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복된 눈과 복된 귀
*** 복된 눈과 복된 귀 / 마태복음 13:10-17
마태복음 13:10-17,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 들어가는 말
예전 어릴 때, 종종 ‘당달봉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달봉사란 ‘청맹과니’라고도 하는데, ‘눈이 멀쩡하지만 못 보는 눈’을 말합니다. 즉 ‘눈 떤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눈 모양도 있고, 눈동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 신경이 죽어버려서 볼 수가 없는 눈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데 더듬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영적 당달봉사’의 안타까움을 말씀하십니다. 영적 당달봉사라고 하는 뜻은 ‘영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밀들이 제자들에게는 알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편파적으로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신 것입니까?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본문 15절에서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영적 감각을 닫아버렸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1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없어서 스스로 영적인 소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세상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복된 눈과 복된 귀가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장’이라고 부릅니다. 일곱 가지의 중요한 비유를 통하여 천국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본문의 내용인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닫혀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들어도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비유를 깨닫는 자만이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왜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본문 15절에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에 두고 우상들에게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천국의 비밀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이 비밀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 천국의 비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3:16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의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시므로 천국의 비밀이 됩니다. 이 비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 영적인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경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물건들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이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했습니다. 아이가 자랐을 때 안과 수술로 명성이 있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을 그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는 ‘수술만 하면 아이는 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당장 수술을 받게 했고,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붕대를 풀던 날, 아이는 가장 먼저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아이는 무엇에 이끌리듯이 창가로 가더니 창밖의 풍경을 신기한 듯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고 왜 진작 말씀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엄마는 감사와 감격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에게 수없이 이야기 해주었지만, 네가 느끼지 못했단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 물건들의 모양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설명을 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도무지 상상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영생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천국과 지옥, 거듭남, 부활의 삶 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신앙이 확신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 4:41)라고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깨달을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14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즉 영적인 일들을 깨달음이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깨달음이 없어서 영적인 소경이 되면, 세상에 섞여 있는 온갖 지식과 현상들에서 진리와 올바른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30대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 시절(1923-1929) 때의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백악관에 초대를 받아 아침 식사를 할 때, 초대받은 많은 사람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식사 때의 대통령 행동 때문입니다.
식사 때, 대통령이 커피잔을 들어 받침 접시에 커피를 붓고, 설탕과 프림을 타는 것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그것을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곧 대통령이 그 접시를 고양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따라 한 손님들이 그 커피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양이에게 주겠습니까? 자기가 마시겠습니까? 정말 난감한 지경이지요.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야, 이것 좋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갑니다. 또 사회나 국가적으로 어떤 이슈가 생기면, 그 내용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군중심리에 이끌려 소리를 지릅니다. 바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들린 일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면서, 바울을 잡으려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고,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어처구니가 없지요? 그런데 지금 세상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영의 눈과 영의 귀가 열려 있지 않아서 영적인 깨달음이 없으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13:21-22을 봅시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지면, 그리스도인들의 눈과 귀를 먹게 하여 분별하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거짓된 일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영으로 깨어있는 길은 매일 기도를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 분별의 은사와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 복된 눈과 복된 귀란 어떤 것입니까?
예전의 축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이영무 감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독은 선수의 기질과 성품에 따라서 역할을 맡깁니다. 저돌적이며 창의력의 있는 선수는 공격수로 기용합니다. 이런 선수들은 성격도 거칠고 다혈질입니다. 반면에 안정적이고 냉정하고 침착한 선수는 수비수로 기용합니다. 포지션을 정할 때는 체격 조건도 따져서 정합니다. 그런데 기질도 체격도 안 되면서 자꾸만 감독의 결정에 토를 달면서 ‘나 골 넣고 싶어요.’ ‘나 어느 포지션에서 뛰고 싶어요.’ 라고 하면 감독은 그 선수를 아예 출전 리스트에서 빼버립니다.”
한갓 운동 경기에도 이렇게 조건을 따져서 사람을 세우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일군을 세우시는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 개개인의 모든 조건을 다 따져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리에 나를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를 보내시고 머물게 하시고 일하게 하십니다. 지금의 내 자리를 불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내 영의 눈과 귀는 열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평안도 기쁨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본문 14-15절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에 나타내시는 영의 일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복된 눈이며 복된 귀입니다. 로마서 12:2-3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렇게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영적인 분별로 깨달을 수 있고, 육신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하나님 음성을 느끼는 것이, 복된 눈이며, 복된 귀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정작 진짜 비밀을 찾지는 않고 엉뚱한 것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다닙니다. 이러한 현상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로마서 10:2-3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만족할 어떤 것을 기대하며 찾습니다. 그래서 시편 49:20절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생명을 얻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부중지어(釜中之魚)’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에 광능군 태수인 ‘장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태수가 부임해 보니 관내에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 떼가 말썽이었습니다. 태수는 결심을 하고 도적 떼들이 있는 산채로 찾아가서 두목을 만나 인간의 도리로 설득을 했습니다. 태수의 말에 도적 두목이 깊은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는 떼를 지어 도적질하므로 목숨을 이어 왔지만,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압니다.”라고 하면서 도적의 생활을 청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장차 삶아져서 먹힐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물고기’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처한 입장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한 채 한가롭게 노니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고, 듣고, 깨닫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 너무도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워 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복된 눈과 복된 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쓸데없는 세상의 것에 매달려 인생을 낭비하지 못하도록 때로는 어려움과 고통으로 깨우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눈과 귀를 열어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