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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 - 신약성서 총론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4,628회 작성일 2000-11-06 21:42
신약성서 총론

제 1 부 신약 시대의 배경

1. 팔레스틴 유대교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1)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팔레스틴의 정 치약사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 군대의 예루살렘 침입. 바벨론 포로. 주전 537년 유대로 귀환, 도착.성전 재건, 주전 515년 성전 완공, 주전 334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로 진군해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주전 331년). 페르샤 왕 다리오를 격퇴.
※마카비의 반란
주전 142년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 2세는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정치적 독립 허락, 주전 63년까지 약 80년간 유대 국가의 자유 지속, 그러나 유대 국민들 가운데는 국민을 하나의 강력한 통일체로 결합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이 없었다. 국민들은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말다. 이 중 한 편은 마카비가문이 제사장겸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지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우선 정치적 권력을 겨냥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사두개파로 알려졌다. 164년 성전 재봉헌 때까지는 유다 마카비를 지지했으나 그후에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오직 종교적인 자유뿐이라는 이유로 지지를 철회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파이다. 정치 권력은 사두개파에 있었다. 주전 63년에 폼페이는 예루살렘 함락.

2) 로마제국의 행정구역 제도
로마제국은 많은 종족과 민족들을 통일하여 하나로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법률과 정치에 대한 천재적이 실력에 의해 로마는 거의 500년간 비교적 안정된 질서를 유지 할 수 있었다.

3) 팔레스틴의 통용어
예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의 꼬데가에는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패가 부착되 있었다. 즉 팔레스틴이 여러 나라 말이 통용되던 국제적인 나라였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라틴어는 정복자들의 공용어이고 헬라어는 팔레스틴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었으며 대다수 유대인들의 모국어는 아람어 이다.

2. 팔레스틴 유대교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

1) 중간 시대의 유대 문헌의 개관
유대인들의 지적, 종교적 삶의 틀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상과 이상들은 모세의 율법과 히브리 예언자들의 문헌에서 나왔다. 권위 있는 즉 정경시되는 구약의 문헌들과 대조적으로 중간기의 저서들은 외경이라 불렸다. 중간 시대의 외경과 위경 문헌들이 중요한 까닭은 이 문헌들이 기원 직전의 유대인의 생활과 사상의 발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2) 팔레스틴 유대교 안의 종파, 파당 및 계급
(1) 바리새파
이들은 일찍이 세속적이고 종교에 무관심한 동포들과 구분하여 "하시딤"이라 불려지던 세대들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이 부류는 아마도 셀류시드 왕조가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려 했던 헬라화의 과정에서 반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2) 사두개파
"사두개"란 말은 사독이란 이름에서 온 것으로 짐작된다. 셀류시드 왕조에 의해 부과된 팔레스틴의 헬라화 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외세와 접하게 된 자들이 바로 사두개파 계열의 대제사장들이었다.
(3) 엣세네파
단순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이들은 엄격한 사람에게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자기 재산은 공동 재산에 넣어야 했다. 중요한 종교적 훈련으로는 의식적인 씻음, 세례, 정해진 여러 기간 동안의 기도 등이다.
(4) 헤롯당
헤롯왕가의 통치를 지지하고 따라서 자연히 헤롯 왕조를 지탱케 하는 권위를 지녔던 로마인들의 통치를 지지하던 영향력 있고 고위직에 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5) 셀롯당(열심당)
주후 6년 로마인들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리 사람 유다가 창설했다. 황제에게의 조공을 반대했다.
(6) 평민
팔레스틴 유대인의 약 90%는 위의 어느 종파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평민들이다.

3) 서기관과 랍비 : 그들의 임무와 교수법
서기관들의 대부분 바리새파 소속이었다. 서기관들의 전문 업무는 율법 자체의 보다 세심한 이론적 발전, 제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 법적 결정을 선언함으로써 실제로 집행하는 일이다.

4) 성전과 성전 의식
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하나님 예배의 구심점이었다. 주전 1,000년경에 솔로몬이 건축한 이 성전은 주전 586년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파괴되었다. 스룹바벨이 주전 515년에 성전을 복구하였고 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웅대한 규모로 성전을 재건하였다.

3. 그리스 로마 이방주의의 철학적 종교적 배경

1) 그리스 - 로마 세계에서의 철학 학파들
(1) 플라톤 주의
그리스 - 로마 세계에서 성행하던 수많은 철학의 학파들 가운데서 첫자리의 영예는 플라톤과 관련된 철학 체계에 주어지고 있다. 플라톤 주의의 주된 학설인즉 참된 실체는 감지될 수 있는 물체에서가 아니라 각 부류의 물체들 배후에 존재하는 그리고 비실체적인 그림자로서의 감지될 수 있는 물체들의 본체가 되는 "이데아"혹은 "형상"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에피큐리안 주의
추상적인 용어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그는 평범한 인간의 상식에 호소했다. 그는 내적 감정들과 감각의 지각이 항상 참되고 신빙할 만한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감정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3) 스토아 철학
스토아주의는 종교 및 도덕적 자질의 개발을 장려했다. 제논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주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또한 맹목적인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다.
(4) 견유학파
이 학파의 창설자는 안티스테네스였다. 견유학파는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생활의 단순성을 가르쳤다. 인간은 극도로 근검을 실천함으로써 외부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진정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5) 기타 철학 체계들
회의론자들, 절충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2) 그리스 - 로마 세계의 밀의 종교
(1) 엘류시스 밀의 종교
이 종교는 고대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포네 여신을 기념하였다. 이 여신은 "풍작의 여신"인 데메케르의 딸로서 플루토가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 지옥을 데려간 여신이다.
(2) 미드라 밀의 종교
신도들은 동굴 속에 있는 조그만 예배실이나 성소에서 혹은 반지하 토굴에서 모임을 가진다.
(3) 이시스 밀의 종교
이시스는 이생과 내세에서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자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4) 디오니수스 밀의 종교
디오니수스는 포도의 신이요 동물들의 생명의 신이다.
(5) 시벨레 밀의 종교
이 신화는 시벨레의 배우자였던 젊은 목동 아티스가 죽었다가 이 여신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 2 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4.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자료

1) 비기독교적 자료들 - 유대 및 이방적 자료들

(1) 예수님에 관해 언급한 유대인의 자료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최초의 비기독교적 증인은 유대 삭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이다. "이집트사", "유대 고대사" 등의 자료들을 볼 수 있고 또하나의 유대적 증거는 바벨론 탈무드이다.
(2) 예수님에 관해 언급한 이방적 자료들
이에 관한 최초의 로마 저자는 플리니이다. 주후 112년경 트라얀 황제에게 쓴 편지에서 나타난다. 로마 사가 타키투스의 증거는 훨씬 더 명확하다.

2) 기독교적 자료 - 정경과 외경
(1) 정경 복음서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주요 주제를 취하고 있고, 제 4복음서는 예수님의 유대 사역을 부각시키고 있다. 공관복음서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 언급할 뿐이며 예수님의 전형적인 비유의 예도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요한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가르침은 보통 확대된 설교의 형식을 최하고 있다.
(2) 바울서신들
사도 바울의 서신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련된 사건들을 얼마간 증거하고 있다.
(3) 외경 복음서들
가장 오래된 것은 주후 2세기 전반에 쓰여진 도마 복음이다. 이 책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 이른바 100여개의 로기아로 구성되어 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약사

1)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연대기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연월일에 관해 정확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 한가지 고정된 출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대헤롯의 죽음 이전에 출생했다는 사실이다. 12월 25일로 성탄일을 지키는 관습은 3,4세기경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난 관습이다. 그 이전에는 1월 6일을 동방박사들이 방문한 날로 지키는 게 상례였다.
(2) 수세시기와 공생애의 시작
누가는 세례요한의 전도가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되는 해 빈들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 준다. 그 때 예수님의 나이가 30세라고 하니 주님의 탄생 시기는 주전 5년 내지 4년으로 잡을 경우 그의 사역 시작 시기는 주후 26년 내지 27년경이 되는 셈이다.
(3) 십자가의 죽음의 시기
요한복음은 적어도 세번의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장 1절에 언급된 절기도 유월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예수님의 수세 시기는 27년, 그 이후 첫 번째 유월절은 같은 해의 4월, 그리고 죽음의 시기는 30년 봄이 된다. 십자가 처형의 날을 금요일로 하는 데는 4복음서가 일치한다.

2) 예수님의 초기 생애
소년 시절의 예수님에 관한 성서의 유일한 기사는 누가복음에 나와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열두살 되시던 해에 성전, 곧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의 집이라고 불렀던 성전에서 발견된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수세와 시험받으심
(1) 세례요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세례요한의 사역의 틀 안에다 배치한 점에 있어서는 4복음서 저자가 모두 일치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의 특징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에서 베풀었던 세례와 결례는 매일 되풀이 된 데 반해 세례 요한의 시례의식은 단 한 번 시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장차 심판의 날에는 선민에 속해 있다는 특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수세
무리들에게 있어 요한이 세례는 죄악된 과거와 결별하고 변화된 삶에로 새로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그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역의 성취에 있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저 결별을 뜻할 뿐이다.
(3) 시험을 받으심
이 시험 기사는 세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 곧장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나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4)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1) 모호한 해
(2) 대중적 호감의 해
(3) 배척의 해
(4) 마지막 주간
(5) 체포, 심문, 그리고 십자가의 처형
(6) 부활과 승천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기독교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양태

1)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형식
(1) 회화적 화법
그의 가르침의 특색은 회색이나 간색이 아니라 완전히 대조되는 흑백이었다. 그는 색감 있는 어법을 구사하심으로써 일상의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우스꽝스럽고 어이없는 요소들을 폭로하신다.
(2) 언어 유희
인근 셈족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언어 유희 곧 말장난을 즐겼고 또 이것을 듣는 것도 즐겼다
(3) 격언
(4) 시
(5) 비유
예수님의 비유의 적절한 해석법은 그 비유가 처음 말해졌을 때의 그의 사역의 "삶의 정황"을 철저히 캐내고 또 그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고자 했던 주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는지를 보여주되, 가능하다면 인간의 심금에 와 닿도록 보여 주는 것이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약
(1)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
(2)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
(3) 자기 자신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4) 인간의 의무와 관계에 관한 가르침

제 3 부 사 도 시 대

7. 사도 시대의 자료와 연대기
사도 시대는 주후 약 30년부터 약 100년까지를 일컫는다.

1) 사도행전
이 책은 이제 신약에서 네 복음서와 그 다음에 따라오는 21개의 서신을 적절히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1) 역사가로서의 누가
누가는 약 3분의 1세기에 걸친 기간인 이 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자료들을 이른바 여섯 개의 피널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제 1기(행 1:1-6:7) :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과 그 후의 베드로의 설교를 포함한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에피소드들. 제 2기(6:8-9:31) : 팔레스틴 지역에서의 교회 확장, 순교로 절정을 이루는 스데반의 설교, 유대인과의 알력. 제3기(9:32-12:24) : 안디옥으로 교회가 확장됨, 베드로의 설교와 고넬료의 개종, 유대인들과의 알력 및 헤롯. 아그립바의 박해. 제 4기 (12:25-16:5) : 소아시아 남부와 중부지역으로 교회 확장, 구브로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로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떠남, 유대 크리스천들과의 논쟁과 예루살렘 사도 회의 개최. 제 5기(16:6-19:20) : 교회가 유럽으로 확장, 빌립보, 아덴, 고린도, 에베소와 같은 대도시에서의 바울의 제2차, 제3차 선교 여행. 제 6기(19:21 - 28:31) : 로마까지 교회 확장, 바울의 체포와 예루살렘 및 가이사랴에서의 심문, 바울의 로마항해.
(2) 누가의 목적과 특수 관심사
누가는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위험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를 바라고 있다.
(3)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연설과 교설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그외 초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의 설교들을 비교해 보면 공통의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구약 시대에 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제 성취되어 메시야께서 오셨다. 둘째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시다. 셋째 그분의 메세지를 듣는 자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

2) 사도 시대의 연대기
(1) 가장 확실한 연대는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해이다. 대략 44년으로 잡는다.
(2) 사도행전 11장 28절에 언급되어 있는 흉년의 연대는 고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제공된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즉 46년 혹은 47년의 일로 본다.
(3) 사도행전 18장 2절에는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라는 글라우디오의 칙령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49년 혹은 50년에 공포되었다.
(4) 사도행전 18장 12절에 의하면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아가야 총독 갈리오 앞으로 끌려갔다. 51년과 53년의 사이의 일로 본다.

8. 원시 유대 기독교

1) 오순절과 최고의 전도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후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였다.
(1) 오순절 날의 이례적인 현상은 메시야의 심판이 있기 전 이스라엘에게 부어 주기로 예언된 성령에 의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2) 최고의 전도 - 누가는 방언의 현상에 관한 기사를 통해 최초의 복음 전파의 보편성을 강조하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2) 교회와 유대교의 충돌 및 스데반의 순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최초의 반대는 사두개인들로부터 왔다. 그들은 대부분 귀족들로 구성된 일당이었으며 특히 대제사장 가문들이 이 부류에 속해 있었다. 그 새로운 종파의 전염성 있는 열정이 그들에게는 못마땅했다. 여려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그 종파가 자기들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을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대한 박해의 신호였다.

9. 사도바울의 사역을 통한 기독교의 확장

1) 바울의 초기 훈련과 회심
누가는 바울의 회심을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 기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해 기록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은 누가에 의해 이야기되고 있고 나머지 두번을 바울의 자신의 입을 통해 언급되고 있다.

2) 바울의 제 1차 선교여행
회심후 바울을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그가 회심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감히 선교 사업을 해 보리라는 새로운 생각의 씨가 그 교회의 다섯 예언자와 교사들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3) 예루살렘 사도공의회
이 첫번째 교회 회의의 중요성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만일에라도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던들 교회는 계속 회당의 한 부속물로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

4)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
49년부터 53년까지 이르는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은 끝났으며 이 기간 중에 기독교는 유럽에 정착하게 되었고, 또한 로마제국의 복음화에 있어서도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5) 바울의 제 3차 선교여행
에베소에 선교 본부를 두고 드로아, 마게도냐로 갔다. 그는 이방 교회의 친구들을 대동하고 이제 마지막 예루살렘행 여행길에 올랐다.

6) 바울의 포로와 감금
일단 소요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천부장인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을 체포하여 결박하고 다음날 재판을 받기 위해 바울은 유대 공회로 이송되었다. 엄중한 경계 속에 다시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 60년 초가을 가이사랴에서 출항한 배는 광풍을 만나 멜리데섬에서 파선하였다. 그리고 로마로 압송되었다.

10. 교회와 개인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들

1) 바울서신의 전반적 개요
그의 서신들을 보면 대부분 본론 부분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에서 앞부분은 교리를 다루고 후반부는 수신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자기 편지를 사필해서 원수신 교회 외에 다른 여러 교회에서도 회람할 수 있도록 할 의향이었던 것 같다. 바울서신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신자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권위를 갖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2) 바울서신들의 개요
(1) 데살로니가 전서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 중에 설립된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수의 유대인 개종자들과 다수의 이방인 개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고린도에 있는 바울은 데살로니가 에서 온 첫번째 편지를 받았다. 기쁜 소식이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적 건재함을 알리는 흐뭇한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다. 디모데는 이 소식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인들의 마음을 교란케 하고 있던 두가지 질문을 가지고 왔다. 질문을 파루시아,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관한 것이었고, 또 한가지는 일찍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쩌면 파루시아를 보지 못할 지도 모를 그들의 형제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2) 데살로니가 후서
세상 종말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강박감은 바울의 첫번째 편지를 받고 나서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심각해 졌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강박감이 너무나 고조되어 교인들 중에는 생계를 버는 일마저 팽개치고 보다 건전한 성도들의 관대함에 빌붙어 사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3) 갈라디아서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반면, 유대주의자들은 믿음과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선언하였다. 구원이란 어떤 율례를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4) 고린도서
바울의 제 3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 교회의 상태에 관해 몹시 걱정스러운 소식이 그에게 들려 왔다. 그래서 그는 부도덕한 자들과 상종하는 것을 경계할 양을 편지를 썼다. 이 편지로 인해 고린도 교회의 무절제함이 가라앉기는 커녕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고린도 후서는 난해한 편지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이 말했거나 느꼈던 것에 대한 대답이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5)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로마서는 그 헌장의 조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증문에 건제되어 있는 대 주제는 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야 말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간을 위한 유일한 구원 수단이라는 것이다.
(6) 골로새서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이 교회는 그를 도와주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에바브라라고 하는 골로새인이 세웠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영어의 몸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된 주요 동기는 그 공동체에서 발판을 굳혀 가고 있는 몇가지 심각한 잘못을 시정하여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7) 빌레몬서
한 가정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사적인 편지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제 자기 주인 빌레몬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보상을 할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8) 에베소서
진정성과 수신자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 서신이다. 이 서신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를 세우고 완성시킴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이다.
(9) 빌립보서
바울이 쓴 편지 중 가장 친절하고 애정 어린 편지 가운데 하나인 빌립보서는 마베도냐의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어진 편지였다. 이 편지의 전체적 분위기는 기쁨과 행복이다.
(10) 목회서신
이 서신의 주목적은 비정통적인 교훈들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고 지역 교회들의 행정을 위한 지침을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11. 공동서신과 요한 계시록

1) 공동서신
(1) 히브리서
본서는 익명의 서신이다. 이 서신을 쓰게 된 이유는 수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점점 미지근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예배 참석에도 태만하게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대주의적 의식으로 휘말려 들어 가려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포기하고 그들 조상들의 유대주의적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시점에 있었다. 익명의 이 저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 유대교가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의 독자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또한 지성에도 호소하고 있다.
(2) 야고보서
이는 하나의 설교이다. 이 논문은 형식에 있어서는 경귀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권면적이다. 본서는 구약적인 언어와 암시들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또한 저자가 신구약 중간사 기간의 지혜 문학에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서의 분위기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임이 분명하고 그 배경은 팔레스틴임에 틀림없다.
(3) 베드로전서
이 서신은 소아시아의 북부와 서부 지역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쓰여진 서신이다. 본서의 목적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에게 기독교적 본분에 굳게 서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4) 베드로후서
이 서신의 문체는 거의 위경 문학에 가깝다. 목적은 거짓 예언자와 이단의 가르침에 대처하기 위해 쓰여졌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그들이 그 믿음 안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5) 요한의 세서신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과 세개의 요한서신이 사도 요한의 제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믿고 있다. 요한1서는 서신의 일반적인 성격이 하나도 없다. 요한 2서는 "택함 받는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보내어진 것이다. 요한 3서는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보내어진 짤막한 개인적인 서신이다. 요한의 세 서신이 저술된 연대는 주후 1세기 말경으로 짐작된다.
(6) 유다서
이서신은 교회의 교리와 기율을 과소평가할 위험성이 있는, 성적 타락과 허무맹랑한 신학의 결합에 대한 분개어린 힘찬 경고이다.

2) 요한 계시록
요한 게시록의 저자는 그저 요한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 요한은 사도요한과 동일한 인물인 것으로 인정되나 신약 자체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저자는 지중해의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환상을 받았지만,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의 형편을 익히 알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곳에 상주했던 사람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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