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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사 - 【 4 】 장로교회(長老敎會)의 중심 신학사상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457회 작성일 2018-09-05 00:22
【 4 】 장로교회(長老敎會)의 중심 신학사상
 
이미 여러 번 언급 했지만 장로회주의와 칼빈주의는 동인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장로교 신학이라고 별도로 신학이 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장로회주의와 장로교 신학은 그 영역이 다르다. 장로회주의는 다분히 정체적이라며, 장로교 신학은 문자 그대로 신학을 말한다. - 장로교 신학이란 대부분의 개혁신학이 이에 속한다(루터나 웨슬레의 신학은 포함하지 않으며 칼빈 사상에 입각한 신학이다.). 

1. 장로교회의 중심 신학사상
 
장로교회의 중심 신학이 따로 성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장로교회는 교회정치 체제에 의한 것이므로 교리적인 면에서는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을 따른다. - 개혁교회의 모든 신학사상이 장로교회의 중심신학은 아니다. 
장로교회의 중심 신학 사상은 칼빈을 중심한 개혁자들이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리들을 분석하고 종합한 신학을 말한다.
개혁 당시 개혁자들이 주장한 다섯 가지 슬로건
 ① Sola Fide(오직 믿음)
 ② Sola Gratia(오직 은혜)
 ③ Sola Scriptura(오직 말씀, 성경)
 ④ Solo Christo(오직 그리스도)
 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 슬로건에는 칼빈 사상이 지배적이지만 루터 신학사상, 쯔빙글리 신학사상, 어거스틴 신학사상도 들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주(Kurios christos)
교회의 본질 -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설립자요 통치자요 대속자이며 주님이시다. - 그러나 로마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진 바나 다름없이 그 밖의 잡다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성(Lord ship)을 대신하고 있었다.
교회의 본질을 되찾자는 말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머리로 계시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 선언을 두 마디로 표현했다. Kurios christos(Christ is Lord) 이것은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사상이다. ➠ 빌 2:9-11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하셨다. 하나님의 최대의 계시이며 최대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은혜와 믿음
개혁교회는 은혜 중심의 교회라 한다. 은혜라는 말은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 사도교회 이후 중세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Salvatio Sola Gratia (Salvation by Grace alone)을 강력하게 부르짖었다.
 ➠ 은혜의 뜻
은혜는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요한복음 1: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다. 모든 개혁자들은 사도 바울에게서 은혜를 되찾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주님의 은혜이다.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했다. 
 ①은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은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적인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인간 쪽에서 필요한데 대하여 채워주시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강하고 선량한 나라여서 택하시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신 7:7-8).
  이에 대하여 K.J.V에서는 ‘loving-kindness'라고 번역했지만 R.S.V에서는 ’steadfast love'(단호한 사랑)이라고 했다. 칼빈은 ‘이러한 은총은 언제나 우리가 받아들일 것 뿐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
 ②은혜는 자비와 용서이다.
  자비와 용서는 곧 권능이다.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은총으로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다. 인간의 상처가 고침 받을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은 자비와 용서뿐, 그 이외의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상처나 죄를 고침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새로운 삶을 위한 선물이다.
  사도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권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고후 12:9)고 했다. 인간의 약함이 강할 수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가 되어 수고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고전 15:10)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갈 2:20)이라고 했다.
➠ 믿음의 뜻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곧 ‘믿음’이다. 개혁자들이 주장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었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읽었을 때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루터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놀라운 회의를 느낀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충분한가?’ ‘더 하면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 ‘나는 이것으로 정말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그는 자신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터는 바울의 경지에 이르러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총에 의한 구원’을 부르짖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2:8절에서 고백한 말씀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①믿음은 은총의 선물이므로 내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할 점은 내가 아무것도 않거나 또는 내가 한 일은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한 다음의 자세이다. - 은총의 결과인 구원은 내가 아무리 확신하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확신이다.
  바울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언제나 순종해오던 그대로 내가 같이 있을 때만 아니라 떠나 있는 지금도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시오. 여러분 속에서 활동하셔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할 뿐인 것(눅 17:10)이 구원에 이르는 우리의 자세이다. 이것이 개혁사상이다.
 ②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의인이라서가 아니라 악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없는 것이 구원의 도리이다. - 그 어떤 인간이 좌우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악인으로서 은혜를 충만하게 한답시고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것도 아니다.
  본훼퍼(Bonhoeffer)의 은혜 - 본훼퍼는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로 나누었다. 값싼 은혜는 아무것도 치루지 않는 은혜를 말하며, 값비싼 은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신 것과 같은 책임 있는, 그리고 훈련에 임한 은혜를 말한다.
  개혁자들은 선행을 전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다. 다만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선행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 선행이 선인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선인은 선행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은총은 우리를 자유하는 길로 이끄신다. 은총은 자유를 보장하게 한다. - 즉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운명을 발견하게 한다(갈 5:1).
 
 3) 성서의 권위
개혁자들은 ‘오직 성서만’을 부르짖었다. 개혁자들이 근거를 둔 성서는 주로 B.C 750년부터 A.D150년 사이에 이뤄진 것들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성서가 보여 주신 것은 어떤 것인가?’에 모든 결론을 두었다.
 (1)‘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의 말’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 종종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라고도 한다. 그리고 성례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이라고 한다. 어거스틴도 ‘말씀의 가시(可視)’라고 했다. 이런 말은 성서의 권위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설교도 성례전도 말씀의 가시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운송하는 수단이었다.
 (2) 성서비판학은 파괴적인데서 창조적이어야 한다.
 성육신하신 ‘말씀’에 대한 기록의 말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 잘 알자는데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의 말의 특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비판학은 무서운 것이다. 성서가 결코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개혁자들은 ‘성서는 성서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해하고 애매하고 복잡한 부분은 또 다른 부분으로서 그 내용의 본질을 살피는 것이라고 했다. 성서는 언제나 성서를 통하여 말씀을 계속하는 것이다.
 (3)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는 것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다는 것은 시간적 혹은 공간적인 것까지도 영감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다. 말씀하고자 하시는 그 내용이 문제이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로만 피상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드라마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읽는 자에게 성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를 대할 때 삶의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마당으로서 임해야 한다. - 성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 돌아서기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자로 경험하라는 것이다. 
 
4) 하나님의 통치권
이 말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 모든 것에 지고(至高), 모든 것에 독자성(獨者性)을 가진 자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존하시고 자유하시는 분으로 어떤 인간에게 종속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머리에 속하는 한계점을 지닌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의 교회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로마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것이었다.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확신할 틈이 없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종(Servant)의 다스림이나 다름없었는데 종은 여전히 종으로 있을 뿐이었다. 본디오 빌라도가 여전히 재판하고 있는 마당의 교회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이나 사랑이나 그의 정의가 다스리는 교회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종의 형태를 입으시고 그의 사랑을 강력하게 보여주심인 것이다. 로마교회는 교회라기보다 지상의 나라들이나 다름없었다.
(1) 택함의 교리(The Biblical doctrine of Election)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그의 주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유대 민족을 택하였다. 그들은 큰 민족이어서가 아니며 좋은 나라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이며 권한이었다. 그리하여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불신실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불신실해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자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새로운 관계를 원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만찬에서 “이 잔은 새 언약”이라 하셨다. 기독교인들은 “새 이스라엘”로서 새롭게 택함을 받은 것이다. 이 선택이야 말로 바로 은총에 의한 선택이다(롬 9:-11:). 그러므로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택함은 특권이라기보다 의무로서 “가서 온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교회는 부르심(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로서 존재하며 그 의무와 책임을 감당해야한다.
(2) 예정론(Predestination)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설이다. 이런 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과 논쟁을 일으켰다. 
예정론은 기독교에서만 아니라 회교(回敎)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중세 스콜라 시대에 정통교에서는 강력히 이 예정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1세기에서는 예정론이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예정론은 주로 그리스도의 본성과 삼위일체 신학에서 유출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펠라기우스(Pelagius)에서 일어났는데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하든 받아들이든 그것은 자유’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에게서 정립되었다. 그는 “사람의 의지는 죄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에 대한 해방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은총만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주장이 529년 오렌지(Orange) 회의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때는 야만족이 휩쓸던 때였다. 이에 대한 논쟁을 계속할 여유가 없었다. 그 이후 849년 퀴엘시(Quiercy) 대회에서 거부당했다.
중세에 들어와서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불리게 되자 신학의 거장들이 고전식 신학을 부흥시켰다. 롬바르드(Peter Lombard), 보나벤투라(Bonaventura), 알버투스(Albertus), 마그누스(Magnus),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으로 1200년대 전후에는 전승기였다.
1300년대에 와서 스코투스(Duns Scotus), 옥함(William Ockham) 등이 다시 도전했다. 그들은 “그럼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했다.
개혁자들(Luther, Zwingli, Calvin)은 모두가 예정론을 주장했다. “진정한 교회는 택함으로서이며 의지의 해방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가스틴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500년대에는 루터와 멜랑크톤이 논쟁을 벌였으며
1618-1619년의 돋트 회의에서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들의 논쟁이 있었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온건파 칼빈주의자(Sublapsarian / “예정 없이 아담이 타락했다.”)와 과격파 칼빈주의자(Supralapsarian / “창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다 예정되었다.”)들의 논쟁이 일어났다.
1700년대에는 경건주의(Pietism)가 일어났다. 웨슬레(John Wesley)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쪽으로,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칼빈적 메소디즘(Methodism)으로 번졌다.
1800년대에는 과학이 발전하여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만일 하나님이 우주를 과학적인 법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유 할 수 있느냐?” “도대체 정치 경제 문화는 어쩌라는 것인가? 또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인가?”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발트(Barth)의 스콜라적인 칼빈주의의 부흥은 예정론 신학에 대하여 일어났다. 발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 선택을 강조함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논쟁을 끝내기를 시도했다.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데 구원받을 자도 다 택하셨다.’는 것에서 일어났다. 이 예정론은  ‘택함 받은 다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이론은 언제나 소수의 주장이었다. 
 ※ 예정에 관한 단어는 구약에는 전혀 없으며, 신약에는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 여기서는 “미리 정함”, “미리 아심”이라는 뜻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었었는데 하나님은 이들 중에 얼마를 골라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할 자와 심판할 자를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한다. 이를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비 성서적이라고 거부했다.
 ※에밀 브룬너는 “성서에 영원히 거절된 자는 없다.”고 했으며 우주적 구원관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은 무책임적인 존재란 말이냐? 윤리성을 버리고 살아도 좋다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있으며 그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서 오는 자유이다”고 했다. 브룬너는 ‘예정은 한쪽 오직 선택분이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예정론이 칼빈의 독점물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주된 사상은 예정론이 아니다. 그의 예정론은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머지는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5) 만인사제(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1)사제(Priest)란?
사제(司祭)라는 말은 종교개혁 이후에 사라졌다. 이 말은 제사장이라는 말과 같으며 감독 아래 있는 신부(神父)라고도 하는데 개혁자들은 신약성서에 이런 말이 없다는 점을 들어 배척했다. 이는 예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대표자”로서 주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집례한 자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는 구약적인 사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구약적인 제사의 일은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로 계시기 때문에 또 다른 중보자를 세운 가톨릭교회의 미사(Mass)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역행이요 모독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대표는 말씀(Word)으로서 계시기 때문에 제사자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이 제사의 직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희생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참여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베드로전서 2:9-10절을 인용하여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 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이의 덕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함을 받지 못한 자였으나 지금은 자비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산제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성직체제(聖職體制)를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신부가 있어서 신도들이 그에게 죄를 고백하면 신부가 이를 속죄하여 주는 중보자가 되고 성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누구나 중보자가 될 수 있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누구나 자신이 자신의 사제가 된다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함부로 타인의 사제가 된다는 것도 아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제사자(祭司者)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뜻이다(벧전 2:9). 
사제의 특권이 아론의 후손들에게나 레위인들에게 세습 되었던 구약의 개념은 무위로 된 것이다. 사도들이 가진 특권으로서 물려준 감독의 직이나 사제의 직은 복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사제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장로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합법적인 절차를 반드시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2)목사(牧使)는 개혁된 사제(司祭)이다
“모든 신자들”이라는 말은 즉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교회가 있는 것이다. 이 교회는 주님의 몸이지 인간의 모임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교회는 그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들의 법칙이 선포되는가?’이다. 또 다른 문제는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느냐?’는 것이다. 아무나 설교할 수도 없고 아무나 무질서하게 예식을 집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도를 중심한 사도교회의 목회자들의 시대는 지나고 남은 것은 가톨릭교회의 신부나 감독 또는 교황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도교회의 목회를 계승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의 뒤를 이은 목회자로 정립된 것이 목사였다.
목사는 지배자가 아니며, 명령자도 아니며, 죄를 사하여 주는 자도 아니며, 다만 도와주는 자, 봉사하는 자(minister)라는 뜻으로서 교회의 공직(公職)에 임하는 것이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으로서 하나님의 자비가 언제나 임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하며 가시적(可視的)으로 성장해야 하는 기관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비록 교파는 여러 가지로 나뉠지라도 다른 교회가 아니다. 서로 다른 옷을 입은 것에 불과하다. 교회를 운영하는 행정 스타일은 떄로 다를 수 있다. 성서가 한 미디로 어떤 정체를 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장로체제, 감독체제, 회중체제처럼 서로 섞여서 각자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아무런 특권 계급 없이 전혀 관료적이지도 않고 오직 섬기는 일에만 힘썼듯이 오늘의 목사들도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목사가 존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사장이 아니며 교황도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 이외에는 일반 교인들과 다른 점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장로교회의 직분자로서의 목사이다.
(3)성직자 평신도(Clergy a Laity)
구약에서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 가톨릭교회에서도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그리스도가 지상에 대리자(vicar)를 두어 그에게 충성을 허락하셨으므로 주님이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Ubi Christus ibi ecclesia)고 한다. 즉 베드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Ubi Petrus bi ecclesia)고 한다.
원래 크레로스(Κλῆρος)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별도로 세워진 성직자(聖職者)를 말하고 라오스(Λαός)는 일반 백성을 말하지만 신약에서는 둘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구별을 언급하지 않는다. 복음 시대에는 만인평등의 시대로 목사도 다른 의미로서가 아니라 봉사자(διακονια)로서 이다.
교인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먹이는 자로서 전적으로 그 일에 봉사하라는 것을 개혁교회에서는 구별된 직분, 거룩한 직분으로 옹립하고 성직자라고 부르지만 구약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칼빈, 스코틀랜드 교회, 스위스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례하기 위한 자”에게 안수로서 성직자로 세우도록 했다.
1947년에는 감리교회, 회중교회, 감독교회와 함께 장로교회에서는 목사의 재 안수를 금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모든 교회가 존중하기로 했다.
 
6) 예배(Worship of God)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충분할 수 없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충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알려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을 때 그들은 찬양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이 찬양과 기도와 들음과 숭배와 고백을 예배(Worship)라 한다. - Worth(가치)+Ship(배)
하나님의 아시는 바란? “우리가 그를 알기 전에 그가 우리를 아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단순한 우리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에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없었고 이에 대한 응답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찬양도 기도도 그리고 감사도 하나님의 아시는 바에 의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것이 인간들의 의식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의 예배는 거의가 우상적이고 미신적이었다.
(1)예배의 특성
한마디로 개신교의 예배는 가지각색이다. 성공회(聖公會)에는 “기도교서”(The Book of Common Prayer)가 있었고, 연합장로교회에는 “예배지침”(The Book of Common Worship) 혹은 “예식서”(The Book of Common Order)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본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관계이며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이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사업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다. -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예배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인간들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이런 메시지가 없는 예배는 무의미하다.
정리 /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림이며 생활의 개선을 인도하심이다. 예배란 이미 앞서 본대로 “하나님의 가치”(worth of God)의 인식을 말한다. 즉 “위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만이 높임과 찬양을 받으심이다.”(Soli Deo Gloria) 그러므로 위대한 백성들은 일찍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노래했다. - 시편 105:1-2,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 시편 145:1-2,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노래하며 그에게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삶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은 곧 그의 뜻을 찾는 것이며 그의 뜻을 찾음은 그의 뜻대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것(기도)이다.
①기도(祈禱)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최초의 응답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이는 아무런 형태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공중예배(公衆禮拜)에서는 설교가 정선(精選)되듯이 기도도 정선 되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숭배(adoration)를 한다. / 다음으로 고백(confession)한다. 이는 일반적인 용어로서의 죄가 아니라 자기의 구체적인 죄까지 포함한다. / 그리고 고백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며 감사(thanks-giving)한다. 이는 죄의 용서와 은총의 선물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intercession)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돌보심에 대한 간청(supplication)이다. ⇨ 이를 줄여 acts라고 한다.
②회중찬양(Congregational singing)
개혁 이전에는 회중들의 예배 참여가 전혀 없었다. 미사(mass)는 사제에 의하여 드려졌다. 음악은 정규적이지 않았고 훈련된 성가대에 의한 것이었다. 개혁 교회는 회중들에게 예배의 참여를 허용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하게 되었다. 이를 일컬어 “믿는 자는 모두가 사제”(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라는 것이며 모두가 예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는 이 회중음악을 직접 작곡하거나 합창을 인도하기도 했다. 이들 시편 찬가는 지금도 구미교회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③성경봉독과 설교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의 일반적인 봉독을 금지했다. 사제만 읽을 수 있었다. 개혁교회에서는 성경 보급을 서둘러서 누구나 읽게 했으며 공중예배에서는 큰 소리로 봉독하게 했다. 구약을 읽고 신약을 읽었으며(복음서와 서신서를 따로 했음)이것으로 목사가 설교를 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예배였다. 개혁주의 설교는 언제나 성경적인 설교여야 했다.
④봉헌(The Offering of Gift)
속된 말로는 ‘돈의 수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코 헌금은 ‘돈의 수집’이 아니다. 헌금은 결코 세속적인 수집이 아니며 종교적인 신성한 드림도 아니다. 이는 예배의 일부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즉 세상에서 귀하게 사용하는 것을 드림이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데 대한 감격이며,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는 협조와 다른 사람을 돕는 참여와 경건한 신앙의 실천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돈으로 면죄부(indulgence)를 샀고 죽은 자의 죄를 위하여 그리고 각종 세금처럼 헌금을 바쳤다. - 그러나 개혁교회는 구약의 십일조도 면죄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예배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 이것은 그들의 헌금(offering)이었다. 그들은 희생이 없이는 예배할 수 없다는 관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드릴까?”라는 개념이었다. 그들의 떡과 포도주는 드림에 대한 상징이었으며 헌신에 대한 분담이었다.
⑤개인예배와 예배의 무질서
개혁교회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연합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예배도 인정한다. 언제 어디서는 하나님은 함께 계시므로 사실상 혼자가 아니며 언제나 기도로 교통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이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물론 식탁 앞에서도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개혁교회의 예배는 무질서 할 때가 많다. 예배 하는 자가 분명한 생각도 없이 또는 제사(祭祀)를 드리듯이 예배에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합당하지 않다. 이는 기독교가 미신성을 타파하기 위하여 존재하면서도 미신적인 예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유대교나 가톨릭의 예배를 책망한 후에 그들을 닮은 혼잡(Chaotic)이다.
교회는 없애야 할 기물이나 불필요한 성소(聖所) 또는 지성소(至聖所)의 현존은 물론이며 교회를 폐쇄적으로 밀봉하는 상태 등은 아직도 율법시대를 표방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예배당의 강단이 마치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것으로 생각하여 신성시 하는 것은 미신적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사설제단(私設祭壇)’ ‘불의 집회’라고 하여 무당이 흥청대는 것처럼 예배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나 안수, 안찰 등으로 예배를 혼잡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성한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예배는 흥분과 도취가 아니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2)성례전(The Sacrament)
①성례(聖禮)란 무엇인가?
성례라는 말은 성경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등한 의미의 단어도 없다. 이 말은 교회사의 초기에 등장한 Mysterion이라는 말을 라틴어에서 Sacrament로 번역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사성을 에베소서 1:9, 3:3-9, 골로새서 1:27, 디모데전서 3:16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나타내려고 할 때 인용되었다. 
라틴어 Sacramentum은 군인이 그의 상광에게 서약을 할 때 사용했으며 칼빈은 이것을 인용하여 ‘마치 사령관이 부하들을 그의 지휘 아래에 두기를 허락하는 행위’와 같은 의미로 변형시켰다. 
4, 5세기 때에 여러 가지 의식, 세례와 성찬 그리고 목사가 안수하는데 사용하면서 성례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중세에 와서 가톨릭교회는 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혼배를 모두 성례라고 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성례를 세례와 성찬으로 제한하였다. 칼빈은 안수에 대하여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성례에는 안수를 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안수는 정규적인 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장로교회는 안수를 성례라고 보는 전통이 있다.
스코틀랜드교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밝히신 성례전은 두 가지인데 세례(Baptism)와 성만찬(Lord’s Supper)이며 이는 아무나 집례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안수를 받은 목사만 집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성례전은 ①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외적으로 볼 수 있는 표시이며 ②내적이며 영적인 은총 자체로서 한 번 집행함으로서 “표시와 은총”을 동시에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은 영육이 동시에 존재한다. 생과 삶이란 영과 육의 동시 구성을 의미하며 영은 육에 의하여 작용하고 육은 영을 따라 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만남도 성례전으로 영육의 관계를 외적으로 보게 하고 내적으로는 은총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들이 만든 각종 의식을 전부 성례로 간주한다.
이 성례전은 세 가지 의미로 집례 한다.
A. 표시(It signifies) - 세례는 청결을 의미하고 성찬은 자양을 의미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이 가지는 표식이며 표시이다.
B. 인치심(It also seals) - 하나님의 은총에 동반함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C. 적응(It applies) - 이는 영적으로 변화를 입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의 음식이 되신 것을 목사가 집행하는 것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②성육신(The Incarnation)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으로, 하나님과 같은 신성으로 우리를 영육 모두의 재생을 위한 희생물이 되셨다. 그리고 그가 죽음에서 다시 사셔서 다시는 죽음이 지배할 수 없게 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히 재창조하시는 것 모두 그의 성육신에서 기인된 것이다.
③세례(Baptism)
세례는 외적으로 볼 수 있는 표이지만 내적으로는 영적인 고통이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와 새로워짐과 영원한 삶과 은총의 약속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의식만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사람은 받는 행위에 국한된다.
바울은 세례를 죽음에 비유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영생하는 도리라고 했다. 그것은 오직 “예”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접붙이시고 재생시키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부르시며 약속하시는 것이다. 
세례는 인간들의 행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응답하게 하실 때 주어지는 것이다. 
A. 유아세례(The Baptism of Infants) -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축복하시며 어른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다(막 10:13-16). 베드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행 2:38-39)라며 세례의 초대에 사용했다. 부모가 모두 성도일 때에는 두말 할 것도 없고 한쪽만 일 때도 가하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마 18:3,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 막 10:14, 어린아이들을 막는 것을 책망하심
- 막 10:16, 어린아이들에게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심
- 마 28:19-20, 모든 민족(all the nations)에게서 어린아이도 포함되어야 한다.
- 행 2:38-39, 베드로가 세례를 강조할 때 “여러분과 어린아이들”이라고 했다.
- 행 16:15, “그 여인과 그 집안이 다”에서 어린아이를 뺄 수 없다.
- 행 16:33, “그와 온 가족”
- 고전 1:16, 가족들에게는 어린아이가 포함된다.
- 엡 6:1, “주 안에서”라는 말은 세례를 받은 자를 뜻한다.
-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이 어린아이를 제외한다면 모순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입교(入敎)를 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의무와 특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은 자로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길을 열어주고 교회를 봉사하게 하여야한다.
B. 손을 머리에 얹는 예식(form of Confirmation) - 여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뚜렷하지 않지만 사도행전 8:14-25절과 19:1-6절에서 납득할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도들이 손을 머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축복할 때와 같이 “교회의 선교사적 사명”과 “사도성의 연합”이었던 것 같다고 칼빈은 히브리서 6:2절 주석에서 언급했다. 역사적으로는 3세기경에 이런 정황이 있었으며 씨프리안(Cyprian)때에는 더욱 일반적이었고 종부성사에 대한 언급도 했다. 그 후 축도와 구분하기 위하여 후보자들을 꿇어앉게 했다. 그리고 세례는 침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초대교회는 물로 들어가는 것, 발목만 잠그는 것, 때로는 무릎까지였지만 원어에는 ‘물을 뿌린다.’는 의미도 있다. 세례는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것의 표징이다.
④ 성만찬(The Lord's Supper)
이는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자기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직접 집례 하셨다.
마 26:26-30, 막 14:22-26, 눅 22:15-20, 고전 11:23-26
위의 본문에서 성찬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를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일과 둘째, 십자가상의 그의 몸과 피를 감격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임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봉헌과 교제(consecration and communion)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속죄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에서 중보자로 오늘도 우리를 성화시키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예식에 참여함이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지극한 은혜이며 지극히 거룩한 예배이다.
고전 11:23-29절에는 성만찬의 정당한 절차를 밝혀준다. 첫째는 물질적인 요소, 둘째는 행하신 말씀, 셋째는 행하신 행동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대로 우리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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