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사 - 【 5 】 한국 장로교회(長老敎會)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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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9-05 00:22
【 5 】 한국 장로교회(長老敎會)
1. 가톨릭시대(여명기)
1) 기독교의 전래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들어오기는 1593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신부(神父) 세스페데스(gregoriade Cespedes)라고 본다. 그는 선교를 위하여 온 사람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 일본군 군목으로 따라 온 사람이었다.
30여년 후인 1627년에 화란인 웰터브레(Jan Janse Weltevree)가 한국 해안에 버려진 적이 있었고, 1653년 8월 16일에 화란인 하멜(Hendrick Hamel)이 제주도 해안에 표류한 적이 있었다. 이 하멜에 의하여 경주 근처에서 체포되어 40여년간 한국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웰터브레가 알려졌다. 이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인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 후 조정에서 중국으로 보낸 사절들이 주자학(朱子學)에서 실학(實學)으로 눈을 돌리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보다 깊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특히 이수광(李晬光)은 1614년 지붕유설(芝峰類說.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봉(芝峰) 이수광(1563~1628)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천문ㆍ지리ㆍ병정ㆍ관직 따위의 25부문 3,435항목을 고서(古書)에서 뽑아 풀이한 20권 1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을 통하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거론하며 유럽의 형편과 가톨릭에 대하여 말했다. 그의 지식은 1603년 마태오 리치가 출판한 ‘천주실의(天主實義)’애서 얻은 것이다.
이처럼 가톨릭을 통한 실학과 기독교 사상이 전래되고, 학자들이 중국에서 가톨릭 선교사와 그들의 저서들을 접하여 기독교 사상을 수입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였다.
1783년 이승훈(李承薰,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함)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1784년에 세례를 받고 각종 자료를 가지고 귀국하여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이승훈과 사돈 간인 이벽(李蘗)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1785년에는 김범우(金範禹)의 집을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이 당시 유하원(柳河源)의 상소로 박해가 시작되었다.(상소문, 천(天)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르며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설로서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미혹케 함이 큰물이나 무서운 짐승의 해보다 더하다.)
박해를 피하려고 이승훈은 척사문(斥邪文, 일종의 반성문)을 쓰며 교리를 불살랐고 이벽도 배교를 선언했다. 그 후 세정이 안정되었을 때 1787년 이승훈은 복교하여 박해를 대비하면서 성직제도(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세움)를 세웠다. - 북경에서는 이들의 성직설정을 인정하지 않음. 이들이 사도계승론(Apostolic Succession)에 위배된다고 함.
1794년 주문모(周文謨)가 중국이 파송한 신부로서 국경을 넘어 숨어 들어왔다. 이미 그 당시 한국 땅에는 4천여 명의 신도가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한국에서 조상숭배가 문제가 되어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을 당했다. 이조는 4대조까지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1801년 5월 31일에 신유박해사건이 일어났고 주문모를 비롯한 300여 명의 신도들이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당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쯔라프(Gutzlaff)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선교.
1839년 기해년 7월에 사교를 박멸하겠다는 척사편음(斥邪編音)의 포고령을 내려 수천 명의 신도를 투옥하고 130여 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1846년 병오년에는 2년 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26세로 그 해 7월 26일 새남터에서 11명의 신도와 함께 순교 당하였다.
1865년 토머스(Robert J.Thomas)선교사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
1866년 병인년에 어린 고종의 섭정 대원군이 13명의 신부를 학살하는 등 박해를 계속. 8년간 8천여 명을 학살했다.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
1876년 외국에서 한국인 첫 세례 받음 /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1882년 우리말 성경이 반포됨 / 로스역 성경(누가복음, 요한복음) - 서상륜의 공로
1882년 12월 신사 유람단으로 이수정이 일본에 가서 입신, 성경 번역.
1883년 5월 16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에 소래교회(서상륜 설립)가 설립됨. - 1883년 10월 20일에 안악군 서하면 상촌리에서 장석훈, 장석규, 장석구 3형제와 그의 4촌 형제 장석두, 장석영, 장석우 등이 합심하여 두 번째 교회인 대동교회를 설립, 1884년에는 장연군 낙도면 산천리에 낙도교회와 재령읍 동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안악군에는 1884년 3월 1일에 안악군 용문면 상무리에 무동교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3월 5일에는 안악군 은홍면 덕산리 덕산교회,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안악군 대원면 당전리에 당곡교회가 각각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은율군 은율읍교회가 남천리에 설립되었다.
1884년 알렌(Allen) 의사 부부가 입국하여 의료 선교 실시.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정식 선교사로 입국하여 선교사업 시작.
1890년 네비우스가 입국하여 네비우스 전도방법이 실시됨(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1901년 제주도에서 7백여 명이 학살당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들어오기는 1593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신부(神父) 세스페데스(gregoriade Cespedes)라고 본다. 그는 선교를 위하여 온 사람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 일본군 군목으로 따라 온 사람이었다.
30여년 후인 1627년에 화란인 웰터브레(Jan Janse Weltevree)가 한국 해안에 버려진 적이 있었고, 1653년 8월 16일에 화란인 하멜(Hendrick Hamel)이 제주도 해안에 표류한 적이 있었다. 이 하멜에 의하여 경주 근처에서 체포되어 40여년간 한국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웰터브레가 알려졌다. 이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인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 후 조정에서 중국으로 보낸 사절들이 주자학(朱子學)에서 실학(實學)으로 눈을 돌리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보다 깊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특히 이수광(李晬光)은 1614년 지붕유설(芝峰類說.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봉(芝峰) 이수광(1563~1628)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천문ㆍ지리ㆍ병정ㆍ관직 따위의 25부문 3,435항목을 고서(古書)에서 뽑아 풀이한 20권 1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을 통하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거론하며 유럽의 형편과 가톨릭에 대하여 말했다. 그의 지식은 1603년 마태오 리치가 출판한 ‘천주실의(天主實義)’애서 얻은 것이다.
이처럼 가톨릭을 통한 실학과 기독교 사상이 전래되고, 학자들이 중국에서 가톨릭 선교사와 그들의 저서들을 접하여 기독교 사상을 수입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였다.
1783년 이승훈(李承薰,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함)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1784년에 세례를 받고 각종 자료를 가지고 귀국하여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이승훈과 사돈 간인 이벽(李蘗)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1785년에는 김범우(金範禹)의 집을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이 당시 유하원(柳河源)의 상소로 박해가 시작되었다.(상소문, 천(天)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르며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설로서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미혹케 함이 큰물이나 무서운 짐승의 해보다 더하다.)
박해를 피하려고 이승훈은 척사문(斥邪文, 일종의 반성문)을 쓰며 교리를 불살랐고 이벽도 배교를 선언했다. 그 후 세정이 안정되었을 때 1787년 이승훈은 복교하여 박해를 대비하면서 성직제도(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세움)를 세웠다. - 북경에서는 이들의 성직설정을 인정하지 않음. 이들이 사도계승론(Apostolic Succession)에 위배된다고 함.
1794년 주문모(周文謨)가 중국이 파송한 신부로서 국경을 넘어 숨어 들어왔다. 이미 그 당시 한국 땅에는 4천여 명의 신도가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한국에서 조상숭배가 문제가 되어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을 당했다. 이조는 4대조까지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1801년 5월 31일에 신유박해사건이 일어났고 주문모를 비롯한 300여 명의 신도들이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당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쯔라프(Gutzlaff)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선교.
1839년 기해년 7월에 사교를 박멸하겠다는 척사편음(斥邪編音)의 포고령을 내려 수천 명의 신도를 투옥하고 130여 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1846년 병오년에는 2년 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26세로 그 해 7월 26일 새남터에서 11명의 신도와 함께 순교 당하였다.
1865년 토머스(Robert J.Thomas)선교사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
1866년 병인년에 어린 고종의 섭정 대원군이 13명의 신부를 학살하는 등 박해를 계속. 8년간 8천여 명을 학살했다.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
1876년 외국에서 한국인 첫 세례 받음 /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1882년 우리말 성경이 반포됨 / 로스역 성경(누가복음, 요한복음) - 서상륜의 공로
1882년 12월 신사 유람단으로 이수정이 일본에 가서 입신, 성경 번역.
1883년 5월 16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에 소래교회(서상륜 설립)가 설립됨. - 1883년 10월 20일에 안악군 서하면 상촌리에서 장석훈, 장석규, 장석구 3형제와 그의 4촌 형제 장석두, 장석영, 장석우 등이 합심하여 두 번째 교회인 대동교회를 설립, 1884년에는 장연군 낙도면 산천리에 낙도교회와 재령읍 동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안악군에는 1884년 3월 1일에 안악군 용문면 상무리에 무동교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3월 5일에는 안악군 은홍면 덕산리 덕산교회,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안악군 대원면 당전리에 당곡교회가 각각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은율군 은율읍교회가 남천리에 설립되었다.
1884년 알렌(Allen) 의사 부부가 입국하여 의료 선교 실시.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정식 선교사로 입국하여 선교사업 시작.
1890년 네비우스가 입국하여 네비우스 전도방법이 실시됨(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ethods)이다.)
1901년 제주도에서 7백여 명이 학살당했다.
2) 장로교회의 조직
언더우드가 입국한 이후 호주 장로회(1889년), 미국 남장로회(1892년), 캐나다 장로회(1893년) 등이 뒤를 이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 밖에 침례회와 성공회, 남 감리회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아직 조정에서는 기독교의 선교를 승낙하지는 않았지만 언더우드 이전처럼 박해하지는 않았다. 특히 알렌은 “국법이 허락할 때까지 선교를 보류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폈다. 언더우드는 한국말을 익히자 길거리로 나가서 전도를 했으며 서울 가까이까지 전도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이후 호주 장로회(1889년), 미국 남장로회(1892년), 캐나다 장로회(1893년) 등이 뒤를 이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 밖에 침례회와 성공회, 남 감리회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아직 조정에서는 기독교의 선교를 승낙하지는 않았지만 언더우드 이전처럼 박해하지는 않았다. 특히 알렌은 “국법이 허락할 때까지 선교를 보류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폈다. 언더우드는 한국말을 익히자 길거리로 나가서 전도를 했으며 서울 가까이까지 전도했다.
(1) 소래(松川) 장로교회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우리 말 성경이 한국말로서는 처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우리말 성경은 널리 퍼져서 읽히고 있었다. 이 일은 봉천지역에서 존 로스와 함께 번역 판매를 했던 서상륜의 공이었다. 그는 1884년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로 돌아가서 정착하여 복음을 전했고 최초의 한국 장로교회를 한국인 손으로 설립했다. - 이 교회는 그 지방 사람들의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설립, 운영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 50세대를 전도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우리 말 성경이 한국말로서는 처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우리말 성경은 널리 퍼져서 읽히고 있었다. 이 일은 봉천지역에서 존 로스와 함께 번역 판매를 했던 서상륜의 공이었다. 그는 1884년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로 돌아가서 정착하여 복음을 전했고 최초의 한국 장로교회를 한국인 손으로 설립했다. - 이 교회는 그 지방 사람들의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설립, 운영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 50세대를 전도했다.
(2) 새문안 장로교회의 조직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언더우드 목사가 시작되었으며 교회를 세우기까지는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문호는 개방되었지만 법적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들끼리 모이는 종교집회는 허락되었다.
1885년 6월 28일 오후 8시 알렌 의사 집에서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하였다.
1885년 7월 13일에는 미국 북장로교회 한국선교회가 첫 모임을 가졌다.
1886년 7월 11일에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온 후 처음으로 노도사(魯道士)에게 비밀히 세례를 베풀었다. 그 후 언더우드 목사는 소래에서 일곱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선찬예식을 거행했다. 이 때 이미 서울에는 70여 명의 신자가 있었지만 교회는 조직되지 않았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목사 사랑채에서 14명의 교인과 처음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교회가 새문안 장로교회였다. - 14명 중 13명은 이미 서상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 밖에 다른 많은 신자들이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교회조직에 가담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언더우드 목사가 시작되었으며 교회를 세우기까지는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문호는 개방되었지만 법적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들끼리 모이는 종교집회는 허락되었다.
1885년 6월 28일 오후 8시 알렌 의사 집에서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하였다.
1885년 7월 13일에는 미국 북장로교회 한국선교회가 첫 모임을 가졌다.
1886년 7월 11일에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온 후 처음으로 노도사(魯道士)에게 비밀히 세례를 베풀었다. 그 후 언더우드 목사는 소래에서 일곱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선찬예식을 거행했다. 이 때 이미 서울에는 70여 명의 신자가 있었지만 교회는 조직되지 않았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목사 사랑채에서 14명의 교인과 처음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교회가 새문안 장로교회였다. - 14명 중 13명은 이미 서상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 밖에 다른 많은 신자들이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교회조직에 가담했다.
(3) 최초의 장로 안수와 당회 조직
로스 목사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본부로 보낸 보고서와 언더우드 목사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로 보낸 보고서 중에는 1887년 9월 27일 창립한 다음 주일에 뽑힌 두 사람의 장로를 백홍준, 서상륜으로 기록했다. -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들을 장로로 인정하지 않았다.
1900년 서경조가 소래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했다. - “堂會를 組織하니 시내(是乃) 我國敎會의 最先 長老더라.”
1904년 10월 2일. 서울에서는 새문안교회의 송순명(宋淳明) 장로가 첫 장로였다. - “京城 西大門內 敎會서는 助師 宋淳明을 長老로 將立하야 京城 最先의 堂會가 組織되니라.”
로스 목사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본부로 보낸 보고서와 언더우드 목사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로 보낸 보고서 중에는 1887년 9월 27일 창립한 다음 주일에 뽑힌 두 사람의 장로를 백홍준, 서상륜으로 기록했다. -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들을 장로로 인정하지 않았다.
1900년 서경조가 소래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했다. - “堂會를 組織하니 시내(是乃) 我國敎會의 最先 長老더라.”
1904년 10월 2일. 서울에서는 새문안교회의 송순명(宋淳明) 장로가 첫 장로였다. - “京城 西大門內 敎會서는 助師 宋淳明을 長老로 將立하야 京城 最先의 堂會가 組織되니라.”
(4) 장로회 협의회 구성(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rom of Government)
1893년 1월 28일 장로교파 선교사 전원이 참석한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협의회는 한국 안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3월에 미국 남북 장로회 선교부가 연석회의를 열어 한국에 있어서 단일 장로교회 설립 목표를 지향하도록 그들 총회에 승인을 요청하기로 했다. - 1895-1896년 이 협의회는 게일(J.S.Gale)이 편찬한 한영사전의 풀판비용 등을 책임지기도 했으며 비공식적으로 상호 친목 중심이었다. 1901년에는 한국인도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었다.
1893년 1월 28일 장로교파 선교사 전원이 참석한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협의회는 한국 안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3월에 미국 남북 장로회 선교부가 연석회의를 열어 한국에 있어서 단일 장로교회 설립 목표를 지향하도록 그들 총회에 승인을 요청하기로 했다. - 1895-1896년 이 협의회는 게일(J.S.Gale)이 편찬한 한영사전의 풀판비용 등을 책임지기도 했으며 비공식적으로 상호 친목 중심이었다. 1901년에는 한국인도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었다.
(5) 한국 장로교회 조직
한국 장로교회를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라고 불렀다.
1901년 주한 4개 장로회 선교부로 구성된 최고 치리기관인 협의회(Presbyterian Council)가 한국인 목사 양성을 위하여 연합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 1907년 제1호 졸업생 7명이 나왔다. 그러나 장로교 교회정치규정에는 노회(Presbytery)가 아니면 목사를 안수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선교 협의회에서는 한국 장로회의 조직을 주선하여 한국인 목사가 한국인 장로회 아래서 안수를 받게 하였으며 선교사들은 본국 노회 소속 회원권을 보유하면서 또한 한국 장로회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 때가 1907년 9월 17일. 33명의 외국 선교사들과 36명의 한국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첫 번째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협의회의 의장이었던 마삼열(Samuel A. Moffett)목사가 의장에 취임했다. 7명의 목사를 안수 했으며 53명의 장로, 989개의 교회외 1900명의 교인과 70,000여 명의 신도들을 두게 되었다.
이때 채택된 신앙고백은 인도교회의 12신조였다. 이 신조는 칼빈주의의 경향이 짙었다.
한국 장로교회를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라고 불렀다.
1901년 주한 4개 장로회 선교부로 구성된 최고 치리기관인 협의회(Presbyterian Council)가 한국인 목사 양성을 위하여 연합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 1907년 제1호 졸업생 7명이 나왔다. 그러나 장로교 교회정치규정에는 노회(Presbytery)가 아니면 목사를 안수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선교 협의회에서는 한국 장로회의 조직을 주선하여 한국인 목사가 한국인 장로회 아래서 안수를 받게 하였으며 선교사들은 본국 노회 소속 회원권을 보유하면서 또한 한국 장로회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 때가 1907년 9월 17일. 33명의 외국 선교사들과 36명의 한국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첫 번째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협의회의 의장이었던 마삼열(Samuel A. Moffett)목사가 의장에 취임했다. 7명의 목사를 안수 했으며 53명의 장로, 989개의 교회외 1900명의 교인과 70,000여 명의 신도들을 두게 되었다.
이때 채택된 신앙고백은 인도교회의 12신조였다. 이 신조는 칼빈주의의 경향이 짙었다.
2. 부흥시대(발전기)
장로교회가 조직된 후 잠깐의 잠재기를 지난 1895년부터 세례교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 청일전쟁의 영향
1894년 한국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보수적인 한국 사람은 중국이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일본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일본은 서구 문명을 빨리 받아들인 아시아의 유일한 강국으로 부상했다. 서양문명과 함께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이 일본이 아닌 새로운 지도자들로써 불안한 정세 속에서 한국인들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1894년 한국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보수적인 한국 사람은 중국이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일본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일본은 서구 문명을 빨리 받아들인 아시아의 유일한 강국으로 부상했다. 서양문명과 함께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이 일본이 아닌 새로운 지도자들로써 불안한 정세 속에서 한국인들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2)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의 영향
청일전쟁(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 전쟁)을 일으켜서 승리했으며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10년에 합병이라는 조약을 만들어 한국의 정치적인 독립을 종식시켰다.
한국은 절망적인 국정에서 나라와 민족의 소망을 교회에서 찾으려 했다. 이런 환경에서 교회는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큰 조직체로 성장했다. -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 국민들이 교회로 오는 것이 영적 동기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른 교육을 위한 대비책도 세웠다.
청일전쟁(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 전쟁)을 일으켜서 승리했으며 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10년에 합병이라는 조약을 만들어 한국의 정치적인 독립을 종식시켰다.
한국은 절망적인 국정에서 나라와 민족의 소망을 교회에서 찾으려 했다. 이런 환경에서 교회는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큰 조직체로 성장했다. -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 국민들이 교회로 오는 것이 영적 동기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른 교육을 위한 대비책도 세웠다.
3) 민족적 각성운동
정치적인 혼란과 왜곡된 신앙에서 오랫동안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각성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 이 부흥운동은 사경회(査經會)였는데 1899년 언더우드 목사가 서울에서 7명으로 시작하여 1901년에는 선교사마다 성경공부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선교부 세칙까지 삽입했다. 1904년에는 60%가 가담했고, 1909년에는 북장로교 선교구역에서는 5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를 가진 800개의 사경회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존 칼빈으로 되돌아갔고, 어떤 사람은 존 웨슬레로 돌아갔으나 우리는 1907년 밖에 더 돌아갈 곳이 없다.”
정치적인 혼란과 왜곡된 신앙에서 오랫동안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각성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 이 부흥운동은 사경회(査經會)였는데 1899년 언더우드 목사가 서울에서 7명으로 시작하여 1901년에는 선교사마다 성경공부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선교부 세칙까지 삽입했다. 1904년에는 60%가 가담했고, 1909년에는 북장로교 선교구역에서는 5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를 가진 800개의 사경회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존 칼빈으로 되돌아갔고, 어떤 사람은 존 웨슬레로 돌아갔으나 우리는 1907년 밖에 더 돌아갈 곳이 없다.”
4)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조직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 여자 성경학원에서 7개 노회 산하 목사 52명, 장로 125명, 선교사 44명, 총대 221명으로 조직되었다. - 회장에는 언더우드 목사, 부회장에는 길선주 목사, 서기 한석진 목사, 부서기 김필수 목사였다.
1919년까지 장로교회는 교회 성장을 거듭했다. 1911년에 46,934명이던 세례교인이 1919년에는 69,047명이 되었다.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 여자 성경학원에서 7개 노회 산하 목사 52명, 장로 125명, 선교사 44명, 총대 221명으로 조직되었다. - 회장에는 언더우드 목사, 부회장에는 길선주 목사, 서기 한석진 목사, 부서기 김필수 목사였다.
1919년까지 장로교회는 교회 성장을 거듭했다. 1911년에 46,934명이던 세례교인이 1919년에는 69,047명이 되었다.
3. 박해와 분열시대(수난기)
1910년 한일합방은 곧 민족과 국가가 망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교회로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앙운동과 전도운동을 벌이는 마당에 “이대로 좋은 것인가?”라는 역사적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본의 전복과 그들의 탄압이 교회와 무관한 것일 수가 없었다.
서우학회(西友學會), 안창호, 신민회(캘리포니아) 등이 배일적이었다. 물론 선교사들 중에는 친일적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로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등문을 피격했다. 1908년 사립학교 교령을 공포하여 기독교계의 사학들을 통솔 감독했다.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 강요에 교회는 우상숭배라 하여 거절했으며 이로 인하여 일본은 반일에 대한 사찰을 시작했다.
105인 사건 중 장로교인이 97명이었다. 윤산은(G.S.McCune)과 나부열(S.L.Robert) 선교사가 이 음모에 가담되었다고 고발했다. - 105인 사건은 1911년에 일어난 일본이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단순한 모금활동에 불과한 안명근의 체포사건을 1910년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미수 사건으로 조작하여 그 빌미로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윤치호, 전덕기 등 신민회 간부 및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을 대거 투옥시켰다.
1915년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사용할 것과 기독교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없애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교사들은 여전히 중립이라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품게 된다.
서우학회(西友學會), 안창호, 신민회(캘리포니아) 등이 배일적이었다. 물론 선교사들 중에는 친일적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로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등문을 피격했다. 1908년 사립학교 교령을 공포하여 기독교계의 사학들을 통솔 감독했다.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 강요에 교회는 우상숭배라 하여 거절했으며 이로 인하여 일본은 반일에 대한 사찰을 시작했다.
105인 사건 중 장로교인이 97명이었다. 윤산은(G.S.McCune)과 나부열(S.L.Robert) 선교사가 이 음모에 가담되었다고 고발했다. - 105인 사건은 1911년에 일어난 일본이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단순한 모금활동에 불과한 안명근의 체포사건을 1910년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미수 사건으로 조작하여 그 빌미로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윤치호, 전덕기 등 신민회 간부 및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을 대거 투옥시켰다.
1915년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사용할 것과 기독교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없애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교사들은 여전히 중립이라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품게 된다.
1)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은 교회가 민족들의 의구심에서 벗어나게 했다. 물론 선교사들은 중립이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이 교회성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 33인은 모두 종교인이었다. 16인은 기독교, 14인은 천도교, 3인은 불교였으며 기독교 중에는 몇 사람의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교회는 독립운동의 유일한 조직체였다. 이로 인하여 많은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투옥과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은 교회가 민족들의 의구심에서 벗어나게 했다. 물론 선교사들은 중립이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이 교회성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 33인은 모두 종교인이었다. 16인은 기독교, 14인은 천도교, 3인은 불교였으며 기독교 중에는 몇 사람의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교회는 독립운동의 유일한 조직체였다. 이로 인하여 많은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투옥과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2)재 조직
교회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때에 장로교회에서는 ‘전진운동'이라고 부르며 ’한국교회의 활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복음 전도의 노력을 증진시키며 주일학교 활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일을 모색했다.‘ 4천 개에 달하는 한국 장로교회는 이 운동을 위한 특별 부흥회를 열었으며 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때에 장로교회에서는 ‘전진운동'이라고 부르며 ’한국교회의 활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복음 전도의 노력을 증진시키며 주일학교 활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일을 모색했다.‘ 4천 개에 달하는 한국 장로교회는 이 운동을 위한 특별 부흥회를 열었으며 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3)신사참배
일본이 우리나라에 신사를 들여온 것은 1918년부터였다. 1930년대 초반 만주 침략을 계기로 일본은 국민정신 통일로 중국을 침략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일본인 신하로서의 의무에서 천황의 선조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한 의식이다. 그것은 선조들에 대한 감사의 의식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기독교계 학교는 거부와 더불어 폐교의 길을 택하였다. 선교사들이 단호하여 자진 폐교가 많았다.
신사참배의 강요가 교회로 들어왔다. 1938년 9월 10일 총회 총대는 개별적으로 지지안을 강요 받았다. 반대자는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았다. 가장 완강한 반대의 교파는 장로교였다. 이 후부터 많은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를 당한 대표자로 주기철 목사가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신사를 들여온 것은 1918년부터였다. 1930년대 초반 만주 침략을 계기로 일본은 국민정신 통일로 중국을 침략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일본인 신하로서의 의무에서 천황의 선조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한 의식이다. 그것은 선조들에 대한 감사의 의식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기독교계 학교는 거부와 더불어 폐교의 길을 택하였다. 선교사들이 단호하여 자진 폐교가 많았다.
신사참배의 강요가 교회로 들어왔다. 1938년 9월 10일 총회 총대는 개별적으로 지지안을 강요 받았다. 반대자는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았다. 가장 완강한 반대의 교파는 장로교였다. 이 후부터 많은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를 당한 대표자로 주기철 목사가 있다.
4)분열
장로교회의 분열의 징조는 1930년대부터 있었다. 1911년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져 보조하는 문제가 있을 때 평양의 교회들은 이 학교가 서울에 소재했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반대했다. 그리고 북쪽에 편중되어 있는 교회들이 남쪽 교회의 의사들을 반영하지 않는 불평이 일어났다. 1934년부터 이런 지역적인 감정이 표면화 되었다.
다음으로는 신학적인 문제였는데 미국 쪽보다 일본 쪽에서 신학을 하고 온 사람들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독일물을 먹었다는 것이다. 가장 치열한 대결은 박형용과 김재준의 논쟁이었다. 1934년과 1935년에는 보수파와 신신학파로 장로회 총회는 분열을 노출했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언제나 신학교와의 분열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무기 휴학에 들어가자 선교사들 주관으 신학교에서 보다 한국인 손으로 운영되는 신학교으 설립과 교역자 양성의 중단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1939년 3월, 채필근 목사의 제안과 더불어 서울에서 기성회를 조직했고, 1940년 4월 19일에 서울 승동교회 아래층에서 조선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 김대현 장로가 학원장. 김영조 함태영, 이정로, 윤인구,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었다.
1954년 6월 10일 제 39회 총회에서 한국신학교가 분리되어 나가서 캐나다와 연합 장로교회와 우호관계를 가지며 기독교 장로회로 진보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교회에는 자유의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출옥과 더불어 또 다시 신사참배 여부 문제가 죄악시 되는 논란이 있었다.
1946년 6월부터 개강되던 신학교가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1951년 총회를 이탈했다.
해방 된지 5년 만에 민족과 국가는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교회는 또 다시 수난을 당해야 했다. 납북, 총살형, 방화, 실종 등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파손된 장로교회가 152, 순교 및 납치된 중요 장로교인이 177명이나 되었다.
1959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 장로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맞이한다. 신학교 부지 매입자금 3천만환 사건과 에큐메니칼 운동은 용공(容共)이라는 것으로, 경기노회 총대 선정문제를 둘러싸고 그 해 9월 24일 제 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아수라장으로 깨졌다. 여기서 소위 합동측 장로교회는 이탈하고 나머지가 통합으로 하는 분열이 일어났다. - 박형용 교장의 거액 공금유용사건, WCC 등의 싸움이 일어났다.
1972년. 1950년대의 분리 이후 처음으로 4파 장로교회(고려, 기장, 합동, 통합)의 총회장들과 총무들이 9월에 한 자리에 모였다. 연합보다는 협동관계를 맺었다.
장로교회의 분열의 징조는 1930년대부터 있었다. 1911년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져 보조하는 문제가 있을 때 평양의 교회들은 이 학교가 서울에 소재했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반대했다. 그리고 북쪽에 편중되어 있는 교회들이 남쪽 교회의 의사들을 반영하지 않는 불평이 일어났다. 1934년부터 이런 지역적인 감정이 표면화 되었다.
다음으로는 신학적인 문제였는데 미국 쪽보다 일본 쪽에서 신학을 하고 온 사람들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독일물을 먹었다는 것이다. 가장 치열한 대결은 박형용과 김재준의 논쟁이었다. 1934년과 1935년에는 보수파와 신신학파로 장로회 총회는 분열을 노출했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언제나 신학교와의 분열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무기 휴학에 들어가자 선교사들 주관으 신학교에서 보다 한국인 손으로 운영되는 신학교으 설립과 교역자 양성의 중단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1939년 3월, 채필근 목사의 제안과 더불어 서울에서 기성회를 조직했고, 1940년 4월 19일에 서울 승동교회 아래층에서 조선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 김대현 장로가 학원장. 김영조 함태영, 이정로, 윤인구,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었다.
1954년 6월 10일 제 39회 총회에서 한국신학교가 분리되어 나가서 캐나다와 연합 장로교회와 우호관계를 가지며 기독교 장로회로 진보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교회에는 자유의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출옥과 더불어 또 다시 신사참배 여부 문제가 죄악시 되는 논란이 있었다.
1946년 6월부터 개강되던 신학교가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1951년 총회를 이탈했다.
해방 된지 5년 만에 민족과 국가는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교회는 또 다시 수난을 당해야 했다. 납북, 총살형, 방화, 실종 등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파손된 장로교회가 152, 순교 및 납치된 중요 장로교인이 177명이나 되었다.
1959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 장로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맞이한다. 신학교 부지 매입자금 3천만환 사건과 에큐메니칼 운동은 용공(容共)이라는 것으로, 경기노회 총대 선정문제를 둘러싸고 그 해 9월 24일 제 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아수라장으로 깨졌다. 여기서 소위 합동측 장로교회는 이탈하고 나머지가 통합으로 하는 분열이 일어났다. - 박형용 교장의 거액 공금유용사건, WCC 등의 싸움이 일어났다.
1972년. 1950년대의 분리 이후 처음으로 4파 장로교회(고려, 기장, 합동, 통합)의 총회장들과 총무들이 9월에 한 자리에 모였다. 연합보다는 협동관계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