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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374회 작성일 2022-09-26 12:12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마태복음 6:3-6, 16-18

 

마태복음 6:3-6, 16-18,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들어가는 말

 

한자 격언 중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의미인데, 누군가에게 여러 번 말로 설명 듣는 것보다,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즉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24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십니다. 고후 4:18에서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하십니다.

 

두 천사가 여행을 하던 도중,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만한 부잣집 사람들은 저택에 있는 수많은 객실 대신 차가운 지하실의 비좁은 공간을 내주었습니다. 딱딱한 마룻바닥에 누워 잠자리에 들 무렵, 늙은 천사가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 구멍을 메워주었습니다. 젊은 천사는 의아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이렇게 대우하는 자들에게 그런 선의를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늙은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다음날 밤, 두 천사는 몹시 가난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농부인 그 집의 남편과 아내는 그들을 아주 따뜻이 맞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함께 나누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침대를 내주어 두 천사가 편히 잠잘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 내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우유를 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득원인 하나밖에 없는 암소가 들판에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천사가 화가 나서 늙은 천사에게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부잣집 사람들은 모든 걸 가졌는데도 도와주었으면서, 궁핍한 살림에도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나누려 했던 이들의 귀중한 암소를 어떻게 죽게 놔둘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늙은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부잣집 저택 지하실에서 잘 때, 난 벽 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 나는 벽에 난 구멍을 봉해서 그가 금을 찾지 못하게 한 것일세. 어젯밤 우리가 농부의 침대에서 잘 때는 죽음의 천사가 그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대신 암소를 데려가라고 했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방금 위의 젊은 천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서 우리 인생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적다.’라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 가운데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일들, 볼 수 없고 인지할 수 없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불평하며 똑똑한 척할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2-4)라고 하시면서, 38장에서 41장에 이르도록 온 우주를 만드신 이치에 대하여 욥에게 말씀하시며 묻습니다. 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지금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깨닫지도 못하는 은밀한 삶의 영역을 살피시며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밀하게 행하시고 은밀한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진실한 신앙으로 세워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너무도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문학가들조차도 ‘문학의 백미’라고 부르는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수칙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운데 부분의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은밀하게 행하여야 할 세 가지’가 본문 말씀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에 관한 사랑의 표현이며, 기도는 하나님께 관한 신뢰의 표현이며, 금식은 자신을 위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신앙적 표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이 하나님만 아시도록 행하여야 함.’을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의 삶은 사람들에게 나타내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보이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을 나타내거나 자랑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6:2,5,16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나타내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의 방법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만 보이도록 하는 신실한 삶’입니다. 즉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 삶’입니다.

 

※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들이 너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육신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고, 지옥도 존재하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세상에 다시 오실 약속도 믿습니다. 하지만 생활에는 이 믿음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믿는다.’라는 것과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히브리서 4:2절에서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귀한 복음이지만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하면 유익이 없고, 사랑이 그리스도인 최고의 덕목이지만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그 믿은 것을 생활 속에서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보고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26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더욱 큽니다. 먼저 보이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자신의 눈이나 다른 감각들을 절대 신뢰할 수 있습니까? 주보의 신앙의 생활화에 담긴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은 도로에 그려놓은 그림입니다. 궁금하시면 인터넷 유튜브에서 ‘착시’라고 검색해 보세요. 정말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 눈이나 감각들은 착각을 잘 일으킵니다. 그래서 눈이나 감각은 신뢰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여, 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것들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시편 102:25-27에서 시인은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후서 3:10에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쌓아놓은 모든 것은 이렇게 다 무너지고 풀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들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형식주의로 무장하고 공격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은 영과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많은 교회는 몸은 주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지만, 마음은 눈에 아른거리는 세상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인용하여 이 세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6-8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르느니라.” 이런 외식적인 신앙으로 변질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마십시오. 요한일서 2:17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하여 거듭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마음을 두어야 하는 일은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신앙의 일들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이웃과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신앙의 자세를 대표적으로 가르치는 예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고’ ‘금식은 얼굴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하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주제는 ‘은밀하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은밀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도록 하라.’라는 것입니다. 즉 ‘지나친 형식주의를 배격하라.’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게 여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마저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만 보시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실하고 충성된 삶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해외여행을 간 그리스도인들이 좋지 않은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국내에서는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다가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에서는 도리에 벗어난 행동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형식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신앙이라면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뿐만 아니라 사람이 전혀 없는 오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경건한 삶을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신앙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이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행하라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항상 모든 일에 주님께서 보시도록 영과 진리로 행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야기 한 토막으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서양 연극 중에 ‘단지 15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한 젊은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습니다. 뛰어난 성적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심사에서도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제 학위를 받을 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고, 그의 앞날은 장밋빛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정밀 검사 결과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은 시간은 단지 15분… 그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5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인생은 10분이었습니다. 이때 그가 누워 있는 병실로 한 통의 전보가 왔습니다. ‘억만장자였던 당신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상속 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에게 재산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의 박사 학위 논문이 올해의 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된 것을 알려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이 축하 전보도 그에게는 아무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절망에 빠진 그에게 또 하나의 전보가 왔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으로부터 온 결혼 승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보도 그의 시계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15분이 다 지나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 생명과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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