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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1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968회 작성일 2022-05-24 21:41

바울신학

서론

바울신학이란?

바울신학이란,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사상을 일컫는 말이다.

바울의 신학 형성에 있어서 특별한 면은 신앙과 지적 연구만이 아니라 체험적 지식에 입각했고 누구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원했다는 것이다(갈 1:16,17 ; 2:6). 그럼에도 다른 사도들과 복음관에 있어 동일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이 성령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신학의 출발점은 기독론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재, 창조, 성육, 고난, 죽음, 부활, 우편에서의 통치 등이 그의 기독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울의 신론에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절대 지배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구주로 보내신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사실 바울의 신학적 특징은 하나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다. 따라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롬 3:10). 그의 구원론은 이러한 인간관에서 출발된다. 그래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칭의(롬 3:24 ; 갈 1:16), 죄와 율법에서의 구원(롬 3:24 ; 골 1:14), 단절되었던 교제의 회복인 화목(롬 5:10 ; 고후 5:18-20) 이 세 가지가 그의 구원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교회론에 있어서 그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회는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구성된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자의 생활을 교회와 굳게 결부시키고 있고 예배와 세례와 성찬을 교회의 중요한 임무요 특권으로 본다. 그의 종말론은 교회 자체가 이미 종말적인 단체요 모임으로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최후 승리의 날이 확실하게 임할 것이며 그 날에 성도들은 부활해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윤리 사상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동기로 철저하게 성령에 의거한 삶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에 의해 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에 의거한 삶으로서 범죄적인 생활로 전락되어 버린다. 반면에 사회윤리에 대해서는 주종관계와 국가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바울 신학이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처하던 율법주의자 유대인 사울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회심한 후 복음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앙과 그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립 표현함을 말한다.

바울은 선교활동을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이들 새로운 교회들과 많은 서신으로 문안, 권면, 격려, 지도를 하였다. 바울의 많은 서신들은 신약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을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윤리적인 내용들을 명확하게 제시한 개척 신학자이다. 고로 바울 사도의 서신들은 그가 신학적으로 조직적으로 기록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메시지인 바울서신을 각자 자신이 받은 사명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진술한 교훈과 그의 세부적 권면들을 꿰뚫고 흐르는 진리의 원칙들이 오늘 날에도 신앙과 실천에 대하여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 바울에게 영감을 주셨던 성령께서 동일한 역사로 오늘의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역사하고 계시다. 오늘날 우리가 바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바울신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 상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울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며, 또한 주님께 응답을 받으며 사는 삶이다. 또한 바울 신학은 원칙적으로 구원론이나, 교회론이나, 종말론이나, 이 모든 것을 그의 사상의 중심 테마인 “그리스도 안에”(구원론), “그리스도의 몸”(교회론), “그리스도 안에”(종말론)에 있는 한 점에다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새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롬14:7-9,빌1:20-22,골3:1-4).)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바울의 종교관은( 갈2:20; 고전15:30; 갈6:1417) 자기를 부르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또한 그리스도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다. 특히 바울의 신학은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려는 현대의 종교적 실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반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빌1:20-21; 고전2:1-52:13-14; 빌3:7-9.)

1. 바울 신학의 특색

1) 체험 중심 신학

바울은 처음부터 신학자로 출발함이 아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남 에서부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사상은 여기에서부터 발전한다. 바울이 말하는 체험이란 인간자신의 자의적인 힘에 의한 체험이 아니라, 바울의 체험은 그와 정반대로 예수가 나타나서 바울을 책망하고 넘어뜨리고 회개케 하는 불가항력인 강권적 외적의 힘에 의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요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체험은 인간중심인 인본주의이며 바울의 체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중심의 신본주의이다. 이렇게 본질상 다른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나타난 예수를 말하며 자기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 체험 중에서 완전히 죽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기를 말할 때에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1; 갈2:20; 롬14:7-8.)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살고 자기는 죽는 것을 항상 체험하면서, 다메섹의 체험을 생활의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체험은 사람들이 흔히 명상하는 가운데 무슨 비전을 봤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인생이 뒤집어지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그의 체험은 다른 종류와 비교할 바 아니다. 전 인생이 개조되었다는 이런 체험은 부활하신 예수가 거기에 나타나서 이런 사건이, 발생하였음으로 체험의 주동자는 그리스도이며 바울은 피동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을 뿐이다.

 바울의 이 엄청난 사건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는데 그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때는 정오였고(행 22:6, 26:13)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비추었고 (행 9:3, 22:6, 26:13)

-소리가 있었는데(행9:4, 22:7,26:14)

-히브리 방언으로(행26:14))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 하기에(행9:422:426:14))

-사울이 "주여 뉘시니까" 라고 했다. (행9:522:8, 26:15)

여기에 이 사건을 살펴보면 이사건의 전체를 예수가 지배하고 있고, 바울은 다만 "주여 뉘시니까"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여기서 바울의 체험의 성질은 하나님측이 주동이 된 예수 중심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체험한 내용은 빛을 본 것이며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 체험이 ‘물리적, 감각적, 객관적인 것이냐?’ 혹은 ‘신비적, 초감각적, 주관적인 것이냐?’ 또는 ‘환상이냐? 실제냐?’ 하는 문제인 동시에 ‘예수가 환상으로 나타났느냐? 실제적 부활의 몸으로 나타났느냐?’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바울은 다른 서신에 쓴 내용을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고전15:89:1.)는 모두 감각적으로 실제로 본 것으로 원전(原典)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본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론에 무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유형적 예수를 보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체험한 부활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니육에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0-41.)는 유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있어 자기가 본 예수는 유형적, 외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쓰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바울이 이끌려 삼층 천에까지 갔다고( 고후12:1.)하는 체험은 그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원전(原典)(원전 : 희랍어 원문 성경.)주석가는 바울의 체험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다메섹 체험은 외적인 체험으로 돌리고 있다.(도양술 저, [사도바울의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p.33.)

2) 그리스도 중심 신학

바울의 체험중심 신학은 자연히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체험의 내용이 예수의 빛을 보고, 또 그를 직접 만나고,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체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었다. 실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내던지고,( 빌3:8.)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하고, 일편단심 그를 위하여 염려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사나 죽으나 예수의 것으로 그 생애를 일관했다.( 고전2:21:71:31; 빌1:20; 롬14:8.)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십의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여행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면서 예수를 전했다.( 고후11:23-27.)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1-2,14:7-8.) 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예수 집착의 이유는

① 다메섹의 체험이 너무도 강권적이며, 거기에 나타난 예수가 바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을 주었으며,

② 바울 자신이 예수를 이단시 할 때, 진실한 기독교인 "스데반"집사를 죽이고, 또한 예수를 핍박했던 일을 생각할 때에 무지했던 자신을 자책하므로, 바울이 예수에게 집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 몸에 매질을 하면서까지 오직 예수에게만 복종코자 하였다.( 고전9:116; 빌1:20-21.) 그리고 바울은 회심 전에 이미 예수의 교훈이나 그가 한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만찬을 잡수신 일이나, 부활에 대한 일이나, 기타 예수님의 교훈이 많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전13:23-2615:12-21,7:17,9:14; 행20:35; 갈3:1-2.)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았다고 할지라도 회심 전에는 "육체대로"만 알았고 회심 후에는 "신령하게"만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후5:15-16; 갈2:19-20.)

결국 바울은 회심 전에 기독교도를 열심히 핍박한 점에서 볼 때에, 그는 예수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있었으나, 예수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고, 메시야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박해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들이 넘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치 않았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세례 요한이 예고하기는 했지만,( 마3:11-12; 요1:32-34.) 그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세례 요한 자신도, 믿어지지 않아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확인케 하였다.( 마11:2-5.)

바울은 회심 후에야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로 안후에는 그분만 붙들고, 살든지 죽든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평생을 일관하였다. 그는 실로 그리스도만 중심하는 그리스도의 봉사자요, 그리스도와 합한 자였던 것이다.( 빌1:20-21; 딤후1:11-12; 갈2:20.)

3) 중생 중심 신학

바울 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체험에서 오는 중생을 역설하는 데에 있다. 육체적으로만 예수를 알았던 사울이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보고는, 눈이 어둡게 되었고 그러나 그의 심령의 눈이 뜨면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은 3년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사는 동안 주님의 계시를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은 완전히 죽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새사람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미련하게 여겨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고로, 진노를 받을 자식이니, 이러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심령을 새롭게 하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 고전2:14; 롬8:7; 엡2:3; 갈5:24; 고후5:17; 엡4:22-24.)

중생한 새사람은 의와 진리로 지으심 받아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고,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다메섹에서 넘어짐같이 넘어져야 하고, 큰 회개와 중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생전의 사울은 예수가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았으나, 중생 후의 바울은 그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 안에 능력이 있고, 복과 부요함이 충만함을 보고 세상의 구주로 섬기게 되었다.( 고후12:9; 롬15:29; 엡3:8; 엡4:13; 갈3:16.) 그러므로 중생은 바울과 예수를 관계지어준 큰 계기가 된 것이다.( 갈2:20; 고후5:17; 딛3:5.)

바울은 이 중생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중에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갈1:13-16; 고전15:3-10; 빌3:5-11; 딤전1:12-16.). 초대교회도 바울의 중생문제를 중대시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도 여러 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행9:1-1822:3-15,26:4-18.). 그래서 그가 중생을 말할 때에 그것 없이는 예수가 없고 하나님이 없을 만큼 크게 취급한 것을 알 수 있다.

4) 선교중심 신학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선교 문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선교의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고전2:1-5; 롬1:16; 고전15:9-10; 엡3:7-9; 딤1: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함이라 하고, 자기는 나타내지 않았다.( 롬1:16; 고전1:182:1-2; 고후4:5.)

선교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예수에게 직접 받은 사명이요, 오히려 이 사명 때문에 예수가 다메섹에서 바울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리니"( 고전9:16.)라고 하였고, 그의 3회에 걸친 전도여행은, 당시의 세계 판도로서는 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 교회를 세웠고, 남이 세운 터 위에는 일하지 아니했다.( 롬15:20.)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으며, 앉은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도 상선의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중에서도 전도했다.(행13:42-46, 14:8, 16:16, 29-32, 17:18, 27:22-25, 28:23, 30-31.) 그는 전형적 전도자로서, 그 사명을 위해 담대하였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선한 뜻으로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면서 전도에만 열정을 다 바쳤다.( 빌1:20; 딤후4:2; 빌1:15; 살전2:8; 골1:28-29.)

그리하여 그의 선교중심 신학은 자연히 교회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흠이나 티가 없는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보고( 엡5:26.) 사랑하였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가기도 하고 편지를 썼다. 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고, 그가 쓴 서신들은 자기가 전한 예수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면서( 고후6:16; 딤전3:15.) 교리를 지키고, 권징을 하면서,( 딤후2:15; 고전5:13; 빌4:9; 딤4:2.)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한다.( 엡4:29; 롬12:5; 고전12:12; 엡4:15-164:1-3.) 이러한 바울의 교회관은 그가 진실로 일생토록 선교를 위하여 몸바친 모범적 전도자임을 알게한다.

2. 바울신학의 요소

1) 유대교적 요소

바울사상에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유대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랍비교육을 받았다.(랍비-유대인들이 교사를 부르는 존경의 칭호이다./선생의 칭호 /참고. 마23:1-8).) 그래서 그의 서신중에는 랍비들이 잘 쓰는 어투와 논리의 방식이 들어있다. 즉 개념과 개념을 대립시키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상과 사상을 엄밀히 구분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의 죽음과 생명, 옛사람과 새사람, 율법과 복음, 육과 영, 멸망과 구원, 아담과 마지막 아담(예수), 등과 같이 문제를 대립시키면서 결국에는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즉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체험을 분기점으로 삼고 대조적 방식으로 표시했다. 로마서 7장의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대조하면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에는, 세상 지식과 십자가의 도를 대조시켰다. 이 대조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5장 40-44절에서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한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였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다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 함은 그의 대조 개념을 능숙한 수사문장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문장에서 그의 독특한 인생 체험을 기초로 하면서도 유대적 요소로 희랍적 어떤 문학에 못지않은 글을 쓰고 있다. 바울의 문장에는 희랍적 문학서와 달라서 질적으로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어서, 이 세상문학에 비교할 수 없다.

희랍문학은 세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만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의 서신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이, 섞여 있어서 실로 황홀하고 생명력 있는 입체적인 파노라마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을 단순한 서적과 같이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격하 시키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진리를 놓치게 된다.

바울의 편지는 교회 앞에서 낭독되었고,(살전5:27)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시끄러울 때에 그 문제의 해결과 교회의 통일을 위하여 썼기 때문에 설교적이고 권면적이다. 때로는 지나친 표현의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신앙의 열정과 감정의 표현이며 신앙을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안 된다. 신앙 있는 사람에게는 이론보다 은혜를 더욱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 서신중에 부활사상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부활사상은 잊을 수 없는 그의 다메섹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에게는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부활사상은 그 당시 유대민족들 사이에 보편적 사상이라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종종 부활문제로 논쟁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다.( 마16:2120:1922:23-30; 막8:3114:28; 눅14:1420:27-36; 행23:6-8.)

2) 율법적 요소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교육을 받고 다메섹에 이를 때까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심 후에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나, 그 교육의 흔적은 전 서신중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강조하나 오히려 그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전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했다.( 롬1:1-4, 3:21, 4:18-24, 15:4-6; 고전9:9-10, 10:1-4; 행26:21-2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고전 2:7)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되었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갈3:4-5.)

그러므로 율법을 쓴 모세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된 자에 불과하고, 또한 그리스도는 전 생애를 통하여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나, 삼일 만에 다시 사신 것도 성경대로 성취된 것이고, 기독론의 근본 문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구원의 대 교리와 율법의 효용도 다 구약 가운데 있다고 한다.( 율법의 완성 -마5:17; 성경대로 성취 -고전15:3-4; 기독론의 근본 -고후5:14; 이신득구(以信得救) -롬1:17, 갈3:16; 율법의 효용 -롬3:20-21.)

많은 곳에서 바울은 "기록하였는데"라고 하면서 구약(율법을 포함)을 자유롭게 응용하며, 유대교의 율법을 기독교의 복음으로 재생하였다. 동시에 구약중의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신약교회의 신앙의 조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갈3:26-19.)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2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처 사라의 아들과 그 첩 하갈의 아들을 구별하여 전자를 자유의 아들, 영의 아들, 새 예루살렘의 아들로, 비유하고 후자 하갈의 아들을 노예의 아들, 율법의 아들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법은 율법 배후에 숨어있는 그 깊은 뜻을 찾아내려고 하는 바울에게 필요한 방법이었다.

3) 신비적인 요소

칼빈은 ‘구원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 없으면 헛된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바울은 어디서 신비적 요소를 얻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신비적 요소는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면 신비적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슈바이처 박사는 신비주의를 정의하여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 격리를 극복하게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지상적인 것 가운데 있으면서, 초시간적인 것 속에 들어가 있다고 체험하는 경우 거기에 신비주의가 있다."고 말했다. 바울이 신비적 요소를 제일 잘 나타내는 말로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바울의 밀착을 한마디로 잘 나타내는 말로서 서신중에 164회나 사용되고 있다.

 서신 가운데 바울이 신비적 요소를 나타내는 말을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1:8)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고후5:14)

-그리스도의 평강을(골3:15)

-그리스도의 관용으로(고후10:1)

-그리스도의 인내에(살후3:5)

-그리스도의 복종(고후10:5)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속에 있으니 (고후11:10)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엡5:21)

-그리스도의 할례(골2:11)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1:2)

그러나 보다 더욱 신비적인 말은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나니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산다."라고 한 것들이다.( 영에 있나니 롬8:9, 한 몸이라 롬12:5; 고전12:12, 성령이 우리 안에 고전3:16, 한 영 고전6:17, 내 안에계신 그리스도 갈2:20.)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요약하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과 인내와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율법개념

회심 전의 바울의 신앙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어려서부터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엄한 유대교 사상을 교육받고 성장한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이며, 축복의 약속으로 믿었다.

바울의 칭의관(稱義觀)은 하나님의 약속인 율법을 지키므로 의로워지는 줄 알았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뛰어난 유대인임을 자랑했다. 따라서 그의 메시야관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오리라하신 "메시야"는 반드시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 권세 자들을 심판하고, 영원히 통치하실 줄만 알았다.( 사9:6-7; 시89:3-4; 곌37:25; 단2:44; 눅1:32-34.)

하물며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구약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는 죽을 것을 말하며,(요12:34) 율법주의자들의 모순점을 지적 개혁을 주장함으로, 하나님 앞에 유일한 택한 백성으로 자부하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였다. 결국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복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대교 종교가정에서 율법으로 성장한 그는 빌립보서 3장 5절에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하였다. 또, 사도행전 22장 3-4절에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옥에 넘겼노니 " 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오리라 한 "메시아"가 예수이심을 믿게 되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던 그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했다.( 롬3:20-24; 빌3:9.) 이와 같이 그는 복음이 율법의 완성임을 믿었다.(마 5:17)

1) 율법의 유래

율법의 유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행동의 체계로서, 율법은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의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약속으로 주셨다.( 출24:12;34:28-29.) 그러나 인간이 그 율법의 의무를 다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인간 편에서 보면 수용 불가능하였다.( 롬3:10-12; 약2:10.) 율법은 인간에게 완전복종을 요구하였다.(갈 3:10) 허나 인간은 율법대로 살 수 없으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롬8:3-1410:2-4.)고 바울은 서신에 기록하였다.

2) 율법의 본성

모세가 전한 율법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친히 써주신 십계명이다. 다윗은 시편 19편 7-8절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전한 율법이 613가지나 된다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본성에 대하여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또한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하였다.( 롬7:1214.)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죄한 자가 되나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였다.( 약2:10; 갈3:10.)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믿었다.(히 12:2)

3) 율법의 역사

회심 후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180도 변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본 율법의 역사는

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함(롬3:19)

②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 함(갈3:10)

③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 됨(약2:10)

④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며(롬7:1)

⑤ 율법은 죄의 권능이 되며(고전15:56)

⑥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갈3:16)

⑦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으며(히7:1910:1)

⑧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만 하며(롬3:20)

⑨ 율법은 믿음이 오기까지 우리를 율법 아래 매여 갇혀 있게 하며 (갈3:23)

⑩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갈3:24) 하였다.

이와 같이 율법의 역사는 예수가 오기까지 필요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 아래 매여 있는 모든 자들을 율법에서 해방시켜 자유케 하였다 했다.( 갈3:21-23; 롬8:1-2; 히7:17-1910:9-10,14.)

4. 바울의 인간론

바울의 인간론은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며, 그의 기독론에 부속되는 것이다. 이유인즉 바울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만이 인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독교 사상은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위에서 거기에 기초를 두고, 모든 일을 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 라고 하였다. 바울의 기독론은 다른 사도들과 같지 않다. 다른 사도들은 유대교적인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바울의 것은 다메섹에서 본 그리스도를 중심하면서,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 정립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창조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 인간의 구조적 양면성

바울은 인간의 내적인 성질과 외적인 성질을 말함으로 일종의 인간론적 이원론을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내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또는 "겉 사람은 부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하였으며 "그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하였다.( 롬7:22; 고후4:16; 엡3:16.) 이러한 바울의 사고방식은 헬라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증거라고 혹자는 역설하고 있으나, 그러나 엄격히 히브리적 문맥 속에도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하였으며,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2:7; 욥33:4.)

바울은 이와 같이 인간의 구조적 이분 설을 인정하면서도 구조적 요소의 내적 본질에서 하나를 구성하는 인간의 인격의 근본적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엡1:9-10, 4:4-6; 고전6:17, 15:44)

2) 인간의 육신과 영

바울은 인간의 육신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몸은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고 순결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 그러한 일들을 위해서 지어졌다했다.( 롬1:19-20 (참고 창1:28) 윌리암 바클레이, [바울신학개론], 박문재 옮김, p.168.)

그러나 인간의 몸은 경험적으로나 실제 생활에서나 죄로 인도하며 죄에 매인 생활을 하게 한다. 이러한 약한 것들은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성품에 타고난 것이며, 이렇게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얼마나 오류를 범하기 쉽고, 또 얼마나 죄스러운가를 말해준다. 유혹 앞에서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넘어지고 마는 것이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성품이다. 유혹이 올 때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넘어질 뿐 아니라 죄에게도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했다.(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 박문재역, [바울신학 개론],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pp.168-169.)

또한 바울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했다.( 롬8:12-13.) 그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은 육체대로 살 필요는 없다. 이제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는 옛 사람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새 사람에 대하여는 산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이제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고후5:13-16; 갈5:16-1724-25 (참고 벧전4:1-2).)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갈2:20; 빌1:2021; 롬14:7-8.)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는 죄의 재료였던 본능, 열정, 감정, 욕구들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될 때는 선을 위한 재료들이 된다.( 롬8:28.)

바울은 이와 같이 인간의 육적 부분과 영적 부분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구조적 두 측면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완성을 바라고 또한 믿었다. 그는 이 구조적 두 부분의 완전 연합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가능함을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4510-11.) 또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였으며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후5:17; 고전6:17.) 한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과 영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 창조되어 한 인격을 이루도록 되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피조물인 것이다.( 엡1:3-6; 고전3:166:19 (참고 창1:27282:7).) 그러므로 인간의 육과 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 롬15:5-6; 고전6:2010:31; 빌1:20.) 인간은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보다 완전히 체험하게 된다.( 롬8:20-25; 고전15:35-49; 살전5:19-24.)

이와 같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간다."고 한다. 바로 인간의 몸은 "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이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 하였다.( 엡2:2122; 고전6:19-203:17.) 다시 말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헤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데 있다." 하였다.( 엡1:41116) 이와 같이 바울의 인간에 대한 신학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임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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