손님들은 모두 등불을 가져야 했습니다. 예식에 끝나면 신랑 신부는 덮개 한 장을 함께 쓰고 가능한 한 가장 먼 길로 돌아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갑니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혼부부는 일주일 동안 집에 머물면서 집을 개방해 놓습니다. 그동안 축하연은 계속되고 신랑 신부는 결혼 예복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쓰고, 마을 사람들은 신랑 신부를 왕족 대하듯이 합니다. 이 축하연 기간은 새로운 부부에 있어서는 생애 최고의 시간이었으며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도 그 즐거움에 동참합니다. 이 잔치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포도주입니다. 유대 속담에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포도주가 차지하는 위치가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포도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술’이라는 개념보다 ‘순수한 포도 음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님 접대는 신성한 의무였으며, 특히 혼인 잔치에서는 넘칠 만큼 풍성하게 베푸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대접할 음식이 떨어진다는 것은 신혼부부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남기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행하신 첫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예수님의 가정과 친분이 있는 집으로 보이는 갈릴리 가나의 어느 가정에서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일주일간이나 계속되는 잔치가 무르익을 즈음에 포도주가 바닥이 났습니다. 손님이 예상보다 많이 와서 일찍 바닥이 났는지, 아니면 잔치 음식을 얼마나 할지 대중을 잘못해서 너무 모자랐는지는 내용에 없으니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빨리 포도주를 구하지 못하면 혼인 잔치는 도중에 끝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가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나서서 예수께 문제 해결을 부탁합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자신을 나타낼 때가 되지 않았으며, 자신이 관여할 일도 아니라.’라고 하시며 사양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잔칫집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지시대로만 해라.’라며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책망하시거나 다시 거절하지 않으시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이적’을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이적으로 무엇을 알려주시려 했겠습니까?
※ 예수님의 관심이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머무는 곳을 보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관심이 머무는 곳을 봅시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2:34절에서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이는 ‘사람들의 관심이 세상의 보화, 재물에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사람의 관심이 의식주(衣食住) 생활에 있음을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투는 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명예와 권세에 관심이 많음을 보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부자 청년 관원, 바리새인, 일반 백성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관심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 권세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몇 년 전에 인터넷 뉴스에 [한국인 '삶 만족도' OECD 36개국 중 25위로 하위권]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랐습니다. 한국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등 36개국 가운데 하위권 수준이라고 발표했습니다. OECD의 ‘2014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 2014)에 따르면, 한국은 11개 세부 평가부문 가운데 ‘삶의 만족도’ 지수가 6.0점이었습니다. 이는 34개 OECD 회원국과 러시아·브라질 등 모두 36개 조사대상국 중 하위권인 25위였습니다. 전체 조사대상국 평균은 6.6입니다. ‘삶의 만족도’는 인생 전반에 대한 만족도를 0~10점에서 매긴 수치로 국민이 느끼는 행복도를 반영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 권에 들며, 군사력으로는 세계 6위입니다. 이렇게 잘 살고, 삶의 질은 높아졌는데, 왜 만족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의 관심이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송 중에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라는 가사가 있듯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관심을 두면 결코 만족도, 감사도, 기쁨도 없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도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관심을 두었기에 당황스럽게 된 것입니다. 이 이적의 목적은 사람의 관심을 예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즉 세상적인 부족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마가복음 2:17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5:32절에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10절에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병든 자, 소경, 귀신 들린 자, 어린아이와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弱者) 죄인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을 고치시며,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은 백정이나 종들과 같은 무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우리를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의 역사 속에 계시면서 그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으로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살피시기 위하여 친히 강림하셨으며, 얍복 강가에서 인생의 위기 앞에서 고민하며 부르짖는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인생의 그늘진 곳에서 질병과 가난과 소외됨으로 고통 하는 사람들을 찾아주시고, 병을 고치시며, 먹이시고, 위로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다하여 낭패를 당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계셨습니다. 그들이 아직 주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며,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잔칫집 주인이 예수님의 능력만 알았다면, 그리고 그 예수님이 지금 자신의 집에 계신다는 사실만 알았던들 낭패로 인하여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시기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시고 항상 함께하겠다.’라는 약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 우리가 예수님께 가져야 할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져야 할 관심은, 한 마디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가나의 잔칫집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아니었으면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낭패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치에 어긋나는, 그래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순종하라.’라는 특별한 당부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병들어 죽어가는 딸을 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딸의 병을 고쳐달라.’라고 간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이는 ‘이제 다 끝났으니 그만 포기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예수께서 살리신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능력에 관심을 두라.’라는 명령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의 삶의 한가운데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절대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을 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성공적인 무역업자 한 사람이 중요한 대사직에 임명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큰 명예를 베푼 여왕에게 감사했지만, 이 직무를 면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몇 년 동안 외국에서 대사직을 하는 동안 자기의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고,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여왕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외국에 나가 나의 일을 돌보시오. 그동안 내가 그대의 일을 돌보리다.” 여왕의 말을 듣고 무역업자는 대사직을 수락했고, 몇 년 동안 외국에서 대사직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직무를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여왕이 약속한 대로 그의 사업을 아주 잘 돌봐 준 것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일을 경영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바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면, 우리 육신의 삶의 위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경영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변두리가 아니라 한가운데 계시며, 나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주님께 나의 생애를 맡기고,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들을 오직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