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나 자신의 가치를 아십니까?
*** 나 자신의 가치를 아십니까? / 디모데후서 2:14-21
디모데후서 2:14-21,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한 종양의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 들어가는 말
세상의 모든 생물(生物)과 사물(事物)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지문이 다르듯이 성품과 가치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면 가치는 어떻게 형성되겠습니까? 가치에는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고유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 상황과 환경에 따라 형성되는 일시적인 가치도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인품과 지위와 그에 따른 직능(職能,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의 가치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인 가치가 더해집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같은 왕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하며, 백성들을 어떤 기준으로 다스렸느냐가 그 왕의 가치 기준이 되었습니다. 역대하 32:33절에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그를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그의 죽음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더라.”라고 했으며, 역대하 21:20절에서는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부를 때 예전에는 배 목사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대표회장으로 부릅니다. 이는 나의 지위와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더하여 불리는 나의 가치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그 사람의 삶을 보면서 나름대로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보는 나 자신의 가치와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치는 어떠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둘째 편지이며, 신약성경의 16번째 책입니다. 특히 본 편지는 바울의 걸작으로 불리며,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와 함께 목회 서신으로 부릅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와는 내용상으로 다르고, 바울 자신의 마지막을 느끼면서 쓴 편지이므로 바울 편지 중에서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앞부분에서 ‘전도자는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으며, 이어서 바울은 디모데가 어떻게 해야 좋은 군사가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그 교훈은 디모데가 먼저 진리의 말씀에 전념하여 교회를 거짓 교훈에서부터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14-19절). 또한, 디모데 자신이 경건에 힘쓰며 교회의 덕을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20-26절). 이 내용은 교회 지도자에게만 요구되는 자세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가치를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말다툼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며,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가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치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세상에서의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세워가야 합니다.
※ 어떻게 나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까?
동물들이 먹이를 사냥하는 것을 보면 아무렇게나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어 사냥합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서 사냥하는 사자나 치타 등은 먼저 사냥할 동물을 정합니다. 그리고 바람 방향과 대상, 동물의 크기, 속도, 민첩성, 도주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혼자 혹은 무리와 협동하여 사냥합니다.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시선은 오로지 사냥감에 집중합니다. 최대한 몸을 낮추어 들키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여 사정권에 들어오면 전력질주(全力疾走)합니다. 몸은 달리고 있지만, 머리는 흔들림 없이 사냥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먹이를 향해 돌진할 때는 온몸의 근육들이 최고의 능력을 뿜어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동물들도 사냥을 위해서는 잡을 먹이 즉 목표를 분명히 하며, 그 먹이를 잡기 위하여 방향과 분명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도 성공하지 못할 때가 절반이 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루, 하루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별 의미 없이 소비해버립니다. 어떤 경우는 목표를 세웠지만, 마음의 자세도, 삶의 방향도, 목표와는 전혀 다른 곳을 방황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세상적인 입신출세에 삶의 목표와 방향과 자세를 설정합니다. 본문에도 이렇게 목표가 잘 못 설정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 15-17절을 봅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한 종양의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올바른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하여 힘쓰라고 합니다. 그 목표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말씀에 충실한 일꾼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힘쓰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기본 틀입니다. 만일 지금 내 삶이 이 목표를 향하여 잘 나아가고 있다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면, 한 달란트 받았던 종처럼 그 목표를 완전히 묻어두었다면, 하나님께 무가치한 인생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내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가 나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4:34-35절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예수께서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소금을 비유하여 사람의 가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치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인 가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이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 맹인의 가치는 ‘쓸모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맹인의 가치는 ‘하나님의 일은 나타내는 그릇’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가늠하는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치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 그러면 어떻게 내 가치를 올릴 수 있습니까?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이며 동시에 설교가이고 찬송가 작시가인 ‘호레이셔서 보나(Horotius Bonar, 1808-1889)’목사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보나의 신앙 열심을 저울질하더니 “당신의 신앙 열심은 백근이오.”라고 하면서, 그 열심을 분석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기심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14근, 파당적인 열심 15근, 명예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22근,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내는 열심 23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은 26근.’ 잠에서 깨어난 보나 목사는 자신의 열심이 얼마나 인간적인 발상에서 우러난 것인가를 깊이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보나 목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로마서 10: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실제로 엉뚱한 열정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지금 당장 꼭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집착하게 됩니다. 더 급하고 필요한 일은 제쳐 두고 말입니다. 이러한 삶은 자신의 생명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불필요한 것들에 집착하며 생명을 낭비합니까? 로마서 12: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은 ‘꼭 필요한 것, 절대적인 가치를 찾아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면 꼭 필요한 것, 하나님께서 높이 사시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높이 사시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상한 신분을 가진 성도가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께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8절에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는 고백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높이 사시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채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행전 11:26절입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 제자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보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하는 삶을 일컫습니다. 즉 예수께서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셨던 말씀을 생활에서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모독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말과 행동이 다르다.’라는 것이 가장 큽니다. 즉 옳은 소리 잘하고, 많은 말을 하지만, 자신이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힘쓰라.’라고 하십니다. 본문 14-16절을 봅시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내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기초는 말을 조심하며, 자신이 말한 것은 책임감 있게 지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6-3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말의 심각성에 대하여 야고보서 3:10절에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2절에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말을 조심하며 마음을 잘 다스리면 행동도 올바르게 변합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을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 그리스도인답게 나타내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준비된 그릇이 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길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생의 참가치입니다. 인생의 참가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목적이 있고 달란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을 조심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 그리스도인답게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잘 준비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참가치를 인정받아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