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동행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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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6-23 21:36
*** 마가복음 9:14-29
한 수도사가 감람나무 묘목을 심고 “주여, 비를 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수도사는 계속 햇빛과 서리와 바람을 요구했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묘목은 자라지 않고 시들어가기만 했습니다. 이 수도사는 감람나무를 잘 키우는 수도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때 감람나무를 잘 키우는 수도사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나무가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네. 나는 이렇게 기도하지. ‘주여,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맞은 때 알맞게 주십시오.’라고 말이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세상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주님께 맡겨진 생애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기보다는, 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문에 따라서 응답하시는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순종해야 할 종입니다.
열려라 참깨! 이 주문만 외우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보물창고를 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외의 문은 하찮은 냉장고 문조차도 열 수 없지요. 도적들의 보물창고는 그 주인을 모릅니다. 아무나 그 문 앞에 서서 ‘열려라 참깨!’ 만 외치면 문을 열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재미는 있지만 도덕성이 희박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사건에 다가 인격성이 없습니다. 보물창고와 문을 여는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도덕적 가치 판단이나 인격적인 교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적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적은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과 뜻에 의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적은 사람이 지닌 어떤 능력에 의하지 않습니다. 무슨 긴 주문을 한마디도 안 틀리고 줄줄 외우더라도 신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떠나 홍해바다 앞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애굽의 군대가 병거를 타고 쫓아왔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리키자 바다가 갈라지고 백성들은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상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왕권의 상징인 홀을 들어 바다를 가리켰어도 바다가 갈라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은 ‘아닙니다.’ 바로가 모세의 지팡이를 뺏어서 했더라도 바다는 결코 갈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이적에는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리며 삽니다. 그러나 기적은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 한마디 알아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잘 이루어야 하며, 주님과의 성실한 동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홍해바다 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갈라집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주님께서 결코 심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성실하게 동행하십시오.
한 수도사가 감람나무 묘목을 심고 “주여, 비를 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수도사는 계속 햇빛과 서리와 바람을 요구했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묘목은 자라지 않고 시들어가기만 했습니다. 이 수도사는 감람나무를 잘 키우는 수도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때 감람나무를 잘 키우는 수도사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나무가 언제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네. 나는 이렇게 기도하지. ‘주여,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맞은 때 알맞게 주십시오.’라고 말이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세상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주님께 맡겨진 생애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기보다는, 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문에 따라서 응답하시는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순종해야 할 종입니다.
열려라 참깨! 이 주문만 외우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보물창고를 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외의 문은 하찮은 냉장고 문조차도 열 수 없지요. 도적들의 보물창고는 그 주인을 모릅니다. 아무나 그 문 앞에 서서 ‘열려라 참깨!’ 만 외치면 문을 열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재미는 있지만 도덕성이 희박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사건에 다가 인격성이 없습니다. 보물창고와 문을 여는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도덕적 가치 판단이나 인격적인 교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적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적은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과 뜻에 의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적은 사람이 지닌 어떤 능력에 의하지 않습니다. 무슨 긴 주문을 한마디도 안 틀리고 줄줄 외우더라도 신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떠나 홍해바다 앞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애굽의 군대가 병거를 타고 쫓아왔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리키자 바다가 갈라지고 백성들은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상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왕권의 상징인 홀을 들어 바다를 가리켰어도 바다가 갈라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은 ‘아닙니다.’ 바로가 모세의 지팡이를 뺏어서 했더라도 바다는 결코 갈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이적에는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리며 삽니다. 그러나 기적은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 한마디 알아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잘 이루어야 하며, 주님과의 성실한 동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홍해바다 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갈라집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주님께서 결코 심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성실하게 동행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