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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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1 (고대, 중세교회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8,845회 작성일 2009-09-29 16:04

역사신학(歷史神學)


【 1 】 고대교회사(古代敎會史)


      Judaism의 시작                   사도시대                            속 사도시대
    ----- B.C334-------------------   B,C 4   ----------------- 90년-----------  140년

헬라주의문화  / 헬라화문화         말씀                            가르침(교육)
Hellenism       /  Hellenistic            κηρυγμα                      διδακη
                    /  Judaism
                    / <-- 알렉산더

※ 헬라화문화의 특색 및 영향
   신비주의 문화 + 혼합주의 문화
  내세구원종교(내세적 만족추구) - 현세의 불만족을 내세에서 추구(피의 세례 및 성찬, 부활강조)
※ Judaism
  - 5색 당파 =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헤롯당, 열심당
  - 에스겔 후 안식일 준수사상이 강조(안식일 지키지 않아 멸망했다고 인정) ⇨ 예수시대까지 영향
  - 구약성경의 경전화
  - 세기말적 묵시사상과 남은 자 사상이 강조

1. 초대교회(사도시대, 예수님-90년) - 재림공동체
  - 초대교회의 부활이해 - 초대교회의 카리스마(charisma) ⇨ 부활의 체험, 능력 있는 사람
    ⇨ 부활을 기독교 핵심으로 이해
  - 예루살렘 교회 - 예수님의 가족 직계 계열, 사도계열 중심 
    ⇨ 예수의 부활 직접체험, 유대적 기독교
  - 안디옥 교회 - 바울 중심 ⇨ 예수의 부활, 환상적 체험
  ※ 두 교회 사이에 갈등심화 
    ⇨ 유대적. 율법적 기독교인 예루살렘 교회
    ⇨ 복음중심적인 안디옥 교회 - 바울의 사도권 주장. 헬라파, 유대파의 갈등문제(행 6:)
* 헬라 문화의 특징
  - 선과 악 ⇨ 이원적 사고
  - 개념화시키는 것을 좋아함. ⇨ 예) 바울이 로마인에게 설명한 의(義) = 법정적 의(판사가 피고에게 죄 없음을 선고하는 것)
* 사도들이 남겨 준 업적
➀ 교회의 설립 - 예루살렘 교회는 소멸. 디아스포라 중심인 안디옥 교회가 살아남음.
➁ 해외선교
➂ 예수님 말씀의 기록
※ 예수시대는 운동시대, 사도시대는 체계화, 교리 화시키는 시대
※ 재림공동체(초대교회)의 특징
   -사유재산 부정(엘리야 제단, 구원파, 박태선의 전도단 등)
※ 성경의 기록 이유
   -재림지연으로 인한 초대교회의 갈등발생(살전.후)
   -사도들의 죽음
   -타종교의 경전, 선교의 필요성
   -예배용으로 말씀이 필요
   -기독교의 변증
  ※ 마르시온파 발생(140년) 이전까지 초대교회에서 정경과 외경 구분 없이 사용함. 마르시온 이후 정경화 작업 시작(아타나시우스 -신약 27권 확정)

2. 속사도시대(90-140년) - 사도의 1대-2대 제자
1) 이단발생 - 복음의 그릇된 해석
  ※ 헬라적 사고(로마신화) 속에 젖어 있는 헬라인들에게 기독교(神人, 부활)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함
➀마르시온(Marcion)
  -마르시온이 만든 이단
  -일종의 영지주의 사상이다(가현설).
  -구약성경을 거부 -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함(순복음-눅, 바울서신10       개를 모아 정경 만듬)
  -책 - ‘헤르마스의 목자’, ‘바나바의 서신’, ‘디다케’
➁몬타누스(Montanus) -어머니(모니카)
  -재림강조, 은사중심(이적의 은사강조-성령, 예언, 신유)
  -Priscilla, Maximilla 두 여자 사제와 함께 예수 재림 예언을 하고 다님. 수많은 사람을 현혹시킴. 철       저한 윤리성 강조
  -엄격한 금욕주의로서 금식과 고행을 장려하였고, 재혼을 엄금, 독신을 권장.
  -북아프리카까지 확산 되었으며, 4-5세기까지 남음(윤리적 종교로 남음)
  -160년 소아시아 감독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2) 유리에 기초를 둔 구원관 - 신흥종교의 특색으로 종교가 뿌리내림.
3) 교리 중심으로 움직여 감(완전한 교리체계는 세우지 못함)

3. 변증신학(λογος 기독론)
-변증가 - 유스티아누스, 저스틴(Justin)
-기독교를 변질시킨 장본인 - 기독교 철학자 ⇨ 헬라철학으로 기독교를 해석(기독교를 철학화 시킴)
-최초로 조직신학 적 연구 - 최초의 조직신학자
-문화신학
*절대자 하나님, 불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명명함 - 이 아래에 Logos(중재자)가 있다. ⇨ 종속론
*로고스가 인간에게 오면 ⇨ 로고스의 씨앗 ⇨ 자연법 ⇨ 성장(계발) ⇨ 구원(구속사적 구원이 아닌 행      위적 구원)
-변증신학의 종속신학(2神)에 반대해서 나타난 신학이 군주신론(Monarchianism)이다.

4. Monarchianism(군주신론)
-역동적 군주론과 양태(형태)론적 군주론이 있음 / 군주신론이란 이름은 터툴리안이 붙여준 이름.
1) 역동적 군주론
-대표적 학자 : Paul of Samosata / 양자설
  *하나님의 완전한 인간인 아들이 있다. 이 아들은 완벽한 도덕수행자(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완벽한 율법수행자)로서 인간이었는데, 하나님이 아들로 삼음 ⇨ 양자설
2) 형태론적 군주론
-대표적 학자 : 사벨리우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아버지로서의 직분(기능)과 아들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 성부 수난설(아들     의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이 두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의 비판 : “성령을 몰아내고 아버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5. 영지주의(Gnosticism)
-페르시아의 이원론 사상
-헬라의 철학(플라톤) - 이론적 체계 세움
-바벨론 점성술
-페르시아 마술
-기독교 윤리(구원론) - 주된 교리
-이태리의 윤리
1) 대표적 학자 : Valentinus. Basilides
2) 사상
➀선재적 영들의 세계. 영(aeon)들의 세계에서의 타락. ⇨ 15쌍의 aeon이 있다. 최하의 신(소피아-지       혜의 신)이 깊음의 신과 sex를 위해 찾아갔으나 너무 깊어서 타락(유산)함. - 쫓겨난 소피아
   ⇨ 선재적 상태의 영들의 세계. 선재적 상태의 타락 - Demiurge(창조주)의 물질 창조 - 소피아는           물질이 아님으로 물질세계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영 속에 잠을 잠. - 물질(인간의 육신)          에 갇혀 있는 곳 에서 해방되어 신들의 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 함.
➁예수 그리스도를 남성. 성령을 여성으로 봄
   ⇨ 예수의 성육신 부정. 예수의 고난 부인. 예수의 부활 부인 - 영은 신의 세계로 가기 때문이며, 영          은 죽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함.
➂인간을 3분법으로 봄
  -육적 - 타락한 인간
  -혼적 - 교회를 다니나 구원은 없다.
  -영적 - 그노시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
    ⇨ 기성교회를 부정함.
➃혼음종교
   구원은 영으로 받기 때문에 육적 타락은 상관하지 않음
 반 영지주의 -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6. 이레니우스(Irenaeus)
-폴리캅(사도 요한의 제자)의 제자
-요한적 사상이 많음.
-직면한 문제 - 박해문제, 영지주의 이단문제
1) 사상
(1) 전승(paradosis)
  - 사도적 전승 ➀성경과 성경의 해석
                ➁신앙규범(신앙요약) ⇨ 신조
                ➂감독의 안수와 감독의 권한
                 ⇨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것
  - 영지주의를 반박 -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성육신하여야 한다. ⇨ 성육신적 구속론
                      *고전설(속전설, 대상설) - 몸값 ⇨ 첫사람 아담이 선악과로 타락. 두 번째 사람 예수가 십자가로 구원
(2) 총괄갱신(Recapitulation, 복원) - 영지주의의 가현설을 반대하여 주장.

7. 터툴리안(Tertullian)
- 40세까지 변호사 - 기독교로 개종
-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북아프리카)
- 직면한 문제 - 영지주의 이단문제
  반박 - 취득시효(praescriptio) ⇨ 감독권에 대한 취득 시기에 대한 판단으로 영지주의를 물리침.
- 군주신론에 대한 반박
➀경세 삼위일체론(oikonomia = economy)
➁Substance(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유할 수 있는 권한) - 소유주(person)
   (one substance three persons)
   설명) 강 = 상류, 중류, 하류 / 나무 = 뿌리, 줄기, 잎 / 태양 = 빛, 열, 태양
※삼위일체론은 통일성과 개별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
- 영혼의 유전설 - 원죄설명
- 한 개체 이원 - 예수 그리스도의 神性과 人性

8. 오리겐(Origen)
※ 알레고리의 대가 - 스스로 고자됨(유혹을 받지 않으려고)
※ 책 - ‘제일 원리’ ⇨ 최초의 조직신학 책
       ‘헥사플라’ ⇨ 성경 연구책(성경연구의 대가) 
        ※ 평생에 6,000권의 책 저술. 800권의 책이름이 전해짐.
※ 성서해석방법 ⇨ 인간의 삼분법적 해석 - 영, 혼, 육적인 의미의 해석법
※ 사상
-종속설 -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께 복종하며 아버지께 속한다.
-영혼선재설 - 인류는 육체로 나기 전부터 존재하며, 육체를 가지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다.
-내세관 - 연옥설과 지옥 유한설을 주장. 죽기 전에 깨끗지 못한 영혼은 내세에 가서 영혼을 깨끗이       한 후에 들어간다고 주장. 그러므로 악인도 깨끗하게 되어 만인은 다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우주는 타락한 영혼을 변혁시키기 위한 장소이다.
-사탄도 구원받는다고 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받음.
-영원한 출생 - 완전한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성자가 영원히 탄생하신다.
※ 오리게네스의 신학적 구성은 니케아 회의 이전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성취로서 동방교회에 많      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교회는 서방교회의 후예

9. 삼위일체론
※ 313(콘스탄틴) - 323(동서교회 통일) - 324(콘스탄티노플로 수도 이전) /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콘       탄틴이 니케아에 감독회의를 개최 함.
※ 니케아(Nicaea) 회의 
   니케아 회의는 세계적인 대 회의의 효시로서 325년 5월 니케아에서 열렸다. 이 회의의 소집 동기는       동방의 부활절고 서방의 부활절의 일치를 보기 위해 모인 점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       리우스 논쟁의 종결을 위해서였다.
  -논쟁의 발단 /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와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 논쟁이 벌어짐.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과 동등하지 않고 유사할 뿐이며, 예수는 참 하나님이 아니고 같은 성품, 동일한 인격도 아니라고 주장. 그는 예수는 단지 하나님 다음이며, 세계 창조의 중재자라고 주장.
   - 알렉산더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시고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며, 절대 피조물이 아니라고 반박하여 아리우스와 정면충돌했다.
  -논쟁의 초점은 그리스도가 동일본질인가 유사본질인가 하는 것이다.
  -니케아 회의의 결과 /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추방됨.
※ 니케아 신조
아버지와 아들은 한 본질(동일 본질)이시고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낳으셨다.
⇨ 결과 :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유세비우스(Eusebius)는 패배하고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짐.
    (Arius / Eusebius of Nicomedia -유사본질)
※ 325년까지도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100% 인정하지 않았다(니케아 신조에도 ‘성령을 믿사오며’라       고만 되어 있다.)
※ 용어의 정의 
   ousios - 본질(本質) / Hypo stasis - 본체(本體)
                                ὓπο    
                                sub   stance
※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대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노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용어를 정립하여 종식
  성부- 낳으시지 않은 분, 성자-낳은 분(sunship), 성령-나오신 분(발출, 성화)
※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삼위일체논쟁 해결

10.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기독론) 논쟁
※ “예수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라고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하는 것이 기독론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 논쟁의 발단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플라톤의 심리학설, 즉 인간은 몸, 마음, 영으로 구성 되었다는 설에 근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의 영을 대신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인      성을 제한함. 즉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이 없고 신성만 있다는 것.
-갑바도기아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자아는 로고스이지만 그 로고스는 모든 인성을 섭취하고       동화하였다고 반박함.
※ 논쟁의 종결 - 이 논쟁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스는 이단으로 정죄됨.
※ 431년 에베소 회의 
-안디옥 학파
   예수 그리스도 ⇨ 로고스 - 혼 - 육  (일반인/ 영 - 혼 - 육)
                            神性      人性   ⇨ Nestorius(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의 주장
       Theotokos(마리아가 하나님을 임신)를 반대함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의 비판을 받음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으로 명확하게 구분,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한 것으로 봄
-알렉산드리아 학파
   人 - 神  ⇨Cyril의 주장(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나눌 수 없는 하나임을 주장)
   로고스는 육신이 되었고, 마리아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낳았다고 함.
   예수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주장함.
-결과 / 키릴로스의 “예수님은 한 분이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로 유배시      킴.
※ 449년 Leo(교황 레오 1세) 교서
※ 451년 칼케톤 회의(신성과 인성의 혼합도 없고 변화도 없음)

【 2 】 중세교회사(中世敎會史)

※ 고대교회사  어거스틴  중세교회사
※ 종교개혁사 : 어거스틴 되찾기 운동(354 - 430)

1. 어거스틴(Augustin, 354-430)
※북아프리카 누미디아(Numedia)의 타가스테(Tagaste, 현재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출생.
※17세에 카르타고에서 수학 ⇨ 수사학
※75세를 살면서 232권의 책으로 구성된 92개의 단행본 외에도 교리문제와 여러 가지 쟁점 등에 관하여 그리스도교 변호의 내용이 담긴 220개의 서신을 포함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1) 어거스틴과 마니교
※마니교에 입교
당시에는 신정론(神正論)의 문제가 퍼져있었으며 어거스틴도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다. 즉 기독교로 돌아가려는 그의 노력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영적인 문제와 선악의 문제였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있게 할 수 있느냐?’의 의문이었다. 즉 ‘이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 놓은 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다. 자애로워야 할 유일신이 징벌 적이고, 복수적이며, 고통을 주는 전능자라는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제 행동에서 범하고 있는 악한 행위와 그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싶은 소망사이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에 대하여 마니교는 구약 성경적 하나님 개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신정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결이 되었다.

※ 마니교(Manicheism)
-마니(Mani274-279)가 창설한 기독교적 이단이다. 마니교는 원래 조로아스터교(Zoroaster)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원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그노시스) 종교의 일파이다.
-마니는 엄격한 이원주의를 가르쳤는데, 빛과 어둠, 선과 악, 영체와 물체를 대립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들을 실체로 파악했다. 선과 악의 본질은 원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서로 분리되며, 반대되는 원리이다. 다만 악의 원리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이 세상이 혼돈스럽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악의 신과 선의 신이 투쟁한 사이에서 나온 것이 물질세계이다. 이 물질세계는 악하기 때문에 금욕, 절식, 엄격한 도덕을 강조했다.
(이들의 선악이원론에 따르면 근본원인은 신에게 까지 구해지며 결과적으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도 신의 책임으로까지 추적해 갈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론으로 사람들은 죄책감을 덜 수가 있었다.)

※9년간 마니교의 청문자의 위치에 있었다.
※마니교에 대한 회의 - 선의 신과 악의 신은 어디에서 왔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진리의 확실성은 어떻게 보장 받을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에 회의를 느낌
※수사학 모임을 가짐 - 수사학 학교를 설립. 수사학 교사로 성공하여 학문적 정치적으로 고위층을 사귀게 됨. 이로 인하여 영의 갈증을 잊어감.
※로마이 수도 밀라노에 머물면서 황제를 만남 - 문장가(문서 작성관)가 됨
※어머니 모니카의 열성적인 기독교 권유.
2) 어거스틴과 플라톤주의
※마니교에 회의를 느낀 어거스틴이 ‘플로티누스’의 책에 심취함. 
※ 신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세상의 신은 한 분이다. 세상은 이 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유출되었다고 주장.
-신(一者) ⇨ 속성(善)의 충만     ⇨     정신     ⇨     영혼     ⇨     물질(物質)
                                    넘침,유출     넘침,유출      넘침,유출
  ※단계가 내려갈수록 선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악은 없다. 악이란 선의 결핍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누스 그리고 포르프리우스로 이어진다.
※어거스틴은 주로 플로티누스의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 이 철학은 마니교의 물질주의와 회의주의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르프리우스(Porphrius)는 그의 저서 ‘에네아드(Enneads)’를 집필하여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도 함.
3) 개종
※어거스틴은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던 태도의 잘못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가 구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듣고서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마니교의 비난은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두 가지의 과정을 겪었는데, 하나는 지적인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의지적인 것이었다. 첫 번째 회심은 물질주의적 사고와 선악의 문제였다. 두 번째 회심은 의지적인 것으로 세상의 부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진리를 깨닫고도 습관 때문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이 영혼 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나고, 폭우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통곡하고 있었다. 그리고 홀로 한없이 통곡하고 싶어 정원의 호젓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나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라고 애통하여 울었다. 그때 갑자기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Tole lege Tole lege)”는 음성을 듣고 성경을 읽음 ⇨ 롬 13:11-14 / 당시에는 장, 절 구분이 없었음.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성 암브로시우스에 의하여 세례를 받음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로마의 고위급 관료인 리구리아(Liguria)와 에밀리아((Aemilia)의 주지사로 명망 높은 명문귀족이었다. 그는 34세에 밀라노 감독이 되었고,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갈 무렵 암부로니우스는 44세 였고, 어거스틴은 30세였다.
4) 수도원적 공동체를 가짐
※386년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로마 항구 ‘오스티아(Ostia)’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모니카는 56세, 어거스틴은 33세였다. 곧바로 고향으로 가지 않고 로마에 1년 동안 머물면서 ‘자유의지론’ 등 몇 권의 책을 저술함.
※388년 고향인 타가스테로 가서 재산을 팔아 구제하였고, 살던 집을 개조하여 수도원으로 만듬.
5) 감독이 됨
※391년 수도원 문제로 힙포(Hippo)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앞으로 끌려나와 힙포의 감독인 발레리우스에 의하여 사제로 안수를 받음.
※발레리우스는 서둘러 어거스틴을 감독으로 선출함(396년) ⇨(발레리우스가 죽은 후, 정식 감독으로 목회를 시작)

※ 도나티즘
1. 배경 : 로마의 혼란기인 284년 황제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여 황제권을 강화하고 정부조직을 개혁하고 군대를 쇄신하고자 했다. 이 일에 교회 공동체가 걸림이 되었다. 대대적인 교회 박해가 시작됨. 
303년 첫 포고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을 고위관리직에서 축출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노예로 전락시키며,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고, 모든 교회를 파괴하고, 성경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두 번째 포고령(303년)은 황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황실의 신들에게 제사하도록 명령하며, 모든 성직자와 직분자들을 체포하는 것.
세 번째 포고령(303년)은 투옥된 자들에게 배교하도록 함. 즉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자유를 주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으면 고통을 줌.
마지막 포고령(304년 4월 3일) 막시미안에 의해 발표됨.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만으로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
대 박해는 박해자들이 하나씩 죽어가면서 막을 내린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뱍해를 시작한지 2년도 채 못 되어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고 서민처럼 살다가 질병으로 죽었으며, 막시미안은 목매달아 죽었고, 갈레리우스는 311년 박해를 중지하는 칙령을 내린 후 5일 만에 죽었다.
2. 도나투스 분파 발생
-대 박해 이후 교회에서는 심각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남. - 이유는 박해 중에 신앙을 지킨 이들과 배교자들 사이의 갈등 때문이다.
-박해 때에 그리스도교를 배교하는 증거로 성경을 내 놓으라 함(Traditores, 건내주다=배교자.)./ 박해시에 신앙을 지킨자들을 ‘고백자(Confessor)'라고 불렀으며, 성경을 넘겨준 자들을 ’배반자(Traditor)'라는 칭호를 붙였다.
-교회 지도자들 중 일부는 박해 동안에 성경을 내놓고 박해를 피했다는 이유로 기소됨. - 어떤 이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성경이 아닌 다른 이단 문서를 내 놓았다고 주장함. / 당시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멘수리우스’가 여기에 속했다. 당시 키프리안 신학의 순교자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던 많은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이때부터 교회의 분리가 시작됨.
-311년 멘수리우스가 사망하자 312년에 카르타고의 부감독인 캐실리안이 감독으로 선출되어 다른 두 명의 감독에 의하여 감독으로 임명됨. - 이들 안수자들이 배교자들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감독직 안수가 무효라고 반대함. 
-이렇게 발생한 도나투스 파는 31년부터 40년 동안 도나투스가 이끌었다. ‘도나투스 분파’라는 명칭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붙여짐.

※교회론에 대한 도나투스와 어거스틴의 견해
-도나투스 ⇨ 교회는 순결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교회의 거룩성도 인간에 의해서 구별된다(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혹은 신앙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강도. 기독교를 부패로부터 막으려는 열렬한 종교적 열심이 있었다.)
-어거스틴 ⇨ 교회의 거룩성은 보편성이다. 즉 교회는 양과 염소가 섞여서 사랑을 나누는 곳이다. 교회는 사도성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일체성이 있어야 한다.

-도나투스의 과격파인 키르쿰체리(Circumcellinos)의 과격행위(기존교회를 부인, 분리주의 - 약탈과 살인)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 처음 의도는 순수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한 분리주의자들이었다.
6) 교회론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그의 교회론을 정립함.
※서방신학의 전통을 계속 발전시켜 나감. - 서방 교회론의 역사에서 최초로 종합 정리한 신학자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있어서 근본 사상은 “교회는 하나”라는 사상이다.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라고 정리한다. 어거스틴은 “몸과 머리는 한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그가 몸이 없으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몸소 몸을 낮추어 우리와 더불어 온전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없이도 온전하시고 전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적인 그리스도이며, 한 사람, 온전한 사람, 한 인격이다.”라고 한다.
※교회의 일치성
-도나투스 분파에 의하면 교회는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로 구성되며, 오직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박해 시에 배반한 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배반자들에 의하여 감염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나투스파의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교회의 포식은 통일성과 보편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만 있으며, 그리스도도 하나요 신부도 하나이다.”라고 함.
-교회는 신앙의 통일성을 가지며 사랑의 일치성을 가지는데, 어떤 사람이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이단자는 면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의 통일성에 위배되면 역시 분열주의자나 이단이 된다. 그러나 이 통일성의 원리는 유기적인 것이지 제도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순교자라 할지라도 이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통일을 깨뜨리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으로 묶여져야 하고 그 사랑은 수많은 죄를 덮어준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자는 사랑이 결핍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결핍된다.
※교회의 거룩성
-교부들은 교회를 “거룩한 창녀”라고 부름.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 죄인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자르는 것이다.”함 ⇨ 어거스틴은 교회 자체의 거룩성을 강조함.
-교회의 거룩성은 구성원이나 성례 및 개인적인 성화의 산물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성례는 그리스도의 행동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실제에 있어서의 교회는 성도의 개인의 여부와 형편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같은 요인과는 관계없이 거룩하다. 교회가 사람들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조직된 신비적인 교회는 겸손 속에 성장되어지고 있으며, 구속의 행동을 통하여 볼 때에도 교회의 성결과 거룩성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 능력에 힘입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결은 무한하다.
※교회와 성례전
-어거스틴은 믿음과 회개를 성인에게 있어서의 세례의 필수요건으로 봄.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은 버림을 받을 것이지만, 보호자의 보호를 받아 세례를 받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교회의 신앙이 바로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함.
-세례는 죄책(guilt)으로서 원죄(original sin)를 모두 제거하지만 본성의 부패성(corruption)은 재거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된다.
-성례전의 본래 시여 자(施與者)는 그리스도 자신이므로 성례의 타당성은 시여 자의 가치에 좌우되지 아니한다. 또한 교회의 일꾼의 가치나 수령자의 가치에 좌우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성례의 구원의 효과는 수령자의 신앙에 의지한다.
-성례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이 성례를 통하여 오기 때문이다. 성도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하여 신비적인 체험을 하게 되며 신앙의 결의가 굳어지고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
7) 인식론(認識論) / 신(神) 인식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모든 지식의 근거'가 된다고 했으며,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a divine illumination)’이다.
※기억의 신비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내 안에는 육체와 영혼이 있다. 전자는 밖에 있고 후자는 안에 있다. … 그러나 나는 내 ‘속에 있는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 … 즉 속에 있는 사람인 나, 영혼인 나는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또한 전 우주(덩어리)에게 나의 하나님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 우주 역시 ‘나도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고 대답했다.”
-어거스틴은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이 힘(감각)을 초월하여 단계를 밟아 자신을 만드신 그분에게로 오르고자 했다. 그러자 그는 “기억이라고 하는 평야와 넓은 궁전에 오게 되었고, 그 속에서 경험한 것들을 꺼내어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자신의 관점(감각의)을 통하여 기억이라는 창고에 들어가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각한 사물 그 자신들이 그대로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각된 사물의 영상들만이 들어가 간직되어 있다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생각에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미래의 행동과 사건과 희망을 추측해 보고, 이 모든 것을 현재적인 사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말할 때 그 순간 내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영상들이 같은 기억의 창고로부터 나와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만일 영상들이 거기에 없다면 그것에 대하여 말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오, 나의 하나님, 이 기억의 힘은 위대합니다. … 누가 그 깊이를 재어 보았습니까? 그래도 그것은 내 마음의 힘이므로 내 본성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전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자기 자신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좁은 듯합니다. 그러면 포괄될 수 없는 부분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마음 안에 있지 않고 마음 밖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이 왜 자신을 포괄할 수 없습니까?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내 마음은 어리둥절해져서 경의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고백록)
-오, 주님, 나는 당신을 찾고자 할 때 내 기억 밖에서 찾지 않고 내 기억의 넓은 광장 안에서 두루 살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부터 내 기억에 새겨진 당신의 모습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당신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진리를 찾은 그곳에서 진리 자체가 되신 나의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게 된 때부터 진리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계속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 안에서 기뻐할 때에 당신을 찾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거룩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당신께서 자비로서 내 궁핍함을 굽어 살피시고 나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고백록)
-어거스틴은 “기억 속에서도,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인식론(認識論)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비물질적인 정신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직관적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오류를 범할 때나 의심할 때에 있어서도 사람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가 있다.”고 한다. 
-‘나’에 대한 지식은 감각적 경험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직접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견해를 “설령 내가 오류를 범한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라는 짧은 구절로 표현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인식설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이론적인 회의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거스틴은 비록 과학의 존립을 인정하고 시간적 현세적인 사물들에 관한 과학적 탐구를 위하여 여지를 마련하였지만 그 자신은 이러한 지식을 쌓는 데 정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지혜라고 하는 좀더 높은 종류의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신앙의 결과인 동시에 성취로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실재들이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인식 3단계
1단계 ⇨ 감각적 단계 : 동물, 인간이 공동 소유
2단계 ⇨ 이성적 단계 : 인간의 고유적 단계 - 영원과 물질적 단계 사이에서 지식의 단계
3단계 ⇨ 관조적 단계 : 영원자와 인간이 하나로 합일 - 지혜를 얻고 행복을 얻는다.
8) 창조론(플라톤 적)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한꺼번에 창조라는 시점에 하셨다.
-예를 들어 / 모형 = 씨앗적 이성(Ratio Seminales) / 시간-한꺼번에, 조건-차이가 나도록
-모든 것이 창조의 시점에 한꺼번에 창조되었다. 어떤 시점에 씨앗이 터지듯 나타날 뿐이다.
-시간개념(헬라적)
크로노스 시간 - 직선적 시간 / 과거 - 현재 - 미래가 있는 유한적 시간
카이로스 시간 -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적 시간
9) 은총론
※ 마니교의 이원론적 결정론을 반대하면서 시작됨.
※ 펠라기우스의 주장 - 모방설(죄를 모방한다.)을 주장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노력하면 선하여 질 수 있다.
-원죄를 부정 - 사람은 날 때부터 여러 은총을 받고 태어난다. / 유아세례의 불필요성

         선을        ⇨ 창조적 은총(본래적 은총)
         계속        ⇨ 습관의 은총이 덧붙여짐
         행하면     ⇨ 가르침의 은총, 계시의 은총
           [결국 ]   ⇨ 죄사면의 은총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이 이루어지고 세례 후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온전한   능력과 의무를 가진다고 함.
※ 어거스틴의 주장 - 죄의 유전설을 주장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있는가? 사람이 은총 받을 행위를 해서 은총을 받는다면 그것은 은총이 아니다. 그것은 보상(reward)이다. 은총 받을 행위를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이 진정한 은총(grace)이다.
-자유의지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단지 죄를 지을 가능성만 가지고 죄의 노예로 태어났다. 이러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펠라기우스-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받는다.)
-아담은 죄로 인하여 죽었다.(펠라기우스-아담은 본래 죽을 사람으로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기도 죄가 있다.(펠라기우스-새로 태어난 유아는 죄가 없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펠라기우스-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나 율법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선행적 은총의 단계 - soft violence(부드러운 폭력) / 하나님께서 선행을 지향하도록 부추기신다.
  후속적 은총의 단계 - 선행적 은총 후에 후속적 은총으로 의인화(justification)의 은총이 주어진다.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유아세례가 필요하다.
-원죄를 교만으로 봄 - 세례로 사면된다.(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피조물이 한계를 넘은 교만이라고 함)
-그리스도 중심적 은총론, 그리스도 절대적 은총론,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 결국 예정론을 주장하게 됨
※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서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 529년 ‘케사리우스’가 주최한 ‘오렌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의해서 ‘인간은 원죄 아래 있을 뿐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으므로 우리는 성령의 부음을 받아 성령이 우리 안에 작용해야 한다.’는 설이 확정되었다. 어거스틴의 중심사상이 대부분 승인되었지만 은총의 불가항력설이 희미해지는 등, 그 강조의 정도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2. 수도원 운동
※ 운동의 시초는 이집트인 ‘안토니우스’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혼자 굴속에 들어가 금식하며 은둔생활을 했는데, 이 사람을 따라 다닌 자가 많아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 이집트인 ‘파코미우스’가 정식으로 나일 강변의 ‘타벤나이’에  수도원을 창설했다. 집단적으로 규칙 있게 예배 했으며 복장을 통일하였고 수녀원도 세웠다. 이것이 소아시아로 넘어갔다.
※ 소아시아에서는 ‘바실리우스’가 수도원을 창설했다. 이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반대했으며, 고아나 소외자에게 봉사하는 수도원이었다.
※ 4세기 중엽에 수도원은 서방으로 전파됨. 마르티누스가 리용에, 후시우스가 밀라노에, 캇시아누스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세웠다.
※ 베네딕트는 529년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이 서방 수도원의 대표적인 것이다. 베네딕트가 세운 수도원의 이론이 서방 수도원의 전형이 됨.
-수도자들은 철저히 순종해야 함 - 즉각적이며 자발적인 순종
-영속성 - 한 번 들어간 수도원에서 끝까지 머물러야 함.
-육체적 노동의 의무
-과오 - 두 번의 권고 - 공개 비난 - 격리 - 추방
-하루 7번의 예배 (조과부터 종과까지 - 7시 취침)
※ 수도원의 창설 원인
-사회 부패 비관(소극주의)
-빈민 해소를 위하여(극기주의)
-개인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교회의 박해를 피하여
-동양의 이원론 사상의 영향
※ 수도원 운동의 영향
-자급자족 운동 - 영농에 큰 영향을 끼침 / 영농의 기술 등.
-시간개념이 생김 -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 / 당시에는 시간개념이 없었음.
-학교가 생김 - 수도원 학교로 인하여
-수도원이 병원과 여관의 역할을 함.
-학문의 전달
-선교, 출판, 인권운동 등
-악영향 - 결혼의 기피, 금욕으로 구원을 조장하는 미신적 행위 성행.
※ 유럽으로부터의 영향
   -고백제도의 전환
      공 고백   -------------->   사 고백
                        면죄부 발생(육체적 정신적 고통-죄의 대가-을 돈으로 대치)
   -유럽에서 로마로 학자들이 이동함.

3. 신약성경 확정 과정
1) 성경의 필요성
-사도들이 죽은 후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증인들이 사라지므로 사상적인 혼란이 생겼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기록한 문서가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교 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신약성서가 필요했다.
-로마 박해에 대항하여 포교활동을 하는데 필요했다.
-재림신앙이 후퇴되면서부터 도덕적인 타락이 생기기 시작하자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올바른 교훈을 적은 성경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이단들이 많아 교인들을 혼란시키자 이단의 퇴치를 위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힌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마르키온이 성서 Canon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대적하기 위한 성경이 필요했다.
2) 성경의 형성과정
-무라토리 단편, 페쉬다(시리아에서 사용), Canon이 있었는데 이를 종합하여 만들기 시작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인정했다.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 3서가 정경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되었다. 이때 이레니우스는 세 가지의 기준을 정했다.
  성경의 역사성(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해 섰는가?)
  사도의 권위(사도가 섰는가? 사도와 관계된 자가 섰는가?)
  그 내용의 품위성(당시의 교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 27권이 성경으로 확정되었다.
3) 사도신경
-사도들의 교훈을 집약하여 하나의 신앙고백 형태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을 정해 놓은 것으로, 기독교회의복음의 유일성과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적 전승을 뜻하고 있다.
-12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작성하여 베드로가 로마에 가지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로마에서 시작되어 ‘로마신조’라고도 한다.
-사도신경은 세례 받을 후보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오래 동안 사용되었다.
-아리우스, 영지주의 등의 이단이 일어남으로 정통 교리를 표시할 문자를 넣어서 381년 경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사도신경 전문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사도신경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4. 십자군 전쟁(후기 중세시대)
1) 십자군
※ 원인
① 10-11세기에 심한 흉년으로 사람들은 삶의 현장보다 내세 지향적으로 흘렀고, 성지에 대한 귀중성을 강하게 느꼈다.
② 그런데,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 교도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③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④ 또한, 계속적으로 기독교 지역을 점령해 들어오는 이슬람 교도들을 막고 기독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군 운동을 일키게 된다.
⑤ 동방 제국 황제들은 성지를 이슬람으로부터 회복해 달라고 로마 교황청에 구원을 요청했다.
⑥ 십자군 전쟁은 약 250년간 8차에 걸쳐 일어났다.
※ 십자군 운동의 세 가지 목표 실패
① 예루살렘 성지 회복 실패
② 이슬람 세력을 동방 교회 지역에서 추방하는 것 실패.
③ 동. 서방 교회의 일치에 실패.
※ 십자군의 실패원인
① 교횡에게 군대의 통솔권이 없었다.
② 출정한 왕. 기사. 귀족들의 목적이 서로 달랐다(신앙의 목적, 장사의 목적, 공명심, 관광객 등)
③ 종교적 열정이 식고, 물질 탈취의 목적으로 기울어짐.
④ 십자군은 오합지졸이었고, 이슬람 군대는 훈련된 군사였다.
※ 십자군 운동으로 생긴 종단
① Military orders (전투 종단) ➡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기 위하여 전투하는 자들(청빈, 순결, 복종을 서약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보냄).
② Templars (성전 종단) ➡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살면서 순례자를 보호하는 자들.
③ Hospitallers (병원 종단) ➡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본부를 두고 순례자들의 병을 치료함.
※ 십자군 운동이 교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
① 기독교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 바뀜(초대 교회의 인간을 죽일 수 없다는 사상이 하나님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인식이 됨.)
②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교역(시장)이 확대 됨.
③ 기독교인의 잔인함을 보여줌으로써 이슬람교도의 전도(개종)에 어려움.
④ 기독교인은 이슬람인들을 개종시키기보다 멸종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됨.
⑤ 대 사면으로 중세 신학에 큰 영향을 줌 ➡ 면죄부.
⑥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게 됨.
⑦ 지리상의 발견이 확대됨.
⑧ 항해술의 발전, 도시 국가의 상업으로 해상 무역이 활발해짐
⑨ 제3 계급인 도시인이 나타남 - 상업을 하는 도시인이 생김(자본의 축척).
⑩ 스콜라 신학과 대학이 생김.
⑪ 이슬람 세력의 서쪽 진격이 좌절됨.
⑫ 구라파에 신지식이 전해짐(아라비아 숫자가 소개됨).
⑬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많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하여 고전 문학 연구가 성행함.
※ 십자군 운동의 교훈
※ 기독교의 전도가 영토적인 전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 구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5. 동서 교회의 분리
1) 일반적인 원인
-정치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에, 서로마 제국은 프랑스에 분리되었다. 서로마제국 몰락 후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 자리했다.
-문화적으로 동방은 희랍어를, 서방은 라틴어를 사용하여 언어가 통일되지 못했다.
-로마 교황이 동로마 제국을 무시하고 샤를레망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웠다.
-사상적으로 동방은 교리를 중시하였고 서방은 제도를 중시하여 교황 제도를 갖고 있었다.
-동로마 교회가 사색과 철학, 형이상학적 신학을 형성한 반면, 서로마 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구원, 교회 자체의 구원을 강조했다.
-교리적인 면에서, 동방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했고, 서방은 성자에게서도 나온다고 주장했다
-동방교회는 성상숭배를 반대했고, 서방교회는 찬성했다.
2) 직접적인 원인
-동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이그나티우스를 파면하고 후임으로 포티우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포티우스를 반대하고 이그나티우스를 인정하고 지지했다.
3) 결과
-포티우스 사후, 동방교회는 콘스탄노플 대주교 취임시 로마교회에 신앙고백서를 봉정하고 중대사를 재가받는 등 화해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1054년 케룰라리우스 때에는 로마교황의 오류를 비난 공격하므로 교황 레오 9세가 그 해 7월 16일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였고 케룰라리우스도 교황을 파문에 처했다. 결국 동방과 서방교회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6. 중세의 교파들
1) 카타리파
-프랑스 남부, 스페인 북부, 이태리 북부를 중심으로 나타난 새 마니교파이다.
-이원론을 주장했다. 선한 하나님의 두 아들이 하나는 예수이고, 또 하나는 사탄이라 했다.
-최대의 죄는 인간생산이라고 하며 회개, 금욕, 성령의 세례를 특히 강조했다.
-성례를 받으면 완전자가 되지만 그 은총을 잃지 않기 위해서 결혼, 맹세, 전쟁, 재산 소유를 금해야 함.
-세례를 받지 못한 자가 죽으면 다시 살아나 구원을 받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시편과 예언서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거부하고, 요한복음을 가장 중요시 함.
-물질은 악하다고 보며 예수의 십자가를 부정했고 가현설을 주장했다.
-결국 로마의 억압을 받아 흩어짐.
2) 발덴파
-부유한 상인 발도우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후 자기 재산을 팔아  구제하며 전도운동을 벌였다.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설교할 권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교황 루키우스 3세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 받은 후 독자적인 파를 형성했다.
-신약성경을 중시했고 월,수,금은 금식했으며 서약과 피 흘리는 것을 거부했다.
-주의 만찬을 강조했으며 죽은 자를 위한 미사나 기도는 부정했다.
-주기도, 식탁 기도 외에는 다 부정했고, 연옥설도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알프스 계곡 서남부에 남아 있다.

7. 스콜라 신학
1) 성격
-Scholar란 말은 샤를레망 대제의 궁정학교 명칭에서 유래된 듯하다.
-신앙과 지성의 조화, 즉 종교와 철학의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기독교 + 희랍철학 + 교회 교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했다.
-신학을 그 시대사조에 맞추어 재조정했다.
2) 가치
-놀랄만한 지적인 구조의 광대와 신학 방법의 대 진보를 이루었다.
-기독교 진리를 합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논증하고자 했다.
-진리 해설상의 오류 방지에 도움이 되었다.
3) 약점
-역사적인 평론을 경시하고 터무니없는 철학의 기초 위에 신학 체계를 수립했다.
-성경해석에 전설적인 해석방법을 시도했다.
-성경이나 교회 역사에 근거 없는 설을 도입했다.
-형식적 논리를 과도하게 구사하여 궤변으로 흐른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단을 뒤집어 놓음이 정통이라는 독단을 낳았다.
4) 신학자
※ 안셀름(Anselm, 1033-1109)
-11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다.
-생애 : 이탈리아의 아오스타(Aosta)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도했다. 1093년 켄터베리 대감독이 되었고 그레고리 7세에 동조하여 국왕과 충돌했다. 그 일로 인하여 국외로 추방되었다가 헨리 1세 때 소환되었다. 1109년 영국에서 사망했다.
-사상 : 플라톤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에 섰다. 그는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신앙이 이성에 앞서는 것임을 암시한다.
-속죄론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인류의 죄는 한없이 크지만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은 이것을 덮는데 능히 족하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영향을 끼쳤다.
※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7-1274)
-스콜라 철학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체계 있게 완성시킨 인물이다.
-생애 : 아퀴스 고을에서 백작의 아들로 출생. 1243년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공부했고, 파리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은 후 쾰른에서 교수했다. 1257년 파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274년 리용의 기독교 회의에 참석하려고 가던 중 4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상 : 신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과 카톨릭 교회 교리를 통일, 종합했다. 그의 ‘신학총론(Sum of Theology)’은 셋으로 구분되어 각각 하나님, 인간,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논하고 있다.
-신학의 연구 목적을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기원과 미래, 운명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신론 : “신은 제1원리요 가장 참되고 완전하신 존재이다. 신은 절대적 본질이며 만물의 근원이요 종이시다.”라고 함.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는 완전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칼케톤 신조를 따랐다.
-인간의 최고선을 명상과 영적 교제로 신을 바라보며 그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은혜는 아무렇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을 통하여 온다고 했으며, 성만찬은 화체설을 인정했다.
-내세관 : 악인은 죽은 후에 곧 지옥으로 가며, 교회가 제공한 은혜를 받은 자들은 곧 천국으로 간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를 완전히 받지 못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연옥으로 가서 얼마의 훈련과 징계를 받고 그들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으로 다시 하나님 나라로 간다.
-교회관 : 카톨릭 교회는 구원의 기관이며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카톨릭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 교황무오설 주장.

8. 중세의 신비주의
1) 특색
-스콜라 철학이 추리를 중시한 반면 신비주의는 직관을 중시한다.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
-독일의 신비주의자는 철학적이고 프랑스의 신비주의자는 시적, 감정적이다.
2) 인물
※베르나드(Bernard, 1091-1153)
-프랑스의 퐁텐느(Fontaines)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 22세에 씨토 수도원(cistercian order)에 입문함. 1115년에 12명의 수도사와 함께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의 노력과 원조로 제2회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
-신학에 있어서 그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아벨라르의 자유사상과 싸웠다.
-사상은 ‘단지 무한자에 대한 동경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사모하여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적 신비였다.
-윤리적 원리는 겸손과 사랑으로, 가장 큰 명제는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초점이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당하심은 그의 철학과 신학의 총체이며 정수였다.
※에크하르트(Eckhart, 1260-1327)
-독일 최대의 신비주의자이다.
-루깅기아 귀족 출신으로 15세기에 도미니크파 수도원에서 수도했다.1302년 신학석사에 되었고, 1314-1322년 독일의 가장 유명한 전도인이 되었다.
-도미니크파로, 스콜라적 신념을 소유했으며, 철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승, 신학에는 아퀴나스를 따랐으나 강조점은 달랐다.
-인간적인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과 그 배후에 있어서 기초가 된 신성과를 구별했다.
-“사람은 자기 영혼 속에 신이 나시도록 노력할 것이니 그것이 곧 신과 완전히 사귀는 것이며 내재의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노력의 표본이 바로 예수이며, 그 예수 안에 신이 완전한 인간성을 입고 거하셨다고 보았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를, 주관을 성부, 객관을 성자, 사랑을 성령으로 말했다.
※요한 타울러(John Tauler, 1300-1360)
-에크하르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로 실천적 신비주의자.
-1315년 도미니크 수도원에 입문하여 쾰른에서 배우고 에크하르트의 감화를 받음.
-종교의 내적 생명력을 강조하여 외적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비난함.
-설교는 복음적 사상이 짙었으며, 사상은 실재적이어서 죄의 관념이 강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회개를 가르치고 자기희생과 사랑을 강조함.
※루이스브리크(Ruysbroeck, 1294-1381)
-브루셀 근교의 쏘니에 있는 그린탈 수도원에 은둔하여 신비적인 논문을 저술함.
-그는 철학적 사상이 아닌, 깊고 순수한 정서를 소유하여 말년에 많은 존경을 받음.
-내면의 생활과 명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일치와 결합을 주장함.

9. 탁발 교단들
1) 발전 원인
-풍부한 수입을 즐기며 교회를 대강 운영하는 성직자들의 무사안일주의와 세속적 향락에 파묻혀 백성을 멀리하는 폐단이 심했다.
-지금까지 수도사들은 청빈, 금욕생활, 고행주의, 신앙적 경건주의만 고집하고 전도와 구제 사업을 등한히 함.
-백성의 입장에서 전도와 구제를 하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맛보고자 했다.
2) 유래
-320년경 파코미우스가 허미트 수도원을 설립.
-528년 베네딕트 수도원 설립.
-1115년 베르나드가 클레르보 수도원 설립.
-1209년 프란시스가 프란시스 교단 설립.
-도미니크가 1215년 도미니크 교단 설립.
-탁발교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프란스시와 도미니크 교단이며, 교황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함.
3) 대표 종파
※프란시스회
-프란시스는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출생하여 1226년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 9세에 의하여 ‘성자’의 칭호를 받음(현재 ‘성 프란시스의 기도, Prayer of St. Francis'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19세기 기도문의 저자는 아님).
-3인조 전도대를 조직하여 걸식 수도를 하며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했다.
-많은 동조자가 생겼고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정식으로 교단을 인정함.
-1216년 명칭을 ‘소 형제단’으로 개칭함.
-1212년 그의 이상을 듣고 찾아온 아씨시의 젊은 상속녀 ‘클레어’를 만난다. 프란시스의 도움을 받아 여성판 프란시스 수도원을 세우고 ‘청빈 클레어회(Poor Clares)'라 명명함.
-사도처럼 청빈했고, 농사를 도우며 나환자를 돌보며 선교했다.
-교황 레오 10세 때 신령파, 온건파로 분리됨.
※도미니크 파
-도미니크는 1170년 카스틸의 칼라로가에서 출생.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정식 교단으로 인정받음.
-교육을 강조하여 여러 지방에 유학생을 많이 보냄.
-이들의 활동분야 중 대학을 중심으로 했으며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서유럽의 중심적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대표적인 신학자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금욕주의와 주지주의(主知主義, 지성적· 합리적·이론적인 것을 중시하는 입장)의 경향을 띰.
-묵상보다 활동, 의식보다 설교를 강조했으며 학문과 전도, 교육에 힘썼다.
4) 탁발교단의 영향
-민중의 벗이 되어 일반의 종교생활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줌.
-많은 신학자를 배출하는 등, 학문과 대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침.
-스페인, 헝가리, 아시아에 탁발 수사들을 파송하여 선교 사업을 벌였고, 사라센 족속의 개종을 도모함.

10. 중세 교회의 성격
-로마 교황의 주장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짐.
-1215년 라테란 회의에서 화체설이 결정됨.
-연옥설이 일반적으로 인정됨.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자에 대한 기도가 성행함(면죄부의 효과).
-마리아 숭배가 상당히 유행함.
-비밀 고해 제도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짐.
-7 성례전이 인정됨(영세 견신성사 고해 성체 종부 혼배 신품)

11. 문예부흥
1) 발달 원인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과의 교통의 길이 열려 각지의 문화가 수입됨.
-봉건제도가 몰락하고 자유 상업 도시가 발달하여 문예운동이 장려됨.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많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하여 고전문학 연구가 성행함.
2) 특징
-중세 교황의 권위에 반항하고 비평을 중시한 지적 운동이다.
-개인주의를 숭상하여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동경함.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간적, 현세적이다.
3) 영향
-고전의 언어들이 인쇄술 발달과 함께 재연구되기 시작함.
-여행, 탐험, 발견, 무역 및 상업을 조장함.
-이로 인하여 도시가 부해지고 도시 인구가 급증함.
-공업 혁명을 초래함.
-나침반의 개량, 종이 사용, 인쇄술 발달, 화약 제조법 발명이 이루어짐.
4)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
-인쇄술 발달로 교부들의 저서가 많이 나와 종교개혁의 여건을 만들었다.
-성서 주해가 많이 생기게 되었고 성서를 문학적,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이 생겼다.
-제도에 대한 반항으로 개인주의가 생겨남.
5) 대표적 인물
-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토마스 모어, 에라스무스.

1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1)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8-1384)
※생애
-1330년경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교수와 궁정 목사를 지냄.
-1378년 ‘성경의 진리(The Truth of Holy Scripture)'라는 저서를 통하여 성경이 최종의 규범이며, 교회, 전통, 종교회의, 심지어 교황 자신도 시험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함.
-1379년 ‘교황의 권력(The power of the Pope)’에서 교황제도는 인간에 의해 세워진 제도이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은 아니라고 논증함. 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 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모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함.
-1382 - 84년, 성서를 Vulgate으로부터 일상 언어로 번역하여 보급하고 성경읽기를 장려함.
-1415년 콘스탄스 대회에서 위클리프의 죄상을 267항목이나 나열하고 그의 모든 저서를 불태웠으며, 그의 유해를 발굴하여 화형에 처하고 재를 강에 버렸다.
※사상
-성서만을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제반 교회의 악습과 감독의 사치 풍조, 걸식 수사의 폐단을 공격했다.
-화체설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교황정치를 부인하여 교황의 주장은 성서에 비추어 볼 때 악한 것이며, 교황의 구원도 일반인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고 교황이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함.
-성직자의 독신을 반대했다.
-위클리프의 교훈을 따라 조직된 ‘미미한 전도자’라 불리는 롤라드 전도대의 활약이 활발했다.
-위클리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지역은 중부 유럽과 보헤미아였다.
2) 존 후스(J. Huss, 1361-1415)
-옥스퍼드 유학생으로 재학 시 위클리프에게 공부했으며, 귀국하여 보헤미아 지방에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파했다.
-교회의 진정한 머리는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며 신약성경이 교회의 법칙이라 주장함.
-1412년 요한 23세의 면죄부 증여를 반대하며 교황은 무력을 사용할 권리가 없고 돈 지불이 진정한 사죄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함.
-1415년 정죄되어 화형 당함.
-후스가 죽은 후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남.
-반란이 카톨릭과의 싸움으로 변했는데 온건파는 가톨릭으로 돌아가고 강경파는 그 후 모라비아에 모여 진젠돌프 경건주의의 기초를 이룸.
3)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출생하여 볼로냐의 수도원에 들어가 성서와 어거스틴의 저서를 탐독함.
-플로렌스에서 예언자적 설교를 감행하며 교회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올 것을 강조하여 회개를 촉구했다.
-알렉산더 6세는 설교 금지령을 내리고 수도회 관구의 합동을 명하였으나 불복했으며 결국 파문당함.
-교황 선거에 있어서 교황의 부정을 이유로 퇴위를 결정할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1498년 화형을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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