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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배경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868회 작성일 2020-11-03 21:55
 
신약성경 배경사
 
제 1 부 신약성경 시대의 유대교
 
제 1 장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1. 페르샤 지배하의 팔레스틴
유대교의 역사는 바벨론 유배시대 부터 시작된다. 페르샤는 대대적인 이주를 강요하거나 어디에서나 단 하나의 국가 종교만을 신봉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페르샤 정부는 직무상의 거래를 위하여 그들 자신의 거래가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5세기에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강한 충동이 일어났다.
느헤미아와 에스라에 의하여 다른 민족들과의 어떠한 결합도 용납되지 않도록 되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였으며 그들과는 어떠한 교역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서 비로소 가라짐에 성전을 건설하도록 재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아마도 그들의 성소 건축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같다.
예수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제하지 않았다. 원시 공동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생겨난 분열을 극복하였으며 복음을 사마리아에 전파하였다.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틴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샤의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였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누리던 권리의 상황에 대한 지배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온 나라 안에 희랍인들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생활은 깊은 영향을 받았다.
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또한 이 땅에 들어 왔다. 산헤드린에서는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우두머리들인 사제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을 지지하였다. 대제사장의 사회로 유대 민중들이 처한 모든 세상 적인 용무와 종교적인 용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합한 이 유대인 최고 관청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시리아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틴과 막카베어 독립 전쟁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하도록 노력하였다.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 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 하였을 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하는 말로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대의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마카베오(라틴어: Maccabeus, 히브리어: מכבים 또는 מקבים 마카빔,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하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3대에 걸쳐 독립을 하였던 고대 이스라엘의 마지막 독립 왕조의 이름이자, 그 일가의 이름)는 ‘망치와 같은 자’를 뜻하는 듯하다. 기원전 164년 12월 25일에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에 축제로서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졌다. 마카베오의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이 만족해했다. 그의 동생 요나단이 후계자가 되어 사령관과 우두머리 일뿐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했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방 지배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온은 밖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가 있었다.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 졌다.
 
4. 하스모네어 왕국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아들인 아리스토불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죽고 새로운 지배자 얀네우스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 한 후 십자가에 메달아 죽였다고 한다. 이는 임종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에게 바리새인과 다시 화해하도록 충고 했다고 한다. 기원전 67년 그녀가 죽고 합법적인 아들 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블 2세 가 왕위를 놓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아랍 제국의 운명과 팔레스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로마의 월등한 세력이 뛰어들었다.
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갔으며 또한 지성소를 실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성소에서 아무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명하였다. 방해 받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 공동체 뿐 만 아니라 제국 내에 있는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되어 있었다. 헤롯은 로마의 지지 아래 권력을 다시 잡은 것처럼 로마의 도움으로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데 성공 했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하였으나 과감한 결단을 하고 단호히 행동하는 대담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디아스포라에게도 헤롯은 유대교의 보호자로 등장했으며 회당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을 장려하였다. 소위 통곡의 벽이라는 건물이 헤로데스 시대의 성전 건물로 남아 있고 안토니아 성의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예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다(기원26-36).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그의 직무 수행은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제판 없는 사형 집행, 지속적인 잔학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헤롯은 그의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로 부터 살로메가 태어났다. 세례요한은 영주의 불의를 적나라하게 밝혔기 때문에 체포되었으며 헤로디아의 포악한 적대감으로 박대를 계속 받다가 결국 처형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영주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불렀으며 예루살렘으로 갔다. 필립프스는 로마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하였던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체제하면서 칼라굴라(3대, 37-41)는 기원37년 그에게 필립프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주었다. 헤롯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였으며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기원 52년부터 벨릭스가 총독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 얻어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다.
 
6. 유대 전쟁과 바르코흐바의 폭동
안토니아성이 점령되어 이제 온 도시가 유대인들의 손에 들어 왔다. 네로 황제(5대, 54-68)는 그의 가장 뛰어난 용장 베스파시안 을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하도록 파견하였다. 요세푸스는 그의 주민들과 함께 요타파타에서 항쟁을 하였으나 고수 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도성을 둘러싼 세 성벽 주변을 모두 돌파하여 방어자들의 격노한 항거를 곧장 밀어 버렸다. 성전은 최후의 전투에서 불타 버렸다. 티투스(10대, 79-81)는 지성소가 파괴되기 이전에 지성소에 침입 할 수 있었다. 성전과 도성이 파괴됨으로서 유대교는 가시적인 중심점을 상실하였다. 기원 73년 아마도 74년 초일 수도 있다. 마사다가 함락됨으로 최후의 항거는 분쇄되었다.
기원 2세기에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번 더(유대 대반란(66~70)이 끝난 후 40여 년이 지난 후 트라야누스 황제(13대) 때 일어난 반란이 있었음) 로마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드리안 황제(14대, 111-121)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갑작스런 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전 터에 쥬피터 성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바르코흐바(바르코흐바의 반란(132년–135년)은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인의 저항운동 중의 하나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요새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점령되고 바르코흐바는 전투에서 사망 하였다. 이로써 그가 메시아라는 전설은 사라졌다. 기원 4세기에 와서야 그들에게 슬픔의 날에는 도성에 들어가서 헤롯의 성전 가운데 남아 있는 벽에서 통곡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제2장 신약성경 시대에 유대교 안에 있었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조류
 
1. 묵시문학
1)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
수많은 흥망성쇠, 전쟁, 재난들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실현 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점점 더 긴박한 물음으로 생각 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기원후 2세기 초까지의 시대에 생겨난 묵시 문학에는 이러한 대망이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 있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흐름이 좋게 변화되는 것을 기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무서운 경악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 이 세상이 멸망으로 타락했는가 하는 문제가 묵시 문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고난으로 가득한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형벌 하시는 행위를 우리는 알고 있다. 개별적인 문헌 안에 있는 표상들과 진술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알게 되는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원론을 통해서 결정된다. 즉 이 세상이 지나가고 저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전통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종말을 향한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유배 이후에 생긴 예언 문헌에는 심판과 구원,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주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다. 묵시 문학가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유산으로서 이해되는 이러한 사상에 관계를 맺는다.
2) 묵시 문학의 저작물
묵시 문학에서는 근본적인 해석을 알아야 하는 형상과 비유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서들의 서술에 의하면 그러한 환각의 가치가 인정되는 구약성서의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의 문헌들을 덮어 봉인을 했다. 가장 오래된 묵시적 문학은 다니엘의 이름으로 전해 졌다. 에녹의 이름으로 두 권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한권은 이디오피아 말로 ,다른 한권은 슬라브 말로 전해진다. 이 책은 창조에서부터 멀지 않은 심판의 위험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성실과 끝까지 버티는 인내를 호소함으로 끝난다.
에스라의 이름으로도 묵시 문학적 문헌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왜 예루살렘이 포기 되었고 멸망 되었느냐고 하는 고통스러운 물음에 대답을 하고 싶어 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초까지 시대에 생긴 많은 유대교 문헌들 안에는 묵시적 문학 자료 들이 사용 된 짧고 긴 단편들이 발견된다.12족장의 유언장에는 교훈적이고 권면 하는 부분들이 묵시 문학적 내용으로 된 단편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사유가 지나 칠 정도로 묵시 문학적인 표상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올바른 율법의 이해를 묻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하면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유대교 안에서 형성되었다.
 
2. 팔레스틴 유대교 안에 있던 집단들과 유대교들
1) 사두개파 사람들
사두개파 사람들의 표시는 분명히 사독이라는 관련지을 수 있는데 그는 예전에 솔로몬 왕 밑에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두개’라는 말은 ‘사독’이라는 이름에서 왔는데 사독은 다윗 왕조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있었고 그 후로부터 마카베어 시대의 정치적 혼란 때까지 그의 자손들이 계속 대제사장직을 지냈던 사독 계열의 사제 집단을 말한다. 예수 당시에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식민 통치와 헤롯의 통치에 결탁하여 산헤드린을 바리새파와 함께 장악하고 있었으며 성전 체제의 기득권을 누리던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락한 성전에 안주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지지하였고 대부분이 고위직에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이루었고 도시인들을 대표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부유한 대지주들이었다. 그러나 높은 지위와 정치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사두개파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바리새파와는 달랐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확대하는데 사용하였던 구전을 인정하지 않은 점이었다. 이 사두개파는 산헤드린의 수뇌부를 형성하였다. 대사제들은 사두개파의 우두머리였으며 유대 사회와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예수 당시에는 복음서에서도 확인될 수 있듯이 안나스 가문이 대사제직을 맡았다.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가 지배하는 혼란 속에서 옛날 제사장의 사독 왕조는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았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안식일이 아주 신중하게 준수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안식일 계명을 악화시키거나 거스르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어 생각 해낸 결의법을 통하여 이런 혹은 저런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엄격하게 생각 하였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이미 하스모네어 집안 밑에서 분명히 하였던 정치적인 신중성과 재치 있는 행동은 헤레데스와 로마 총독들 밑에서 예루살렘에서 명망 있는 관직에 취임 할 수 잇게 해 주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페르쉼’ 혹은 아람어 ‘페리솨이아’, 즉 ‘구별된 사람’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바리새파 운동의 시작은 유대인의 신앙을 헬라주의적 외세의 현저한 증대에 대항하여 지키려고 했던 막카베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카베어 봉기를 일으켰던 율법의 신실한 유대인 무리들 가운데서 바리새인의 공동 사회가 생겨났다. 이들은 율법에 충실하였으며 정치적인 목표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쟁을 통해 올바른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따르고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정치적 권력 다툼을 일삼던 하스몬 왕조로부터 분리되어 경건한 생활, 기도,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실 미래의 전환을 준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혁명으로 메시야의 시대를 강제로 만들려는 집단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바리새파의 대부분이 율법학자 또는 서기관들이었으며 율법해석자들을 훈련시켜 의식법과 종교법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민사, 형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서기관으로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하여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점차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사두개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어 그 결과 하스몬 왕조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 때에는 정치권에 편입하게 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확고한 공동체로 연합하였으며 율법의 계명을 정확하게 준수 할 수 있었다. 바리새적인 공동체에는 개개의 사제들, 특히 평신도들, 수공업자들, 농인들, 상인들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유대와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들은 공동 식사에 모였다.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 하였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피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은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일에 집중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들의 생활에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를 향하게 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 했다.
3) 혁명 당원들(젤롯당)
예수 시대에는 젤롯당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연합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젤롯당의 맹아적 형태들은 A.D 6년 갈릴리 사람 유다와 바리새인 사람 사독에 의해 시작된 반로마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켈라우스가 해임되고 로마의 직접 통치가 세금 징수를 위해 인구 조사를 요구하게 되었을 때에 이러한 조치는 여러 유대인 집단들을 격분시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저항 운동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특히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으로써 그들의 반감을 표시하기를 거부하는 바리새파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이 후에 하나의 정파로 조직되고 연합된 젤롯당의 기원이 되었으며 A.D 66년 반로마 항쟁의 시작과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선동하였다고 본다.
이들은 로마 황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율법과 땅에 대한 비타협적인 신앙으로 성전과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투쟁하였으며 로마 황제 숭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였다. 당시 지배자들은 이들을 강도떼라고 불렀으나 실제의 의미로는 반사회적 강도, 원시적인 반란의 무리였다. 1세기 팔레스틴 민중들은 율법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민중 봉기를 선동하고 일으키는 이들을 많이 따랐다. 이들은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란히 인간의 통치 세력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단호히 거부하고 나섰으며 성전의 회복을 그들의 투쟁 목표로 삼았다. 또한 이 운동은 지배 계급에 대항한 기득권 회복 운동이기도 했다. 반로마 세력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계승하여 로마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성전을 회복하려는 무력 혁명을 추구하였다.
4) 엣세네파 사람들
엣세네파 사람들은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보다 더 물러난 생활을 했던 독자적인 유대인의 운동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아람어 ‘하사야’, 즉 “경건한 사람들”에서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바리새파와 같은 생활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고 회원들은 독신생활을 하였으나 종족보존의 목적으로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절대적 계명은 전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의식적인 정결을 지키는 것이었다. 장로 폴리니우스에 의하면 엣세네파 사람들은 사해 바닷가에 공동체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핍박 가운데도 율법을 끝까지 성실하게 지켰다. 그들은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은 하늘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으나 인간 몸은 영혼의 육신적인 감옥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쟁의 고통과 공포 속에 엣세네파 공동체도 몰락하고 말았다.
5) 테라페우테스 교단
테라페우스 교단은 마레오트 호숫가에 기도원 같은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명상적인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매일 성서를 연구하고 안식일에만 공동 예배를 드렸다. 이집트의 디아스포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된 엣세네파 운동의 지엽으로 볼 수 있다.
6) .쿰란 공동체
(1) 쿰란 텍스트에 관한 개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유대 사본의 발견사는 1947년에 유대 사막에서 살고 있던 아라비아 사람들이 많은 질그릇 항아리들 안에 두루마리가 담겨져 있는 동굴을 발견했을 때로부터 시작된다. 사해 해변가에 히르벨 쿰란이란 장소가 있는데 이 곳에서 유대인의 공동체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두루마리를 보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넣어 두었으나 전쟁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고고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이 때 발견된 사본들이 완성된 시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는데 기원전 23세기 중엽에서 기원후 68년까지 그 공동체는 쿰란 안에 살았다. 쿰란 동굴 안에서 발견된 사본들과 단편 가운데 많은 성서 본문과 유대적인 텍스트들이 있다.
(2) 쿰란공동체의 신앙과 교리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정들이 매일 매일의 생활 조건들에 조화를 이루도록 율법을 해석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는 율법에 대한 어떠한 타협과 완화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토라의 모든 요구를 실행하는 것만이 가할 뿐이었다. 이 공동체는 사제들에 의해 지도되었고 사제적 정결을 위해 언제나 쇄신을 하였다. 재산은 공동의 소유였으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부정을 막기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였다.
(3) 쿰란 텍스트와 신약 성경
신약성서에는 쿰란공동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비록 이들이 격리된 생활을 하긴 하지만 경건함과 교리의 모범은 유대교 안으로 넓게 유포,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교리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유사성이 있음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쿰란 공동체의 사상을 수용하기 도하고 거부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 안의 많은 부분들이 쿰란공동체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7) 율법 학자들
율법 학자들의 기원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제사장의 임무였다. 포로 시대 이후의 유대교를 율법 위에 확고하게 세워 놓은 에스라는 제사장이며 서기관이었다. 율법 학자들의 지위가 발전된 것은 헬라주의와의 만남과 대결에서 온 결과였다. 헬라 정신의 강력한 영향에 대하여 독자적인 교훈을 율법 속에서 찾으려는 정신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에 문답식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희랍인들에게 배웠다. 학자들은 전승을 보호하고 성서를 해석하여 적용하는데 정통하였기 때문에 현자, 율법 교사, 대가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8) 땅의 백성들
팔레스틴 유대인의 90% 이상은 ‘땅의 백성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땅의 백성들 (AM HA-ARES, 암하렛츠)’이라는 용어는 통치자들 및 귀족들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민중들을 의미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무지 혹은 무관심으로 인해 모세의 율법과 이에서 파생한 정결 규정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주로 땅의 백성들은 갈릴리에서 살았는데 순수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부도덕하고 비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서 철저히 소외된 민중들이었으며 식민 통치자와 지배 세력의 이중적 사회 구조아래 가장 고통을 당하였던 계급들이었다. 이러한 억압받는 상황은 민중들의 봉기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 땅의 백성들은 반로마운동의 기본 동력이 되었다.
 
3.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1) 헬라주의적 세계 안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기원전 2-1세기에 팔레스틴에서 치열하였던 전쟁이 빈궁과 고통을 가져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심한 고통 때문에 떠나야만 했다. 후대에 와서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외국에 남아 있었다. 헬라주의 세계에 살았던 유대 사회는 그들의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야 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살려는 주장도 있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 신앙과 생활도 변화되었다. 팔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종말적인 희망이 일어난 반면 디아스포라에서는 영혼 불멸이라는 익숙해진 헬라 사상에 접합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헬라 정신에 대하여 개방하려고 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규례에 신실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잊을 수도 없었고 잊어서도 안 되었다.
2) 70인역 성경(LXX)
헬라주의 세계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가 율법위에 확고하게 설수 있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랍어로 번역해야 했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필라델푸스 왕 톨레베우스 2세는 그의 궁중 도서관에 유대인의 율법의 희랍어 번역본이 없다는 사서 테메트리우스의 이야기르 듣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6명씩 보내어 율법을 희랍어로 번역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모인 72명의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서 작업을 시작하여 72일 만에 번역을 마쳤다. 이 번역본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고, 경건하고, 매우 정확하다고 인정되었다. 이래서 72라는 숫자에서 우수리를 떼어내고 70이라는 정수로 채우면서 희랍어 번역본의 이름이 붙여졌다.
3)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헬라주의적 회당과 마찬가지로 필로 역시 그의 사고와 행위 안에서 철학적 숙고의 도움을 얻어 유대교에 대한 합리적인 논증을 하려고 조력하였다. 필로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침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의로 보았으며 동시에 헬라 철학의 유산에 가장 깊이 빚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헬라철학의 유산과 모세의 율법을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율법서들은 필로에 의하여 비유적 해석의 도움을 얻어 훌륭한 도덕 철학으로서 설명되었다. 필로는 또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을 철학자들의 학설 속에서 발견해 냈다. 필로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초기 기독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들은 기독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의 로고스 사상을 받아들였다. 필로는 기독교 신학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성서적인 신앙을 지혜와 미덕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실현으로서 이해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서적인 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하여야 할 것인지를 필로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4) 요세푸스
팔레스틴의 유대교 출신이나 후에는 디아스포라에서 생활하였던 요세푸스는 그의 책을 통하여 헬라 주의 독자들에게 유대교를 변호하고 이스라엘의 신앙을 변증하려고 하였다. 요세푸스는 기원후 37년에 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에 일정 시간 소속되면서 차례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 정복당하고 오해를 받는 그의 민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저술 활동을 하였다. 요세푸스는 비유대인 독자들에게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일깨우려고 했으며 합리적인 생활 방식으로서 유대교를 그들에게 접근시키려고 하였다.
 
제3장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인의 생활과 신앙
 
1.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에서의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1세기 팔레스틴의 전체 인구는 150만명 내지 2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중에 50만에서 60만 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팔레스틴 남부 지역인 유대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비유대인이 많이 있었으며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렸다. 유대 지방은 땅이 건조하고 농업에 적절하지 않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J.JEREMIAS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수공업이 발전하기에는 원료가 부족했으며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기에도 그 위치가 나빴지만 수공업과 상업은 번창하였고 각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년에 세 차례에 걸친 전세계 유대인의 왕래와 관련되어 있었다. 팔레스틴 지역의 전통적인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갈릴리 지방은 땅이 비옥하였고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이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소작인이 아니면 일삯 품꾼들이었다. 헤롯 왕가의 폭압적인 통치와 로마 제국의 착취는 당시 팔레스틴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었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농지 증세액이 600달란트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헤롯 1세의 수입은 1,000 달란트를 초과했다는 것은 민중들이 이중적인 수탈을 통해서 대부분 절대적인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된다. 당시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이었으며 1 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였다. 팔레스틴은 과중한 조세 부담과 극심한 기근으로 심한 빈곤으로 고통을 겪었다. 특히 조세 징수의 무자비하고 약탈적이며 전면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가장 비옥한 지역에서도 거의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로 낮은 임금과 많은 실업의 상태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노예로 사용할 수도 있는 상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빈곤을 못 이겨 촌락을 배회하는 도적떼 집단에 참여하였으며 팔레스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 도적 떼는 A.D 60-70년대에 비로소 가시화되는 젤롯당의 배경이 되는 무리였다.
민중들은 착취로 인한 고통과 기근 때문에 반사회적으로 변해 갔으며 지배체제에 항거하면서 반로마 민족해방 혁명의 의지를 높여 나갔다. 예수 시대에 나타나는 지배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갈등과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적 통치와 수탈에 대항하는 반로마적 운동은 1세기 팔레스틴 사회 현상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사회 상황은 당연히 광범위한 대중적 용기를 유도할 수 밖에 없으며 모든 통치 영역에서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헤롯 1세의 죽음을 이은 민중 봉기와 A.D 66-70년 반로마 항쟁은 1세기 팔레스틴의 사회,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되는 사건들이다.
주권이 로마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그 밖에 전해져 오던 정치적, 법률적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은 로마 제국의 모든 식민지 안에서 시행된 로마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역시 로마 황제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주권을 계속하여 누릴 수 있었다. 고국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경제적 상황은 철저하게 검소하였다. 예루살렘 소수 상류층과 갈릴리의 대 지주들만이 부유하였다. 유대인들은 통치권의 교체가 있었어도 일상생활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다만 로마 당국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기억해 두어야 했다.
 
2. 예루살렘의 성전 의식
거룩한 도시에 있는 성전은 예수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예로부터 성전에 주어진 깊은 의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서 성전 구역에 이르면 먼저 이방인에게 개방된 바깥뜰에 들어선다 . 매일 매일의 희생 제사와 많은 축제자들의 방문이 다양한 상행위가 바깥뜰에서 벌어졌다. 이방인은 성전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를 범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예배는 남자들만이 참석하였다. 주랑 현관에는 헌금함이 놓여 있었고 성전 앞에는 번제 제단이 있었다. 그 안에는 금향단과 일곱 촛대와 제삿상이 있었다. 지성소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대순례 축제 때 수많은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던 성전은 온 유대인에게 성소가 되었다. 초기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도 또한 성전을 하나님 숭배의 성소로 여겼다. 심한 고난의 시대에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매일매일 방해되지 않고 정확하게 드려졌다. 로마인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의 되었을 동안에도 성실하게 제사를 드렸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 버림으로써 유대교는 분명한 중심점을 잃어 버렸다.
 
3. 회당
회당의 시초는 분명치 않으나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바빌론으로 잡혀가 유배 생활을 해야 하였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세웠다고 생각되었다. 회당 건물은 대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긴 장방형의 집으로 건립되었다. 회당은 각 지역에서의 유대 공동체를 유지, 보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 기도하고 성서를 낭독하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대체로 예수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그의 특징에 있어서 비슷하게 남아 있는 예배의 과정은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째 부분은 의식적인 면이 강하고 두 번째 면은 교훈적이 면이 강하다. 회당은 교육의 장소인 학교였다. 그래서 학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회당은 동시에 교육과 예배를 위한 곳이었다. 때로 회당 옆에 고유의 학당이 따로 있기도 하였다. 회당에서 율법 학자들이 율법을 연구, 석, 전수하였다.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자치단체의 일과 공동체의 생활 문제들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4. 성경, 율법, 전승
유대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성서의 범위가 분명하게 규정되어야 했다. 모세 5경은 기원전 4세기에 편집이 끝났으며 토라는 유대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으며 토라의 영광과 존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구약 성서의 나머지 책들은 토라의 다음 서열에 놓였다. 왜냐하면 토라는 인간의 협력 없이 이미 하늘에 있었으나 성서는 인간의 신적인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최고의 서열은 토라이며 모든 성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토라는 기록과 구전의 방법으로 전수되었다. 전승의 발전은 성서 해석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5. 하나님과 인간
유대교는 완성된 교의학이나 간결한 신론을 담고 있는 어떠한 신앙 고백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율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확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는 오직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체득할 수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룩 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임무가 주어졌고 인간은 종으로 주인께 몸과 마음을 바쳐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미지의 존재가 아니며 행위에 정확하게 일치하여서 보수를 청산하시므로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얻는 의로 인하여 생명의 길이 열린다고 본다.
 
6.미래적인 구원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상의 주이시요 왕이시지만 그의 주권이 아직 세상 앞에 감추어졌으며 백성들에 의해서 인식되지 못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의 희망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가 드러나게 될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유대교 내의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언제 오느냐는 물음이 제기되었고 메시야 시대가 이미 선포되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표징을 구하였다. 랍비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율법을 엄격히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미래적 구원의 도래를 재촉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고 이방인을 몰아내고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우실 지배자와 심판자로서 오실 것이라는데는 그들 모두가 일치하였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의 종말적인 대망 속에 결합되지 않은 채 서로서로 병행되어 있던 모든 명예로운 칭호들을 그들의 주님께 돌렸다. 유대교 안에 미래적인 구원에 대한 여러 사상이 등장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저 세상에 있는 사람의 신앙과 행동 율법에 대한 순종 내지는 덕스러운 삶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제 2 부 신약성경의 헬라주의적-로마적 배경
 
제 1 장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정치와 사회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을 통하여 이루어 놓았던 거의 무한대한 나라는 마케도니아 왕인 그가 젊은 나이로 죽자 곧 다시 붕괴되었다. 그렇지만 희랍어와 생활 습관은 알렉산더의 유산을 서로 분할하여 다스렸던 장군들의 지배 영토 내에서 줄어들지 않고 계속하여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1. 시이저의 지배하에 있는 로마 제국
결국 시이저(로마 최초의 황제)가 그의 정적들을 누르고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 후 독재 정치를 펴다가 갑작스레 살해당했다.(기원전 44년) 시이저 살해자 제거를 위해 동맹했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침내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불화로 인해 전쟁을 하게 되어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로마제국을 다스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 아우구스투스(1대, BC27-14)란 명칭을 덧붙였다. 이는 선의 별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현명하고 적절하게 제국을 다스렸으므로 평화의 지배자로 환영을 받았다. 기원후 14년 그가 76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2대, 14-37)가 통치를 계승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열심히 전임자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많은 의심과 엄격함으로 적을 만들었다. 그의 통치 시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세례요한 등장, 나사렛의 예수가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받았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칼리룰라(3대, 37-41)가 계승, 통치하였다. 그는 자신을 신과 동일하게 높이려 했으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입장을 세우려 했으나 많은 적으로 인해 궁중 혁명으로 그의 통치는 끝났다.(기원후41년)
뒤를 이어 클라우디우스(4대, 41-54)가 황제로 추대되어 다스렸는데 그는 양심적으로 통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통치 시 로마에서 유대인들끼리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으로 분쟁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 기원후 54년 클라우디우스는 그를 없애고 아들 네로(5대, 54-68)를 왕좌에 앉히려는 부인 아그립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
통치권은 네로에게 이어졌으며, 그의 명으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난 이유는 로마시의 대화재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이 네로라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기독교인들을 범인으로 몰아 죽이도록 했다. 결국 모반이 일어나 자살하였고 이로 인해 율리우스-클라디우스 가(家)의 통치가 끝났다.
팔레스틴의 베스파시안(9대, 69-79, 네로 이후 1년 사이에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몇 개월씩 차지하는 혼란의 때가 있었다.)이 그의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권력을 장악하였고 안정과 질서를 다시 찾았다.
기원후 79년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티투스(10대, 79-81)가 황제가 되었고 기원후 81년에 그의 뒤를 이어 동생 도미티안(11대, 81-96)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권력의 절대적임과 신성을 공공연히 나타냈다. 그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였고 로마인들은 이러한 군주를 원하지 않았다. 기원후 96년 반란이 일어나 도미티안이 죽자 플라비 황가(家)의 시대는 끝났다.
도미티안이 죽은 후 원로원은 스토아적인 지배자 네르바(12대, 96-98)를 황제로 세웠다. 그 후 트라얀(13대, 98-111), 하드리안(14대, 111-121), 안토니우스 피우스(15대,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대, 161-180)에 이르기까지 스토아 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으나 단절되었고 평화는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은 내외적으로 번영되었으며 헬라주의적-로마적 문화는 별다른 방해 없이 발전, 널리 보급되었다.
 
2.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
헤롯 1세의 통치는 헬라주의-로마적 기준에 의하면 전에 없는 영광스러운 반면에 특히 유다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억압적이었다. 헤롯의 광대한 건축 계획과 낭비는 납세자인 민중들의 고혈을 모두 짜내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통치 중 B.C 4년에 헤롯 대왕이 죽자 급기야 민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헤롯이 죽자 민중적인 폭발이 모든 통치 영역에서 일어났다. 이에 로마는 질서를 무자비하게 잡았고 민중들의 반로마적 분노는 커져 갔다.
팔레스틴은 헤롯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아켈라우스(B.C4-A.D6)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를 다스렸으며 헤롯 안티파스(B.C4-A.D 39) 는 갈릴리와 동부 요르단에 있는 베뢰아를, 그리고 필립푸스(B.C 4-A.D 34) 는 북부 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이 세 아들은 영토 분할에 대한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를 각각 다녀왔다.
매우 전제적이었고 포악한 통치를 했던 아켈라우스는 백성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억압받던 신하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그들의 고통을 간절하게 호소했고 그는 받아들여 A.D 6년 아켈라우스를 갈릴리로 추방시켰다. 아켈라우스가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는 이때부터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총독은 가이사랴에 머물렀으며 유대인의 축제일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로마는 유대사회의 종교적 공동체의 생활과 산헤드린의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올 때에는 군기를 들고 오지 않았다. 최고의 법적 권력은 총독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의 유대 공동체와 관련된 사항만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사형 선고나 집행은 할 수 없었다(요 18:31). 로마군대는 안토니아성에서 주둔하고 있었으며 대축제일이나 정치적인 봉기 시에만 증강되었다.
예수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는데(눅3:1), 그는 악명 높은 로마 총독으로 공인되었고 잔학성과 포악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A.D 20년 유대 총독으로 부임할 당시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성에 가져오게 하여 유대인들로 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훼손시키느니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고 저항하자 비로소 군기를 다시 가져가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로마제국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유대 사회의 독특성을 고려하여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다. 제일먼저 로마가 한 조치는 세제개혁이었다. 이것을 위해 주민들의 수효와 그들의 재산 상태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눅2:1-5). 2년 동안 소출의 4분의 1을 내어야 하는 세금 징수는 경제적인 빈곤을 초래했으며 하나님이 아닌 로마 황제에 대한 납세는 유대 사회에 있어서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인구 조사는 극도의 반로마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 세금 징수는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권이 박탈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인에 대한 혐오감은 커져 갔고 세리들까지도 경멸하게 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B.C 4- A.D 39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자기 형 아켈라우스보다는 사려 깊었지만 로마인에게는 노예처럼 아첨하였으며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포악한 폭군적인 통치자였다.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 근친상간을 범해했다 책망하는 세례 요한을 목 베었던 장본인이었다(마14:1-12). 예수는 이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불렀으며(눅13:32) 안티파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기적을 보고 싶어 만나고자 하였다. A.D 39년에 안티파스 역시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A.D 37-41)에게 파면되어 추방당했다.
필립푸스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했던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그가 다스리던 북부 요르단 지역에는 유대인이 소수였기 때문에 고려할 필요가 없이 초상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필립푸스는 A.D 34년 후손 없이 죽었다.
 
3.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사회적 상황
로마제국은 광범위한 국경을 무력으로 안전하게 방어하는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세계적인 국가 안에서 헬라적이고 로마적인 유산이 통일성을 가진 위대한 문화로 합성된 헬라주의적-로마 문화는 별다른 지장이 없이 발전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한 희랍이 문화적으로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헬라에서부터 그들에게 쇄도해 오는 풍부한 정신적 자산에 거리낌 없이 개방하였다. 헬라의 문화는 언어, 자녀 교육, 가정생활, 학문. 철학, 생산과 경제, 행정 등 모든 면에 적용되었다.
 
4. 황제 숭배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군주를 신의 아들로 여겨 숭배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부 제 국가들을 통과하여 승리의 행군을 하게 되자 희랍인들은 신국이라는 동양적 사상에 접하여 황제를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군주에 대한 숭배는 우선 예배적인 형태로 표현된 정치적 충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군주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분리되자 기독교인들은 회당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황제 숭배를 강요받았고 로마인과 계속 충돌하였으며 콘스탄틴 황제 밑에서 시이저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기까지 교회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다.
 
5. 팔레스틴의 사회 구조와 성전 체제
1) 사회 구조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는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속했다. F.BELO 는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점에서 1세기 팔레스틴 사회 구성체를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촌락은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특징인 농촌 공동체의 토대였으며 국가-성전은 촌락의 잉여를 수탈하는 상부 구조라는 것과 둘째로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사회의 대토지제와 상업 부분은 최소한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속한다고 간주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경제적 관계로 분석해 볼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제시된다.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이 존재 기반이었고 토대였던 촌락 구조는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노예제 사회였던 로마의 식민 통치 사회와 어떻게 접목될 수 있었는가 ? 예수시대 팔레스틴(특히 유대)은 헤롯 왕조에 의한 대리 통치 혹은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도 여전히 촌락 공동체적인 사회 구조는 붕괴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원시적인 공동체 사회가 사유 재산제의 도입에 의해 노예제 사회로 발전했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노예 대 노예소유주와의 모순 관계가 사회 발전의 주요한 역할을 했던 로마의 사회 구조가 팔레스틴에 규정적인 역할을 미쳐 고대 이스라엘 사회 구조였던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을 완전히 뒤흔들었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틴 사회는 여전히 국가-촌락의 생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팔레스틴 사회의 종교적 특수성을 중심으로 유대 공동체의 성격과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의 성격을 살펴볼 때만이 얻을 수 있다.
당시 팔레스틴 사회는 촌락과 도시에서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서 유대 사회 전반을 지배해 왔던 집단이 존재해 왔다. 하스몬 왕조 때부터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결합된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최고 원로 회의가 산헤드린이었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 총독이 지배하는 속주가 된 A.D 6년 이후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산헤드린의 정치적 힘은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유대의 모든 지역에 관철되었으며 그 이데올로기적 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미쳤다. 이 지배 계급의 연합체와도 같은 산헤드린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확보하였으며 이 성전 체제를 통해 팔레스틴 민중들이 생산한 잉여 가치를 성전세를 통해 점유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충실한 신하로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켰고 산헤드린을 통해 부를 획득했으며 전통적인 유대사회와 유대주의를 유지시켜왔다. 이리하여 여러 민족들의 자치를 허용한 로마의 식민 통치는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장해 주었고 유대 사회의 지배자들은 로마의 배려에 별다른 충돌 없이 복종했던 것이다.
둘째로 로마의 식민지적 체제에 의해서 엄격하게 유대 사회의 기구는 통제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관할했다. 갈릴리는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이 통치했으며 시리아의 지방 총독에 속해 있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 사회 내에 있는 지배 집단인 산헤드린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를 통해서 갈릴리 지방을 효과적으로 수탈해 내었고 표면적으로는 유대 사회의 종교적인 권위와 정치적인 자치 권력을 허용했으나 자기들의 이해에 어긋날 경우에는 폭압적인 통치를 해왔다. 팔레스틴 민중들은 로마의 식민 지배와 유대 사회 지배 계급들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해 이중적인 고통을 신음했고 극도의 빈곤에 휩싸였다. 이러한 로마 제국주의와 지배 계급의 이중 수탈은 지배 집단에 대한 봉기와 반로마적인 투쟁을 가져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예수 시대의 팔레스틴 사회는 로마 제국주의에 편입된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을 물질적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이 토대 위에서 유대 사회의 통치 기구인 산헤드린이 존재했었고 그 종교적, 정치적 특수한 구조는 로마 식민 통치에 예속되어 있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통치와 유대 지배 계급의 통치라는 이중적인 사회 구조의 효과적인 결합은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이라는 토대 위에 로마의 식민 통치가 훌륭하게 접목될 수 있었으며 유대 사회의 촌락 공동체가 노예제 사회로 급변하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성전 체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이라는 토대에 기초하여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지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해온 지배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노예제적 생산 양식에 기초하여 전 세계적인 지배를 확대해 나가던 로마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 정책의 결합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바로 이 성전이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유대인의 군주인 헤롯 왕가나 로마 총독의 신중한 통치를 통해 다스려 나갔으며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사회의 정치와 문화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유대의 성전 체제는 로마와의 야합을 통해 그 존재의 기반을 다졌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 총독에 의해서 대사제직이 임명되었으며 대사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사제복은 총독이 보관하였고 필요할 때마다 총독의 허락하에 꺼내 쓸 수 있었다. 성전은 팔레스틴을 점령한 로마 제국주의 세력과 그 동맹 세력의 충실한 시녀가 되었다. 심지어 매일 두 번씩 드리는 희생제 때마다 카이사르를 위한 한 쌍의 짐승을 바쳤던 것이 그 예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전 체제는 팔레스틴 민중들의 잉여 가치를 성전세 명목으로 수탈해 내어 부를 축적해왔던 착취 구조였다. 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유대 사회의 하나의 구심점이었으며 돈이 집중되는 은행의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성전의 수입원인 성전세는 팔레스틴 사회내의 유대인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로부터 쇄도하여 엄청난 부를 제공했으며 그로 인해 지배 계급은 부를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1년에 세 차례에 있는 대축제일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전세계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돈을 유대 화폐인 세겔 단위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성전에 있는 환전상들은 환전시에 얼마간의 프리미엄을 붙였다고 한다. 이 돈들은 성전 환전상과 지배 계급들에게 분배되어졌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들은 제의용 가축들을 구입해야 했으며 제2의 십일조 규정을 지키기 위해 토지소산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제2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했다. 요세푸스의 보도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당시에 예루살렘 특히 성전에 얼마나 금이 많았던지 함락 이후에 시리아의 모든 지방의 금의 가치는 이전의 절반으로 평가절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세계 유대인들의 방문과 성전세의 징수로 인해 엄청난 재화가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축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지배 계급은 성전에 축적되는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로마의 식민 통치에 굴복하였으며 성전 체제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켜 나갔던 것이다.
 
제2장 신약성경 시대의 헬라주의적-로마적 세계 안에서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조류
 
1. 희랍과 로마의 신들
희랍인들이 숭배하던 신들은 자연 속에서 역사 하는 힘과 능력을 형체화한 것들이었다.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비슷했으며 사람이 사는 사회와 도시들은 각기 그들의 특별한 신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신들은 운명의 주인이지만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단지 죽지 않는다는 점과 커다란 힘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인간과 구별된다. 예배는 국가의 업무였기 때문에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월력의 정확한 순서에 따라서 시행되었으며 공직자들은 이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민속 신앙과 운명 사상
인간의 생활 과정과 운명은 지상적인 힘들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별을 관찰하였는데 그것은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명이 별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을 지배했던 세계주의적인 포용성은 사람들이 어떤 신들을 부르든지 어떤 종교를 따르려고 하든지 그것들을 그들의 재량에 맡겨 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를 위해서 만족해야만 하였던 자유로운 영역이 주어졌다. 미신적인 생각과 결합되었던 다소 분명하게 형성된 운명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운명이 주어지기를 바랐으며 자기와 자기에게 예속되니 사람에게 선한 것이 오리라는 전조를 얻으려 애썼으며 행복을 상징하는 튜게(운명의여신)의 형상을 매우 사랑하였다.
 
3. 密儀 종교들
인간이 어떻게 음울한 운명으로부터 방어하고 자유롭게 되는지에 부분적으로나마 해답을 준 것이 밀의 종교였다. 이러한 밀교들은 인간에게 고통, 죽음에 대항하는 치유의 능력을 주어서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였다. 여기서 비밀이라는 말은 특별한 예배 행위를 위하여 모여든 종교적 모임이 그들의 종교의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 그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엄격히 침묵을 지킨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들의 비밀스런 계율은 지극히 지킨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들의 비밀스런 계율은 지극히 적은 부분만 전승되었다.
 
4. 통속 철학
헬라주의 시대에 에피큐르는 향학이라는 것을 인간이 참된 지혜를 얻어 모든 생활 속에서 옳은 것을 찾아 행할 수 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인 건전함의 상태로 이해되었다. 에피큐르는 신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았으나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신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에피큐르 철학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세상에서의 향락적 쾌락을 추구하였다. 퀴니크의 철학자들은 에피큐르 철학자와 달리 삶의 쾌락을 경멸하였다. 스토아 철학자들 역시 쾌락 추구의 삶을 거부하였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인생의 과제를 배워 알게 하는 스토아 윤리의 실제적 방향은 퀴니크 학파의 이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스토아 사상은 헬라주의적 유대교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이외에도 고대 후기의 정신적 생활에 영향을 끼친 다를 철학 학파에 피타고라스 철학파와 플라톤의 세계관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금욕적인 생활을 견지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플라톤의 세계관 중 신론은 유대인에게 성서 텍스트로 채택되었다.
 
제 3 장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cism)
 
1. 영지주의의 근본적인 구조
영지주의의 근본 구조를 가능한 한 적절하게 표현하려고 한다면 도대체 영지주의는 그들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무엇이 되려고 하였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영지’라는 말은 ‘인식’을 의미한다. 지식은 인간에게 신 인식을 전달해 주는 계시를 통하여 주어진다. 인간은 인식의 대상 즉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감동되면서 이러한 인식을 체험하게 된다. 영혼은 황홀한 지경에서 그를 인식한다.
이 세상의 내적 관계는 세상의 기원이 밝혀질 때에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영지주의는 세목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으나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는 특징들을 보여주는 우주 개벽설의 묘사로서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말한다. 창조는 순수한 빛의 세계 가운데 있는 신의 영역으로부터 한 부분이 하층 세계로 떨어져서 물질과 결합함으로써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상이 하강을 통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신의 본래적인 작품이 아니라 지금은 적대적인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신의 소외된 작품이다.
인간관 역시 창조의 이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태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신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속으로 던져졌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현재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구원론 속에서 구원에 대한 물음이 답변되고 있다. 세상 위 먼 곳에서 통치하고 계신 신과 인간의 영혼 속에서 쉬고 있는 신적 본체는 자연적인 근사성을 근거로 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영혼은 그가 본래 내려왔던 상계로 다시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 속에 숨겨진 신적인 핵심이 자유롭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의 본래적인 임무를 다시 받게 됨으로써 근원적으로 복귀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영지주의와의 싸움은 교회가 영지주의 이론에 대항하도록 창조론과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을 좀 더 명백하게 표명하도록 교회에 도전하였다.
 
2. 전 그리스도적 영지주의의 증거로서의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영지주의 사상은 18개의 논문을 모아 만든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이라는 책 안에 총괄되어 있다. 첫 번째 논문은 거친 표현으로 영지주의 학설의 우주론, 인간론, 구원론을 총괄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상의 기원, 인간의 창조 및 인간을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구원 등을 표현하기 위하여 짜 맞추어진 많은 신화론적인 전승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열세 번째 논문이 무엇보다도 주목을 끄는데 이 논문에서는 성례전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의 인식만을 생각하고 있다.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의 문헌들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내용을 보다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인식은 정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도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신의 계시로 말미암아 체험된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그의 본질에 따르면 철학적인 명상으로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신적인 불꽃과 결합되어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신적 능력으로 가득 찬 인간 전체의 변화로서 일어나는 인식이다 .
 
3. 기원후 1세기의 영지주의 전파
기독교 복음을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영지주의와의 만남 가운데서 결정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인간의 삶과 구원의 의미에 관한 공개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복음이 명백하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영지주의의 유창한 말과 개념들을 빌어서 인간에게 설교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의 말과 개념들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기독교의 선포가 내용적으로 변화되었거나 변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우리가 복음의 진리와 독자성을 해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희랍인들에게는 희랍인이 될 수 있는지 개별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오린, 그리고 가끔 애써서 숙고한 후에야 비로소 결정될 수 있었다. 고대 교회에게 영지주의가 던진 도전으로 말미암아 - 유대인이건 희랍인이건 - 모든 인간에게 빚지고 있는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을 하기 위하여 교회는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결 론
 
유대인들과 희랍인들에게 전해진 십자가의 복음만이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선포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언제나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언제나 사람보다 강하게 때문이다(고전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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