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아십니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064회
작성일
2001-06-23 21:42
자동차의 성능 목록 중에 ‘등반능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동차가 어느 정도의 경사로까지 오를 수 있는가를 시험하여 판별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바꾸어 말하면 어느 정도의 부하를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말의 의미는 ‘시련’ 즉 ‘부하능력 시험’입니다.
이 시련을 받은 사람에게는 참된 내면적 가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능력 시험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갈 단계에 옮겨져도 좋은가 아닌가를 판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찾아오는 것은 ‘이제는 행복한 나날이 지나가고, 괴로운 날들이 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용감하게 견디라.’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시련의 진정한 의미는 ‘굳게 서서 이겨내라. 그리하면 평안할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위대한 보배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난이 다가올 때 더욱 기뻐하라고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시련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예를 봅시다.
사도 바울이 복음 증거로 인하여 갇힌 몸으로 로마에 있었을 때입니다.
바울의 반대파인 유대주의자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할례주의를 힘써 선전하면서 바울이 전도한 각처의 복음주의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비열한 행위의 소식을 옥중에서 들은 바울의 행동이 주목할 만합니다.
만일 바울이 세상적인 영웅호걸이었다면, 자신이 수고하여 쌓은 것을 무너뜨림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쓸데없는 염려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행사 중에서 위대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하는 데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 이 사람들은 복음을 변명하라고 나를 세우신 것을 알고 사랑함으로 하고, 저 사람들은 나의 매임 당함을 더 괴롭게 하려하여 다툼과 정성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하지만 무론 어떠하든지 전파하는 바는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2-20)
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당면한 상황의 의미를 알고 있을 때는 기쁨이 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할 때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 환경을 주관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동차가 어느 정도의 경사로까지 오를 수 있는가를 시험하여 판별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바꾸어 말하면 어느 정도의 부하를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말의 의미는 ‘시련’ 즉 ‘부하능력 시험’입니다.
이 시련을 받은 사람에게는 참된 내면적 가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능력 시험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갈 단계에 옮겨져도 좋은가 아닌가를 판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찾아오는 것은 ‘이제는 행복한 나날이 지나가고, 괴로운 날들이 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용감하게 견디라.’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시련의 진정한 의미는 ‘굳게 서서 이겨내라. 그리하면 평안할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위대한 보배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난이 다가올 때 더욱 기뻐하라고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시련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예를 봅시다.
사도 바울이 복음 증거로 인하여 갇힌 몸으로 로마에 있었을 때입니다.
바울의 반대파인 유대주의자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할례주의를 힘써 선전하면서 바울이 전도한 각처의 복음주의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비열한 행위의 소식을 옥중에서 들은 바울의 행동이 주목할 만합니다.
만일 바울이 세상적인 영웅호걸이었다면, 자신이 수고하여 쌓은 것을 무너뜨림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쓸데없는 염려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행사 중에서 위대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하는 데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 이 사람들은 복음을 변명하라고 나를 세우신 것을 알고 사랑함으로 하고, 저 사람들은 나의 매임 당함을 더 괴롭게 하려하여 다툼과 정성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하지만 무론 어떠하든지 전파하는 바는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2-20)
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당면한 상황의 의미를 알고 있을 때는 기쁨이 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할 때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 환경을 주관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