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죽음
*** 두 종류의 죽음 ***
*** 요한복음 11:25 ***
부활을 이야기할 때면 자주 ‘빈 무덤’을 말합니다. 빈 무덤은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기쁨을 말하면서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한다.’라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당연하게도 부활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밀알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생명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음’에는 두 가지의 죽음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이란, 결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죽음이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십니다.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이후, 사람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하나님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바사르’라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flesh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영이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은 짐승들처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없는 한갓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소망이 없는 세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소망이 없는 세상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죽었던 영의 생명이 부활한 거듭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 요한복음 5: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는 말씀은 죄로 죽었던 영이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두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라고 하셨습니다. 즉 ‘죽음’이 아니라 ‘잠들었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소망이 없는 세상적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의 차이입니다.
마라나 -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