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는 단순하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171회
작성일
2001-05-30 22:04
믿음!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너무나 추상적이고 비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추상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모험'에 비유하기를 좋아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천길 벼랑 위에 서 있을 때, 주님께서 '지금 그 자리에서 앞으로 발을 내 딛으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발을 내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세상의 환경이나 자신의 생각이 첨가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주님의 요청에 주저함 없이 '예'라고 대답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요청에 대하여 자신이 당면한 현실이나 세상의 환경,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재편집한다면, 결코 믿음의 행동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용'과는 다릅니다. 믿음에 대한 '만용'은 주님의 뜻과는 무관한 '인간적인 자신감'입니다. 또한 모든 환경과 여건을 고려할 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경험을 토대로한 '경영'일 뿐입니다.
* 38년된 병자가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 그 병자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따졌다면 고침을 받았겠습니까?
*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이적에서, 물을 항아리에 퍼 담았던 하인들이 당시의 현실에 집착했다면, 물이 포도주가 되었겠습니까?
*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흙을 침으로 반죽해서 자신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싰으라고 한 사실을 비관적으로 생각했다면 눈을 떴겠습니까?
이 모든 사실은 주님의 행위와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믿음은 따지지 않습니다. 환경도, 상황도, 모든 여건도 주님이 조성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 염려, 근심하지 마십시오.
왜냐고요? 주님께서 염려하지도 근심하지도 말라고 했으니까요. 앞 길이 염려가 되고 현실적인 상황이 근심되고 걱정됩니까? 당면한 상황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고 아뢴 그 일을 주님이 들으셨고 인도하실 것임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비록 벼랑 끝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가라고 하시면 발을 내딛으십시오. 넘실대는 요단강이 발을 내 딛을 때 갈라졌습니다. 모든 이적은 믿고 행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 그리고 실천 이외의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의롭게 살지 못했고, 많이 봉사하지 못했고, 주님께 대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은 능력 있는 '믿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결코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아 왔는냐? 또는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시는 환경에 충실하십시오. 지금 봉사하십시오. 지금 사랑하십시오. 회개도 지금 하십시오. 어제는 지나갔으니 소용없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내 날이 될는지 알 수 없으니 또한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너무나 추상적이고 비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추상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모험'에 비유하기를 좋아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천길 벼랑 위에 서 있을 때, 주님께서 '지금 그 자리에서 앞으로 발을 내 딛으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발을 내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세상의 환경이나 자신의 생각이 첨가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주님의 요청에 주저함 없이 '예'라고 대답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요청에 대하여 자신이 당면한 현실이나 세상의 환경,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재편집한다면, 결코 믿음의 행동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용'과는 다릅니다. 믿음에 대한 '만용'은 주님의 뜻과는 무관한 '인간적인 자신감'입니다. 또한 모든 환경과 여건을 고려할 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경험을 토대로한 '경영'일 뿐입니다.
* 38년된 병자가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 그 병자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따졌다면 고침을 받았겠습니까?
*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이적에서, 물을 항아리에 퍼 담았던 하인들이 당시의 현실에 집착했다면, 물이 포도주가 되었겠습니까?
*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흙을 침으로 반죽해서 자신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싰으라고 한 사실을 비관적으로 생각했다면 눈을 떴겠습니까?
이 모든 사실은 주님의 행위와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믿음은 따지지 않습니다. 환경도, 상황도, 모든 여건도 주님이 조성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 염려, 근심하지 마십시오.
왜냐고요? 주님께서 염려하지도 근심하지도 말라고 했으니까요. 앞 길이 염려가 되고 현실적인 상황이 근심되고 걱정됩니까? 당면한 상황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고 아뢴 그 일을 주님이 들으셨고 인도하실 것임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비록 벼랑 끝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가라고 하시면 발을 내딛으십시오. 넘실대는 요단강이 발을 내 딛을 때 갈라졌습니다. 모든 이적은 믿고 행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 그리고 실천 이외의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의롭게 살지 못했고, 많이 봉사하지 못했고, 주님께 대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은 능력 있는 '믿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결코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아 왔는냐? 또는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시는 환경에 충실하십시오. 지금 봉사하십시오. 지금 사랑하십시오. 회개도 지금 하십시오. 어제는 지나갔으니 소용없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내 날이 될는지 알 수 없으니 또한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