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영적인 메아리의 원리
*** 영적 메아리의 원리 / 요한복음 5:24-29
요한복음 5:24-29,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들어가는 말
영국의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세 가지 법칙 중,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적용하면 다른 물체도 똑같은 힘으로 반응하는 법칙’입니다. 이 뉴턴의 법칙은 일상과 행동에도 적용이 되는데, 책상을 힘차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이 그 원리입니다. 신기하게도 이는 삶 속에서도 적용됩니다. 내가 선하게 하면 선한 것이, 악하게 하면 악한 것이 옵니다. 내가 부드럽게 하면 부드러운 것이 오고, 아름답게 생각하면 아름다운 반응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데 본문 29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그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다스리심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교회학교 노래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남의 말 내가 하면 그 말이 돌아오고 남의 흉 내가 보면 나도 흉을 잡힌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단다. 예수님이 오늘도 내귀에 속삭이신다.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여라.” 신약성경의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7:12절 내용을 주제로 한 가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선한 행동이 선한 행동으로, 악한 행동이 악한 행동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외친 말이 되돌아오는 메아리와 같아서 영적인 메아리의 원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그 결과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권한을 가지셨음을 나타내면서, 생명과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성에 관한 권한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권한’과 ‘심판하시는 권한’을 예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을 주며,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하십니다. 본문 앞쪽의 21-22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렇게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심판 원리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하시며, ‘자신이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에는 두 가지의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4-25절에서 말씀하시는 ‘현재적인 부활’이 있고, 28-29절에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때의 부활’이 있습니다. 24-25절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는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아 영혼이 생명을 얻는 ‘영의 부활이며 삶’입니다. 이 부활은 지금의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8-29절인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는 말씀은 마지막 때의 부활을 말씀하는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때 심판을 받기 위하여 ‘모든 육체가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은 이 마지막 때의 부활에서도 심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영과 육체의 두 영광스러운 부활은 엄청난 대가를 내야만 얻을 수 있는 값비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두 부활과 부활의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그 대가를 알고 지불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메아리의 원리입니다.
※ 메아리는 먼저 음원(音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열매를 기대한다면 먼저 무엇인가를 심거나 씨앗을 뿌려야 하고, 메아리가 있으려면 먼저 소리를 내야 합니다.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열매도 없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메아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은 소득의 원리입니다.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자신이 썩는 자양분을 통하여 자신을 복제한 많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우리 사람들도 부모의 희생과 헌신과 노력을 통하여 자녀들이 새로운 가정을 세워가며 대를 이어가게 됩니다. 농부든지, 회사원이든지, 기술자든지, 그 어떤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것을 활용할 때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오게 됩니다. 영의 생명과 영적인 일에도 반드시 수고와 희생과 헌신과 노력이 있어야 영광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미국 뉴욕에 이민한 지 20년이 넘은 72세의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 할머니는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그동안 고생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험난했던 20여 년의 이민 생활이 남긴 건, 당뇨와 고혈압, 관절염으로 거동조차 불편해진 몸입니다. 자식들도 다 결혼시켜 떠나보내고 어느덧 혼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잘못 믿어 전 재산을 잃고 말았습니다. 상심한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경사가 났습니다. 같은 연배의 한 멋진 신사 할아버지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할머니에게 다가와 할머니에게 무조건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할머니를 지내게 하며, 병원에서 진찰도 받게 하고, 휠체어 신세가 된 할머니를 위해 일거수일투족 헌신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뜻밖의 행복이며 삶의 변화였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주위에서는 그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왜 그렇게 헌신을 하세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이 사람에게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습니까? 이 할머니를 오랫동안 지켜본 친척이 할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늘 배우기를 힘썼습니다. 또 항상 말을 가려 할 줄 알고, 언제나 덕스러운 말을 찬찬히 하며, 감사가 입에서 늘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고 했습니다. 즉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할머니는 뜻하지 않게 절망적인 환경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불평이나 원망 없이 오히려 그것조차 감사하며 조용히 조국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감동되어 할머니의 여생을 돕고자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9-10절을 봅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감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선한 일이며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시편 50:23절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보답의 메아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 메아리는 자신이 외친대로 돌아옵니다.
건축재료인 벽돌은 다용도로 사용됩니다. 만일 벽돌로 다리를 만든다면 냇물이나 계곡으로 서로 단절되어 있던 사람들이 오가는 소통의 통로가 됩니다. 하지만 벽돌로 담을 쌓거나 댐을 쌓는다면 관계도 끊어지고 잘 흐르던 물도 소통이 막히고 고여버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담을 쌓으면 스스로 고립되어 버립니다. 얼마 전에 탈북자들을 통하여 북한 사정을 알아보고, 탈북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인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의 주제가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정착할 때 힘들고 고달팠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중에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출연한 상담자가 탈북자들의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탈북자들은 먼저 언어적인 소통이 막혔다.’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북한식 언어와 말투가 남한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고, 남한 사람들의 표현을 탈북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서로가 막혔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한 의 친구가 탈북자에게 어떤 일을 제안했는데, 탈북자가 ‘됐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후로 남한 친구가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됐습니다.’라는 말은 북한식으로는 ‘좋습니다.’라는 뜻인데, 남한에서는 좋지 않은 어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말이 통하는 자신들끼리만 모이게 되니 남한 사람들과는 더 멀어지고 단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서로가 언어의 표현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했습니다.
어느 지체 장애 여고생의 이야기입니다.
점심시간마다 저는 혼자서 밥을 먹고 있습니다. 원래는 함께 밥을 먹던 친한 친구 현지가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차츰 거리를 두더군요. 나중에는 다른 친구들 여럿이랑 밥을 먹고 저를 본체만체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혼자서 밥을 먹는 것에 점점 지쳐갔습니다.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아이들의 잡담을 듣는 것이 싫어, 혼자 운동장에 나가 밥을 먹기도 했지만, 자꾸 서러워지더군요. 하루는 밥을 먹다가 그만 내팽개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날 저는 용기를 내서, 예전에 친했던 현지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붙였습니다. "현지야, 왜 요즘 나랑 함께 밥 안 먹어?" 현지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습니다. 잠시 주춤하더니 말하더군요. "사실… 친구들이 너와 친하게 다니면 이상해 보인다고 말해서 그랬어.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우리 다시 함께할 수 없을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저는 울음을 터뜨렸고, 친구도 눈물을 보였습니다. 다음날 학교 교실에서 저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얘들아, 안녕!" 아이들은 잠시 이상하게 서로 쳐다보더니 놀랍게도 웃으면서 답을 하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벽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반 아이들과 저는 함께 점심도 먹고 이야기도 같이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다가가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겁니다.
여러분은 혹시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원망하거나 부정적인 마음을 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거짓 없는 진정으로 기도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실망하고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본문 24-2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우리는 이미 영의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거나, 내 생명이 끝난다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떨게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포함된 약속과 능력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이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용해야만 내것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되짚어 봅시다.
메아리는 반향(反響)의 원리입니다. 즉 음원(音源)이 없으면 되돌아오는 소리도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많고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구하고 행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시몬은 밤새도록 조업을 했지만 빈 배로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해가 뜨는 아침부터는 플랑크톤들이 물이 따뜻해지는 얕은 곳에 모이기 때문에 고기들도 플랑크톤을 먹기 위해 얕은 곳으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명령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시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고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만일 시몬이 예수님의 명령을 비상식적이라고 무시했더라면 그런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명령이나 요청이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믿고 순종하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모든 일에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여 묻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받게 된다.’라고 말을 해도 무시하고 순종하여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없습니다. 반면에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과 같은 작은 것이라도 주님을 믿고 순종하여 행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이 내 삶에서 나타나고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메아리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현재적인 약속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듣고 있는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과 권한이 주어집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작은 것이라도 뿌리고 심으세요. 그리하여 지금의 삶에도, 영원한 삶을 위하여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채워지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