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 한국교회사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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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3-21 16:34
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
◉ 서론
1.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시대
1) 당(唐)을 통하여
AD431(로마, 에베소) - 기독교 세계대회, 주제는 ‘그리스도의 인품논쟁(신성, 인성)
*이단으로 정죄 받고 쫓겨난 Nestorius 패가 동방선교를 시작함.
(1)Nestorius 파
(2)페르시아 에뎃사 시로 도피하여 신학교를 건립하고 동방선교를 시작
(3)선교사들이 당으로 진출 - 명칭을 ‘경교(景敎, 광명의 종교)라고 함.(당 태종도 신도가 됨)
(4)통일 신라시대 -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당에서 경고를 접촉
①1625년 중국 서안국 근처에서 ‘대진경교 유행 중국비’가 발견됨.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선교 경과와 중국 내의 선교 상황이 736자 정도로 설명되어 있음. 1917년 금간산 장안사에서 ‘대진 경교 유해 중국비’와 똑 같은 모조품이 발견됨.
②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묘한 형태의 돌 십자가가 발견됨. 현재 숭전대 박물관에 보관 중
③747년 신라인으로서 당군을 지휘한 ‘고신지’가 페르시아와 접촉을 가졌고, 당군을 지휘한 점으로 보아 경교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5)마테로리치가 1595년 처음 명나라에 왔을 때 기독교 흔적을 찾음. 당나라 때에 경교가 성행했음을 기록한 책을 발견. 이 책은 한국인의 것
2) 몽고를 통하여
(1)징기스칸의 몽고 건립후 ‘모슬렘교’나라를 침공 종교의 자유화를 보장
(2)교황 인노센트 4세가 카르피니 신부를 파송 징기스칸을 개종시키라고 함(몇 차례 파송했으며, 후에 ‘루브루크’를 파송함).
(3)루브루크는 1253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몽고의 수도 화림(和林)에 도착하여 유럽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바투’의 아들 ‘사루탁’을 만남(사루탁이 크리스천인줄 알고) 그러나 왕궁의 노예들 중 다수가 크리스천이었다. 결국 징기스칸의 개종에 실패함.
(4)몽고가 동진을 침공하면서 고려에 군비를 요구함(고려에서는 교황청에 편지를 보냄. 그 내용 중에 Caulei(고려)라는 명칭이 사용됨(Caulei Coree Korea)
3) 일본을 통하여
(1)1517년 종교개혁이래 스페인, 포르투칼 사람을 중심으로 반 protestant 운동이 전개됨. - 주관자는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
중심인물 - 익나투스 로욜라(I. Loyola),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내용 - 반대운동을 위해 극동지역 선교를 시작(protestant보다 멀리).
(2)자비에르가 인도하여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에 상륙하여 서양문물 중 ‘활공총’을 판매함. 총과 선교가 동시에 파급됨(총이 1592년 임진왜란에서 사용됨.).
(3)1592년 5월 조선침략에 일본군 1군단이 ‘小西行長’장군을 필두로 예수회로 구성된 군단이 들어옴. 이때 종군신부 ‘세스페데스’가 ‘不干’이라는 일본인 신도를 대동하고 조선에 들어옴(한국의 최초 성직자) - 선교는 되지 않음.
(4)한국원정으로 많은 노예를 잡아서 포루투칼 상인을 통해 매매하는 것을 본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들을 탈출시켜 복음을 전함(일본에서).
(5)‘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박해 - 순교자 21명, 박해자 25명
※교황 비오 2세가 순교복자로 205명을 선정(이 중 한국인은 9명)
◉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한 역사의 과정
동방의 작은 나라인 한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뜻 가운데 진행되었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의 틈바귀에서 쇄국정책을 통해 외국과는 관계를 거부하였으나,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힘에 의한 강압적인 자세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마침내 은둔의 나라인 한반도는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고 강대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는 결국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는 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어 복음의 주자들인 선교사들이 속속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우리보다 복음을 먼저 전해준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한반도에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고, 조선의 관리들이나 상인 등이 중국과 일본을 출입하면서 복음을 전해 듣게 되어 이들을 통한 복음의 전래도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의 이러한 주변 여건은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즉 선교를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또 국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불신, 부패 등으로 불안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피폐해져 있어 삶 자체가 희망이 없는 암담한 가운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혹세무민의 미신행위가 모든 사람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마치 예수님의 초림 직전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과도 같았다. 그 당시에는 선지자의 활동이 단절된 암흑기였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압제자들에 불과하였다. 그때 이스라엘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메시아를 대망하였듯이 우리나라의 그 당시 백성들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기대하는 암흑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우리의 역사상 가장 암흑기인 그 시대에 복음을 이 땅에 비추어 주셨던 것이다.
1. 한.미 조약의 체결로 인한 복음화의 여명기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벗기게 된 계기는 1875년(고종1년)일본의 군함 운양호 사건이었다. 일본과의 조약은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조약을 뒤따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미국도 조선과 관계를 맺게 된다.
미국과의 통상 조약은 1876년 한일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활동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어 청나라가 조선 정부로 하여금 미국과 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제의 세력을 견제케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청나라의 원세계가 조선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 해안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우리측 대표 김홍집과 미국측 대표 슈펠트 간에 역사적인 한, 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오래 동안 피로 맺어진 혈맹의 유대 관계가 시작되게 되었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선교도 이것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올 시점에 한미조약이 체결된 것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미조약은 오래 동안 조선이 중국의 부속국가로 중요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국의 재가를 얻어야만 하는 불명예를 씻어 버리고, 세계만방에 독립된 국가로서 나서게 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자,1883년 5월에 우리나라에 와서 비준서를 교환하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서 서울에서 그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장부도 이에 대한 답례 사절단을 파송하게 되었는데, 민영익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대리공사에 홍영식을 그리고 수행원에 서광범, 유길준 등을 임명하여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3년 7월 미국의 해군함정을 이용하여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저들은 기차 편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워싱턴에 도착하여, 미국대통령을 접견하고 12월에 귀국하였다.
2. 한국선교의 정지 작업을 한 가우쳐 박사와 맥클레이
미국에 간 사절된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워싱턴을 향해 갈 때 한국 선교 역사상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대학교의 설립자이며, 감리교회의 목사인 가우쳐 박사였다. 3일 동안같이 여행하면서 그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183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편지를 써 보내어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선교자금 2천 달러를 같이 송금하였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는 아직 한국에 선교를 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우쳐는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대표 맥클레인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내면서 “한국에 찾아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 후 선교사업에 착수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맥크레이는 곧 한국을 1884년 6월에 2주간 예정으로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다행히도 그는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때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김옥균을 찾아갔다. 그는 김옥균이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전달하여, 국왕의 허가를 부탁하였다. 며칠 후 김옥균은 맥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께서 지난밤에 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시고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이러한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이 회답을 받은 맥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하나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일본에 돌아온 후 즉시 그는 "우선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다는 것을 감추어 두지 아니하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은 시급한 요구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미국 북감리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첫발을 딛게 하여,1884년 말에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 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선교의 과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미조약이 맺어졌고 민영익이 가우쳐 박사를 기차간에서 만났으며, 맥클레이가 한국에 와서 국왕에게 편지를 올려 윤허를 받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3.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 역시 한국의 선교사업에 대한 작업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그 해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으로 잡는 해가 되었다. 개신교의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다. 그는 1883년 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 의료선교사로 지원서를 보냈고, 이것이 허락되어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선교지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그의 친구 의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에 알렌은 곧 뉴욕의 선교본부에 한국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공관들과 세관에서는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므로 본부가 허락한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4천년의 한국역사에 처음으로 개신교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하게 되어 마침내 개신교 선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미국 공사 푸트 씨를 만났고, 바로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공개적인 선교활동은 금해져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길이기도 하였다. 푸트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했을 때도 푸트는 그를 공사관의 의사로 소개하였다.
알렌의 이와 같은 입국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한국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이후로 일어나는 한국의 정변은 마침내 왕궁의 복음화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4.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을 통한 의료선교의 시작.
당시 조선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누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수구파의 거세를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시행할 우정국 건물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하는 피로연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때를 기해 개화파들이 수구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개화파들로 새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 개방정치를 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12월 4일 저녁 피로연이 진행되는데 "불이야"하는 신호와 함께 잠복했던 자객들이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민비의 동생)이 전신에 칼을 맞고 혈관이 끊기는 생명이 위급해지는 상황에 처했을 때 미국공사 푸트와 세관고문 묄렌도프가 민영익을 응급 처치하고 함께 그를 묄렌도프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즉시 알렌에게 통지하여 급히 오도록 조치하였다.
알렌이 통지를 받고 오는 동안 벌써 어의를 포함한 한의사들 여러 명이 모여 치료를 해보려고 했으나, 끊겨진 몸을 한방의 의술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도착한 알렌은 환자의 위급함을 알고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자기가 이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자기에게 돌아올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치료는 극적인 효력을 나타내, 민영익은 얼마 되지 않아 완치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은 후에 알렌에게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사건은 알렌으로 하여금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왕실과 고위관리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알렌은 곧 고종의 시의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민영익을 구해준 대가로 국왕으로부터 참판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부터 막대한 상금을 받게 되어 그는 그 돈으로 병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조정에 이에 대한 편지를 써서 제출하였다. 왕이나 관리들은 알렌의 뛰어난 의술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알렌의 청원을 순순히 받아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1885년 4월 14일에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개원한지 열흘쯤 지나 이름을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언더우드가 입국하게 되어 그 병원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직 외국인들이 선교 활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는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 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은 한국선교를 확산시키는 근거지가 되었고, 한국의 복음화가 의료봉사와 교육을 통한 선교의 모델이 되었으며, 한국의 복음화뿐만 아니라, 근대화와 문명화를 이루게 하는 산실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 가톨릭의 전래와 박해
1) 선교의 배경
(1)병자호란과의 관계
①1635년 청나라가 한국에 침입- 소현세자와 한국 대신들이 볼모로 잡혀감 -청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정함.
②북경의 예수회 신부인 Adam Schall과 친교를 맺음(소현세자). - 소현세자는 예수회의 교육을 받음.
③하멜(표류자)에 의해 서양문물 접촉
(2)서양 문명의 접촉
중국 최초의 선교사 ‘마태로리치’는 한국의 사절로 파송 - 서양문물(자명종 등), 천주실의(책)도 가져옴.
(3)한국 학자들의 관심
허균이 서교(西敎)에 관심을 가지고 배움. - 홍유한은 복음을 받아들여 안식일을 지키며 금욕적 생활을 함(白山 기슭에서)
2) 전래
(1) 임진왜란 때 포루투갈 신부가 종군 신부로서 일본군과 함께 입국하였다.
(2) 1594년12월 28일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교직자인 포르투갈 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입국하여 일본의 고메즈(Luis Gonez O.F.M) 교구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3) 실학의 발달로 마태오 릿치의 천주실의(De Deo Ver Doctrina )등이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들어옴.
(4) 1783년 이 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옴(정치적으로 남인이었던 사람들로 북경에 사람을 보낼 때 이승훈을 동행시킴. 예수회 선교사에게 복음을 배우고 공개적인 세례를 받고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음. 1784년을 한국교회사-가톨릭사-첫페이지로 기록되었고, 이승훈이 한국선교를 시작하여 5년 후에는 5000명의 신도가 생겼다. 1785년 서울 진고개의 김범우 집에 모여 교리를 배우며 주일을 지킴. 교회당을 건립 후 북경에 신부 파송을 요청함 - 김범우 집의 자리에 대성당이 건축됨).
(5) 1794년 12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전도하다가 순교함.
(6) 프랑스인 신부들이 계속 입국하여 전도하였다.
3) 박해의 시작
(1)박해의 배후 사상은 유학과 쇄국정책.
(2)신해교난(1791년)
①정조, 신해년에 일어난 사건
②진산의 권상연과 윤지충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제사를 폐하고 조산의 신주를 불사름 참형 됨
③배후에는 정치문제와도 연관됨 - 당시 정치, 종교에 관해서는 특권층(양반계층)만 행할 수 있었다. 결국 사류(士類)에서 신봉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④호남의 선비들 중 신서파(信西派)와 정서파(政西波)로 나뉨. 정조 17년에 신서파 소속의 ‘채제공’이 영의정이 됨. - 반대파인 정서파에서 신앙의 문제까지 들먹여 시비를 걸었다(1794년 비밀리에 주문모 신부-청나라 신부-를 초청한 일이 발각됨)
⑤이승훈이 예산으로 귀향 보냄.
(3) 신유교난(1801년) / 3,000명 순교.
①순조 원년, 신유년 - 정순 왕후가 섭정함(순조는 당시 11세) - 사학 금지령(무자비한 박해와 살상을 자행하고 사찰제도인 五家作統法(감사제도)까지 실시함
②이가환, 권철신 등이 체포되어 옥사함, 이승훈, 최필공은 참수 당함, 정약용은 유배, 주문모는 참형 당함.
(4) 황사영 백서 사건(1801년)
①개요
경상도 창원 출신(황사영) - 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으로 피신하여 친구인 ‘황필’과 한국교회를 구하자는 생각으로 의논하여 북경 주재 주교에게 한국의 박해 상황을 보고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함
길이 62cm 폭 38cm의 비단 천에 13000여 자를 기록. - 9월에 황사영 체포되어 백서의 내용이 밝혀짐
박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고 결국 西敎는 매국종교라고 매도됨.
②백서의 내용
한국교회의 박해 사실 등의 상황 설명
정치계의 암류와 박해의 원인은 당파이며, 경제적인 원조를 요청.
중국인 교우 중에 국경에 점포를 개설하여 첩보 교류함. 청국 황제를 통해 서교 박해 금지를 명해줄 것과 청나라의 종녀(宗女)를 국왕에게 시집 보내줄 것. 서구의 기독교국을 통하여 선박과 정병 5-6만 명과 무기를 싣고 우리나라를 쳐서 서교를 승인하도록 하라.
우리나라 망해도 성교(聖敎)는 남아 있어야 한다.
③결과
1801년 11월 황사영은 대역모반죄로 27세의 나이로 참수 당함 / 300명 이상의 순교자
정치적으로 엄격한 쇄국정책을 폄-북경 왕래를 제외한 모든 외교관계는 통제됨.
백서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음.
(5) 기해교난(1839년) / 200명 순교.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상이 북경을 왕래하며 한국의 딱한 사정을 호소 교황 LeoⅫ에게 알려짐 - 선교성 장관 ‘카펠랄리’가 한국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짐
LeoⅫ세의 죽음 카펠랄 리가 교황이 됨 - Gregory 16
한국교구를 독립시킴 - ‘브루기에’ 신부를 초대 주교로 임명
입국도 못하고 죽음
‘모방’(Moubant, 프랑스 선교사)이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통하여 입국
‘앙베루’(Imbert), ‘샤스땅’(Chastan)이 잠입 - 신도수가 9,000명에 이름
1839년 헌종 5년, 우의정이었던 이지연이 사학을 박멸할 것을 주장. - 신도 30명, 앙베루외 2명의 선교사가 한강변 세나루터에서 참수 당함.
4) 근대 한국의 타국 접촉과 제 교난
(1) 김대건의 순교
1845년 9월 Ferreol주교가 김대건 신부(최초의 한국 신부)와 함께 서울로 잠입. 김대건 신부가 외국 선교사 안내를 책임짐 - 수로로 답사 떠남
연평도에서 군교에 잡혀 서울로 압송됨
개종을 종용
프랑스 함선 세척이 충청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기해년의 프랑스 신부 3명의 순교를 따지고 다음 해에 올 것을 알리고 떠남.
9월 15일. 헌종이 김대건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함 - 새남터에서 한국 최초의 성직자로 순교 당함.
(2) 병인교난과 프랑스
①안으로는 동학난 밖으로는 제정 러시아의 침공, 조정과 프랑스의 교류를 교섭 - 프랑스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베루네 주교가 정치문제라고 꺼려하여 만족한 답을 주지 않음.
②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의 심경 변화(당시 청나라의 서학 반대운동)를 일으켜 서학 반대운동에 동참함.
③남종삼 교도 일행이 순교 당함
④베루네 주교외 3명, 그 외 선교사들도 새남터에서 순교 당함
(3년여 간에 8,000 여명이 순교 당함)
⑤프랑스 신부 ‘리델’이 한국 교도 11명과 중국으로 피난 중 프랑스 군함을 만남(Roze제독)
⑥군함이 강화도에 만행을 자행함.
⑦대원군은 어린아이 교도까지 죽임.
⑧비오Ⅱ - 한국 교도를 위해 교서를 내리고 한국 교도의 아픔을 위로함
(3) 신미 교난과 미국
①1866년 7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인 상선 General Sherman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무장한 채 10여 일을 버티다가 충돌을 일으켜 배는 불타고 선원들을 피살됨.
②이 배에 토마스 선교사가 통역자로 왔다가 순교 당함.
(토마스 선교사 - 미국의 초교파 선교센타(London Missionary Society, 1975)에서 파송됨)
③미국 극동함대 사령관 Rodgers소장이 군함 4척을 이끌고 영종도 -강화해협- 왕성진까지 진출
2. 한국 Protestant 교회의 전래
1) 역사적인 배경
(1)역사적으로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민족의식을 계승해 온 민족이 한민족이다. 근대에서 동학과 유림들의 보수적인 쇄국정책에 합하여 근대화의 조류에 역행하였고, 가톨릭의 반민족적인 실수 때문에 영향을 미침.
(2)한국 역사를 통해 볼 때 선사상, 불교,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 되었고 그 형식과 명분만을 되풀이 하던 근대는 선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진공기라 볼 수 있다.
(3)맥캔지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한국을 여행 후 ‘한국인은 종교가 없는 민족인 것 같다. 저급한 신령숭배의 한 형태인 Shamanism밖에 없다.’고 말했다.
(4)일본의 수신사로 파송된 박영효는 1885년 3월 일본 요꼬하마에서 한국으로 오려든 스크랜톤(Scranton)목사를 만나서 “우리 백성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과 기독교이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기운이 진했다. 이 백성이 기독교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길은 지금 환하게 열려 있다.”고 했다.
2) Protestant와의 접촉
(1)1627년 화란 상인 ‘하멜’일행의 제주도 표류(36명), 이들은 화란계 장로교인 임. 이들 중 박연은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음. 하멜 일행은 위험할 때마다 기도함.
(2)1813년 화란계 목사인 R.Morrison이 중국어 성경을 보급하기에 힘씀. 이승렬(현감)은 군산만에 내한한 영국 군함의 함장인 ‘빠실 홀’과 ‘막스 웰’에게서 성서를 선물로 받음
1832년 7월. 독일인 Karl C. Gutzlaff 목사는 화란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주제 모리슨이 준 한문성경을 가지고 군산 만에서 2개월간 성경을 배포함.
1832년 7월 17일. 충청도 홍천에 상륙. 그곳 주민들과 한문 성경을 통하여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변역 - 40일간 체류함.(돌아가면서 남긴 글 “한국에 뿌린 하나님의 진리가 결코 실패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때에 감자 재배법을 가르침.
순조 왕에게 성경을 보내면서 선교함.
3) Thomas 목사의 순교
1866년 병인교난으로 대원군의 심경 변화를 일으켜 천주교인들을 학살하던 때.
1863넌 12월 중국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 목사는 1865년 9월 4-13일에 서해안을 거쳐 갔고, 백령도에서 2개월간 체류하면서 우리말을 배우며 한문성경을 전함. 그가 북경에 있을 때 병인교난의 박해 상황을 듣고 모험심이 강한 그는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한국으로 출항하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에 통역관의 자격으로 승선함(영국 2인, 미국 3인, 말레이시아, 중국 13인) -대동강 쑥섬에 이르렀을 때 분규가 일어남. 토마스 목사는 강 언덕까지 끌려 올라가 한문성경을 병사에게 건네주고 순교 당함(1866년 9월 2일)
4) 한국선교의 기반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
1876년 외국에서 한국인 첫 세례 받음 /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John Ross, John McIntyre 번역판 냄(Ross판)
북미 장로교 파송, 중국 선교사로 있었던 Horace N. Allen 선교사가 1884년 9월에 서울에 옴(한국에 온 첫 공식 선교사)
우정국 사건(1884년 12월 4일) - 개화세력의 칼에 맞은 사대세력 민영익이 칼에 맞은 상처를 Allen에게 치료 받음.
왕실부 시의관이 됨.
광혜원 설립(민영익의 도움으로 선교의 요지가 됨)
1882년 6월. 민영익이 한국의 전권위원을 미국 행. 열차에서 John F. Gauches 대학장(발티모어)을 면담 -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함.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파송하게 됨.
1885년 4월 5일 - 장로교회 선교사 H. G. UnderWood목사(광혜원에서 한국어를 배워 선교함)
스크렌톤 의사는 광혜원에서 일하다가 독자적 병원 개설함.
1885년 7월 15일 - 최초 세례 베품
1887년 1월 - 메리 스크렌톤(스크렌톤의 어머니) - 이화학당 설립(한국 최초 여성 교육기관)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 설립함.
5) 한국교회의 초창기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에 의해서 선교의 뒷받침을 받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국인의 손에서 발전된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1)이수정(李樹廷)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파송된 박영효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송됨(외국 문물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짐)
그는 당시 일본 농학계에 석학이었던 쯔다 박사와 친교를 가짐. 쯔다 박사는 기독교인이었으며, 박사의 집에 산상보훈의 족자가 걸려 있었다. - 이수정이 관심을 보임
야스가와 목사에게 신앙고백
1883년 4월 23일(주일)에 동경 로월정(露月町)교회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 받음.
일본 성서공회 목사인 루이스 목사의 간청으로 성서번역 사업을 착수 - 1883년에 마가복음 번역
녹스(장로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의 풍습, 지리, 관습 등의 논문을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라는 잡지에 게제됨. - 선교사 파송을 건의함
(2) 서상륜
영국 성서공회 연례보고서 - 1880년 만주 목단에 주둔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John McIntyre, John Ross가 한국인과 함께 성서 번역을 했다는 기록 있음 - 이 중 한 명이 서상륜(번역, 목판조각, 인쇄까지 담당함)
1882년 가을에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간행함.
1883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을 간행함.
1887년 “예수 셩교 젼셔”(Ross역) - 3,000부 발행
이 성경을 만주, 서울까지 반포. 황해도 장연에 있는 소래에 가족과 정착하여 복음을 전파함
1883년 5월 16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에 소래교회(서상륜 설립)가 설립됨.(1883년 10월 20일에 안악군 서하면 상촌리에서 장석훈, 장석규, 장석구 3형제와 그의 4촌 형제 장석두, 장석영, 장석우 등이 합심하여 두 번째 교회인 대동교회를 설립, 1884년에는 장연군 낙도면 산천리에 낙도교회와 재령읍 동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안악군에는 1884년 3월 1일에 안악군 용문면 상무리에 무동교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3월 5일에는 안악군 은홍면 덕산리 덕산교회,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안악군 대원면 당전리에 당곡교회가 각각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은율군 은율읍교회가 남천리에 설립되었다.
(소래교회는 소래 사람들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건립했으며 그후 58세대 중 50세대의 성인을 포섭함. 언드우드 목사에 의하여 세례를 받음 / 한국 기독교의 자립성을 보여준 모범이 됨)
(3)성서와 성례
한국 Protestant의 시작은 성서와 성례의 사업으로 시작됨
구쯔라프, 토마스 - 성서 반포(이는 선교의 과정이 가톨릭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의미)
1884년 겨울. -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가 만주의 동북부에서 75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게 된 것도 이미 매서인을 통하여 성서 전파 사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1886년 7월 11일 - 선교사들끼리 비밀리에 한국에서 성례를 거행.
1887년 7월 - 새문안교회 설립
1887년 10월 - 정동감리교회 설립
1889년 4월 27일 - 최초로 신의주 건너편 중국 땅에서 한국인이 성례식에 참여함
1890년 네비우스가 입국하여 네비우스 전도방법이 실시됨(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1894년 1월 8일 - 평양에서 정식으로 한국인이 성례에 참여함(선교사가 들어온 지 10년 후)
3. 외국 선교사의 선교정책
1) 선교의 방법
(1) 개인전도를 중심으로 한다.
(2) 교회 자체를 중요시한다.
(3)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 선교를 한다.
(4) 교회의 자급자족.
(5) 기독교 윤리를 철저히 교육시킨다.
(6) 의료 선교.
(7) 사경회를 자주 연다.
(8) 여자 전도에 주력한다.
(9) 문서(한글) 전도.
(10) 기도에 힘쓰는 생활을 한다.
2) 존 네비우스(John Nevius) 선교방법
(1) 발단
➀ 1890년 6월경 중국 산동성 주재 네비우스(John L. Nevius) 선교사를 초청하여 선교 방법을 듣고 한국 교회 선교의 기본 원칙을 정하였다. 왜냐하면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 뛰어난 잠재력은 있었지만 모두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일이 25세, 언더우드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 알렌 의사가 27세 그리고 그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던 스크랜턴 선교사도 29세에 불과했다. 그래서 패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선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녀지와 같은 이 한반도에서 선교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와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한 도전을 준 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1854년 이래 30년 이상 선교 사업에 종사했던 네비우스 목사 부처를 초빙하여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 선교사들이 앞으로 명심하고 실천할 선교방법의 원칙을 제공받았다.
➁ 1891년에, 네비우스의 원리를 선교 현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일련의‘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을 채택했다.
한국에 새로 파송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 시험과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습득은 적어도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고, 따라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2) 방법
①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여 전도한다.
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자전(Self-Propagation):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휘묻이 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④ 자치(Self-Government):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⑤ 자립(Self-Support):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되 교회 건축 양식은 토착적으로 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받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 신앙양육 프로그램
⑦ 성경적 권징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한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3) 결과 (자립 전도, 자치, 자급)
➀ 한국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됨 ➁ 성경 중심의 교회 ➂ 기도하는 교회 ➃ 전도하는 교회 ➄ 교육하는 교회
이 네비우스 방법은 단순히 네비우스의 선교 경험에서 우러나온 선교 정책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선교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네비우스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선교이론을 발전시켰고 적용하였다.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었고,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교회가 세워진 후,「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했다. 그리고「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고 했다.
사도들은‘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행 4:2)고 전했으며, 그「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행 4:4)고 하였다.
사도들은「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행 6:4)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집사들을 세우게 되었고, 업무를 분담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져서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는 환난을 당했다. 이때 핍박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헬라인(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였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고, 바나바는 사울(바울)을 데리고 와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으며,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저들을 후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처음 교회들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따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고, 집사를 세워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 나갔으며, 지도자(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원리는 선교지의 신생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독립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적인 방법을 통해 제시해 주었으며, 이 원리를 채택하여 한국교회에 적용한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및 다른 장로교 선교부는 이 원리를 택하지 않은 다른 선교부보다 더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
4. 민족적 자각과 신자의 증가
1) 한국 장로교 조직 연혁
(1) 선교사회 조직
➀ 1885년 북장로교 선교사 5명이 북장로교 선교사회 설립.
➁ 1889년 호주 선교사(데이비스 목사)와 합동하여 연합공의회 설립(이듬해 데이비스 목사의 사망으로 자연히 폐지)
➂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1893년 남장로교 설립(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미션회)
➃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호주 선교사의 내한으로 계속 합류.
◉ 이때까지는 거의 친목단체 정도의 역할만 함
(2)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설립
➀ 1901년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가 참석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조직(장로 3인, 조사(권사) 6인, 선교사 25인)
➁ 평양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설립, 한국 자유 장로회 설립을 위한 위원 선출을 결의함.
(3) 독노회
➀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민국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조직(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4개국 선교부-미국의 남,북장로교, 카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는 각기 한국 교회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이로써 1905년 9월에 회집된 공의회는 1907년에 노회를 조직할 것과 평양 신학교 제 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할 것을 결의하고 목사 임직을 위한 절차를 마련한다. 제 1회 독노회 참석자는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으로 도합 78명이다.)
➁ 신학 졸업생 7명에게 첫 목사 안수 /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➂ 최초의 선교사 파송 /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
◉ 창립노회의 중요결의 사항
1.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전국 교회는 감사한 마음으로 선교 헌금을 하기로 하였으며,
2. 새로 징립된 목사들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으로써,
1) 한석진은 평양, 장전 등지의 전도 목사로,
2) 송린서는 증산 한천 지방의 전도 목사로,
3) 양전백은 선천, 정주, 박천 지방의 전도 목사로,
4) 서경조는 장연, 옹진 등지의 전도 목사로, 파송하였으며,
3. 길선주는 평양의 장대재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4. 경기충청, 평북, 평남, 경상, 함경, 전라, 황해 등 7 대리회를 조직하였고,
5. 남, 북 미 장로교와 카나다, 후주 장로교에 노회 조직을 통보하고, 미국에 체류 중인 언더우드 목사에게도 노회 조직을 알리기로 하였다.
6. 총계 위원이 보고한 당시 장로교회의 교세는 목사 47명, 장로 53명 조사 131명, 예배 처소 984개 처, 세례 교인 17,890명, 원입 교인 21,482명, 전체 교인 69,098명, 교회 직영 학교 402개 처, 학생 8,611명, 헌금 총액 94,227원이다.
(4) 예수교 장로회 조선 총회
➀ 1907년 독노회 조직 이후 교회가 계속 발전하여 7개 노회로 분할하면서 총회를 조직하게 됨(제5회 독도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황해, 평북, 평남, 경기충청, 전라, 경상, 함경 등 7개 대리회를 7개 노회로 개편하기로 함).
➁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가 조직됨.
➂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방지일 선교사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파송(역대 선교사/ 방지일, 김영훈, 박봉로, 사병순(1913), 박상순, 홍승한, 방효원, 이대영, 김호순(여)
2) 기독교 조선 감리회 창설
(1) 선교사의 내한
➀ 1885년 아펜셀러 입국 후에 남북 감리교회에서 선교사 계속 파송.
➁ 1927 년부터 합동 운동이 일어나 미국 남,북 감리회 총회의 승인을 받아 조선 감리 교회를 조직토록 함
(2) 조직
➀ 1930년 12월 2일 제 1회 총회가 서울 협성 신학교에서 개최되어 제1대 총리사로 양주삼 목사 피선.
➁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식 거행.
3)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1) 발단
➀ 네비우스 방법으로 사경회와 성경 연구열이 고조되었다.
➁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들이 수양회에서 성령운동이 일어남.
➂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남.
➃ 장대현교회의 부흥운동 후 길선주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가 전국으로 확산 새로운 영적각성운동 전개.
(2) 결과
➀ 남녀노소, 유무식자, 선교사, 국내 교역자, 신구 신자를 막론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음.
➁ 각자의 죄를 통회자복 함으로 화해와 사랑의 분위기 조성.
➂ 새로운 사랑과 봉사의 능력을 받음.
➃ 학교는 2주간 휴학하고, 일반은 사무 중지, 상가는 철시하여 기도에만 힘씀.
5. 백만 명 구령 운동과 전진 운동
1) 백만 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
(1) 발단(1910-1911)
➀ 1910년의 한일 합방으로 좌절감에 잠긴 백성들에게 영적 각성을 줌.
➁ 민족의 활로로서의 교회의 사명 자각.
(2) 결과
➀ 전도 헌신 일수가 연 10만일이 되었고, 70만권의 마가복음(쪽복음)을 배포.
➁ 일본 총독부의 교회 탄압의 기회가 됨 / 105인 사건.
2) 전진운동
(1) 발단
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대표 33명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교회가 조직 동원의 모체가 됨
➁ 3.1운동으로 교회 피해 극심. 장로교만 체포된 목사와 장로가 134명, 교인 3,804명, 사살 교인 47명, 재산피해 약 3만 달러.
(2) 경과
➀ 장로교회의 전진운동(The Foward Movement), 감리교회의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등을 조직적으로 전개.
➁ 주일학교 운동이 활기를 띰. 1920년 ‘주일학계’ 잡지 발행, 1921년 전국 주일학교 대회 개최.
➂ 김익두 목사의 신유, 부흥 운동으로 새로운 영적 감화를 끼침.
6. 민족적 비애와 한국교회
1) 105인 사건
한일합방 이후 우리나라는 이렇다 할 기관이 없었다. 유일하게 교회가 조직체로 있었다. - 독립운동이 교회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독교지도자 투옥, 선교사 추방 - 한국 통치의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데라우찌 - 일본 초대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 참석차 선천역에서 잠시 하차 했을 때 암살하려 했다는 구실을 붙여 해서지방 유지 150명을 체포(2명-고문사, 23명-석방, 123명-1912년 7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 그리스도인이 97명) 사건은 날조로 16명의 암살음모자들이 기차편으로 정주역에서 선천역까지 기술되어 있음(법원 서기가 정주역에 조회한 결과 당일 선천행 차편은 6매만 판매됨)
* 105명에게 형
일본 교회가 일본 총독부의 뇌물을 먹고 한국교회에 새로운 전도를 꾀함 -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榮圈)에 보내는 사도적서한(使徒的書翰)”이라는 편지까지 보냄.
105인 사건은 일본과 한국이 최초로 정신적인 싸움이 됨.
1915년 2월까지 풀려나옴(출옥수들이 평양역에 도착시 시민 9,000여명이 환영함)
일본, 시베리아, 남만주로 이민 - 시련과 궁핍 등으로 인하여 250만 명이 이민함.
2) 한국교회와 3.1운동
2대수난 - 3.1 독립운동, 경제공황
①1910년 이후의 교회성장은 ‘소속감’이라는 사회심리와 가족적인 연대관계에서 이루어짐(이러한 관계는 성장도 되지만 방해도 됨).
②이 소속감이 민중의 운동으로 전개되고 초대 한국교회가 지녔던 애국의 열의와 함께 나라를 상실한 백성의 유일한 소속의식을 낳았다. 이렇게 한일합방 후 9년째 3.1운동이 일어남.
③이 운동은 한국인 전체의 운동이었고 천도교, 불교, 기독교의 종교단체의 연합운동이었다. 핵심은 기독교회에 있었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목사였음. 일본이 이를 간과하지 않고 기독교에 대한 비인도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만주의 교회들까지 피해를 입음
④그해 가을. 장로교 총회는 신학생의 다수가 체포되어 지방교회가 손실 됨. - 신학교 강의 중단(간도, 남만주, 수원의 재남리 교회, 선천 교회, 기타 학교 등)
※1919년 총회 보고 - 체포 목사, 장로 : 134명 / 체포 교인 : 3804명 / 사살교인 : 47명
3) 신사참배
(1)발단
1934년 선교 50주년 희년 행사가 활발히 진행됨
1935년 가을, 숭실 전문학교장 맥쿤(George S.Mccune, 윤산온)이 평남 지사에서 신사참배 강요당함
1938년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민의식이라 하여 참배키로 결의함(1954년 제39회 총회가 안동에서 모여 27회 결의를 취소함)
(2)수난
1943년 장로회 총회가 해산되고 일본 기독교단 조선 교단으로 변함.
1943년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를 폐쇄
주기철, 최봉석 등 수 많은 순교자와 진리의 파수를 위해 옥고를 당한 많은 산 순교자를 내었고, 한국 교회의 대 수난기가 됨.
7. 교회의 분열과 합동
1) 장로교의 제1차 분열
(1) 1946년 9월 고려 신학교 개교.
(2) 출옥 성도들의 교회 재건안과 일제시 일본 신도에 귀의했던 교직자 사이의 알력.
(3) 1952년 9월 11일 출옥 성도들이 고신파 총회를 따로 세움.
2) 장로교의 제2차 분열
(1) 1938년 9월 30일 평양 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무기 휴학.
(2) 1939년 가을, 서울에서 조선 신학교 개교.
(3) 해방 후(1947년) 조선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불만을 품은 조선 신학생 51명의 진정서가 총회에 제출되어 신학논쟁이 벌어짐.
(4) 자유주의 신학(김재준 교수 주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1953년 기독교 장로회를 설립함.
3) 장로교의 제3차 분열
(1) 1959년 9월 제44회 대전 총회에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약칭 W.C.C) 가입 문제와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 등으로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
(2) 교권과 선교사의 작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세칭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됨
4) 감리 교회의 분열과 합동
(1) 1945년 가을, 감리교 재건 중앙 위원회를 조직하여 재건을 논의하였으나 소위 부흥파와 유지파로 분열. 그후 1949년 3월 ‘기독교 대한 감리회’로 합동함.
(2) 1954년 3월 감독 선거로 호헌파가 생겼으나 1959년 3월 재합동.
(3) 1975년 총리원측과 총회측으로 분열되었으나 재합동 운동이 계속 일어남.
5) 성결 교회의 분열과 합동
(1) 1943년 12월 29일 총회 해산.
(2) 1945년 11월 9일 재건 총회.
(3) 1960년에 연합기관 문제로 분열하여 기독교 성결교회는 동양 선교회(O.M.S)와 관계를 맺고, 예수교 성결 교회는 I.C.C.C와 관계를 맺음
6) 장로교의 합동 운동
(1)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➀ 신학, 주장, 대외 관계가 같으므로 1960년 12월에 합동하여 이른바 합동측을 형성.
➁ 1962년 고신측 인사들 가운데 환원하여 고신측을 다시 형성.
(2) 합동측과 통합측의 합동 모색
1965년에 급진되었고, 쌍방 총회가 위원을 선출하고 합동 원칙, 세칙까지 작성하고 1968.3.1일 오후 2시에 대전에서 합동 총회를 개최키로 하였으나 통합 측이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백지화 되었다.
8. 교회 성장 운동
1) 운동의 의의
민족 복음화 운동, 전군 신자화 운동, 빌리그래함 전도 대회, 엑스폴로 74, 선교 1백주년 향한 교회 성장 운동, 77민족 성회 등 일련의 전도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자원 집중과 민족복음화에 새로운 역사를 이룸.
2) 운동의 확산
각 교단, 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새로운 개척운동과 전도운동은 안으로는 민족 복음화 운동이 일어남
9. 에큐메니칼 운동
1) 에큐메니칼의 의미
에큐메니칼(ecumenical)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 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 에서 파생된 말로서 ‘전 세계적인 교회(world-wide Christian unity)’ 를 의미한다.
교회는 민족적, 국가적 구별을 초월한 인류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인 교회, 그 교회가 전세계로부터 모여서 개최한 교회 회의도 콘칠리움 에큐메니쿰(Comcilium Oecumenicum)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15회 사용되었다.
이 말은 교리문제로 인한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교회회의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연합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타나며, 니케야 신조도 교회의 연합, 거룩, 보편성 및 사도성을 말한다. 그러나 전세계적이고도 조직적인 연합운동은 20세기의 선교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곧 이 단어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교회들을 연합하는 운동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 단어는 세계 교회협의회 즉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 산하 기관의 신학 또는 공식적인 견해 및 신학적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면서 WCC 초대 총무를 역임한 비서트 후프트(Vissert Hooft)는 이 에큐메니칼 용어를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 '전 로마 제국', '전 교회', '교회의 우주적 타당성', '교회의 세계적인 선교', '교회간의 관계와 일치', '기독교의 일치 의식'등 일곱 가지로 표현하고 그 중 후자 세 개념, 교회의 세계적 선교, 교회들 간의 일치, 기독교의 일치 의식을 20세기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에큐메니칼의 정의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즘이란 말은 금세기에 시작된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한정되고 있으나 본래의 의미로 본다면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뿐 아니라 더 큰 의미를 가진 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전세계의 일치, 전 인류의 일치도 포함하는 것이다.
2) 에큐메니칼의 의의
⑴ 19세기에 일어난 초교파적 선교 운동을 말한다.
⑵ 원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로 뭉쳐야 되겠다는 갈망과 책임 의식이었다.
① 세계 선교 운동의 필요
② 그리스도교 청년 운동
③ 현 세계가 지니고 있는 윤리적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
④ 교리 및 교회 제도에 대하여 변하는 신앙의 태도.
⑤ 교파간의 협동 운동.
⑥ 제2차 대전의 경험 등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⑶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대표 351인이 모여서 조직하였다.
◉ 에큐메니칼 운동
1. 역사
에큐메니컬 운동, 즉 일반적 의미의 교회 일치 운동은 개신교에서 17∼18세기의 신앙 부흥 운동과 19세기의 선교 운동 및 청년 운동의 과정을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신교 교파들과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결성하면서 두 교파간의 일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정교회는 WCC 결성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1961년에 비로소 회원교단으로 가입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과거 KNCC)의 협력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2.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간의 화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측과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1972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어 1972년 말타 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즉, 장로교회와는 1970년부터 꾸준히 대화하고 있다. 이미 교황청과 세계 개혁교회 연맹(WARC) 간의 제1기 대화 보고서는 1977년 ‘교회와 세계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이어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진행된 제2기 대화에서는 ‘교회에 대한 공동 이해를 향하여’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감리교, 오순절 교회, 침례교회와도 각각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들을 발표해왔다.
3. 아시아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
아시아 차원에서는 1994년에 아시아 주교회의연합( FABC)과 아시아 기독교교회협의회(CCA) 사이에 만들어진 ‘아시아 그리스도인 일치운동(AMCU)’을 중심으로 일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시아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평신도 대표들이 참가해 서로의 차이점을 딛고 함께 협력해 일하도록 한다는 궁극적 목표를 확인하고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논의하는 등 활동 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일치 운동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서 공동번역사업이다.
4.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
1)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단체로는 대한 성공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한국 기독교 장로회 등에서 회원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 협의체인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가 있다. 특히, 성공회에서는 1965년 한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기도모임, 개신교 교파들과의 부활절 연합예배 참여, 루터교와의 축구 모임 등 기독교 세계의 분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이다.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도 한신대학교 신학과 학생들과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학생들간의 축구경기와 상호 전례(Liturgy)설명으로 다양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반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정교회 간의 명확한 분리를 주장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상당수 존재한다.
2) 공동번역성서 출간
한국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 교황청 일치사무국에서 성서 공동번역을 위한 규정을 마련하고 세계성서공회연합회와의 협조를 지침을 시달함에 따라 1968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대표로 공동번역위원회를 구성해 1971년에 공동 번역 신약성서를 출판했으며, 1977년에 구약성서를 공동 번역하기도 했다.[1] 최근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가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와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를 발족시키는가 하면 일치 기도 주간에 에큐메니컬 포럼을 개최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성직자들의 축구경기를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5. 에큐메니칼 총회
WCC총회는 매 7년마다 열리는 전세계적인 교회일치모임이다.
(1) 제1차 - 암스테르담
1948년 8월 암스테르담 제1회 총회에서는 151교파로 부터 352 대표들이 참석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이 절대 다수요 소수의 정교회 대표들이 있었다.
(2) 제2차 - 에반스톤
1954년 8월 15일 미국 시카고 근방 에반스톤시에서 17일 동안 진행 되었다. 세계 163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에서 132교파와 헬라정교 계통의 교회들로부터 1242명의 대표들이 내참하였다.
(3) 제3차 - 뉴델리
1961년 12월 인도 뉴델리에서 모인 회의에서는 러시아 정교회가 회원으로 되었다. 또 이 회의에서 국제선교 협의회가 WCC에 합동되었다.
(4) 제4차 - 웁살라
1968년 7월4일부터 20일까지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열렸다.
(5) 제5차 - 나이로비
1975년 11월23일부터 12월10일까지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286개 교파의 747명의 대표들이 모였다. 여기에는 로마교황청이 파견한 16명의 천주교 사람들을 비롯한 불교, 힌두교, 모슬렘교, 유대교 등에서도 참석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구원과 복음과 선교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해방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북반구의 백인지배 소비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난, 민중차별, 인권유린, 군사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이 총회 때에 해방신학이 가담하게 된 것이다.
(6) 제6차 - 밴쿠버
1983년 7월24일부터 8월10일까지 캐나다 밴쿠버에서 세계 각국에서 정식대표 930명을 포함하여 각국에서 보내온 교계대표들,이방종교대표자들,천주교사절드, 보도진 등 820명을 포함 총3500명이 참석하였다.
특히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 의장 뮬더는 캐나다 원주민에 관한 인터뷰에서 불교, 힌두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구원 얻었다고 강력 주장했다. 오직 예수를 부인, 종교다원주의, 예수 이름 배제
(7) 제7차 - 캔버라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7차 총회에서는 개회행사로 한국 이화여대의 전 조직신학교수 정현경 교수(현 미국 유니온신학교 조직신학)가 무속신앙에 접목한 “초혼제”를 행하였다. 개회행사로 초혼제(招魂祭)를 지냈다. 아래는 '무당 신학자'로 알려진 정현경 교수 가 펼친 초혼제의 내용이다. 정현경은 제3세계와 여성을 대표한 기조 강연자로 나서서 "성령이여 오소서! 온 누리를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 강연을 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초혼문을 읽으면서 초혼제를 진행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각종 종교(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정령숭배, 무속신앙…)에서 나타나는 영적능력과 신비를 동일한 성령의 역사라고 함 – 범신론적 종교혼합주의
초혼문 : 기원 (Invocation)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오소서! 애굽인 하갈의 영이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해
착취당하고 버림 받은 검둥이 여성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 우리아의 영이여! 당신은 다윗왕에 의하여 전쟁터로 파병되어 살해된 충성스런 군인입니다.
다윗의 음욕이 당신을 죽게 한 것입니다.
오소서! 쟌 다크의 영혼과 중세기에 화형으로 살해된 무당들의 영이여!
오소서! 토착민의 영이여! 식민지 시대와 위대한 기독교 선교시대에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당시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원자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인간들의 금전욕에 의하여 고문당하고 착취당한 흙, 공기, 물의 영이여!
오소서! 걸프전에서 죽어간 군인들, 민간인들, 해양생물들의 영이여!
오소서! 십자가 상에서 고문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 형제이신 해방자 예수의 영이여!
(8) 제8차 - 짐바브웨 하라레
1998년 12월 3일부터 14일까지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열렸다. 남아프리카 대통령 넬슨 만델라 연설 중에서 “WCC가 지난 30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해방운동단체(공산게릴라)를 지원해 온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한다.”고 함. 동성애, 일부다처주의 허용, 결의
(9) 제9차 - 포르토알레그레
2006년 2월 14일부터 23일까지 브라질 포르로 알레그레에서 120개국 348개 회언교회 691개 대표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성적 소수자들(동성애자들)에게도 성직을 허락하는 제도적 구조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동성애 성직자 지지
지금 전 세계적으로 WCC 소속교단 교회들 중에는 동성애 성직자가 계속 늘어가고 있다.
(10) 제10차 - 부산
10차 총회는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10일에 걸쳐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사 42:1~4)”라는 주제로 부산 벡스코에서 전 세계의 110개국, 347개 교단 기독교 지도자 8,500여명이 참석해 역대 최대 규모의 대회로 모였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