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원하는 것
*** 사람이 원하는 것 ***
*** 갈라디아서 5:1 ***
미국 노예 해방운동이 있던 때입니다. 북부는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남부에는 아직 노예제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하여 시카고로 갔습니다. 그 흑인 노예는 자신의 인권을 찾아보려고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도망했나?” “아닙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는 곳이 누추해서인가?” “아니요. 살고 있는 집은 썩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럼 주인의 학대가 심했던 모양이군.” “천만에요. 주인의 학대는 없었습니다.” “그럼 일이 몹시 고되었군.” “일은 충분히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럼 자넨 왜 그 좋은 환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가?” 변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노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변호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거든 선생님이 제 대신 노예로 들어가시죠.”
흑인 노예가 갈망했던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축복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늘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고, 무엇엔가 사로잡혀 인간다운 삶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힘들고 답답합니다. 이걸 두고 ‘삶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런 삶의 노예 상태는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의 사람 중에도 많아서 세상에 매여 답답하게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라고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삽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2021년 기준으로, 212개 국가, 5500여 민족, 77억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은 모두 지문이 다르듯이 삶의 방식과 개성도 다릅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잘 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리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환경과 상황, 개인의 성향에 의하여 제각각 자신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잘 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식과 지혜를 구하고,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려 하며, 종교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옛말에 “독불장군은 없다.”라고 하듯이, 사람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속성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그리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시작부터 인간은 공동체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며, 협력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