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
***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 ***
*** 마태복음 15:32 ***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 장군이 런던에서 구세군의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부스는 이에 대하여, “발이 동상에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약 2:15-17).
‘지그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부스 장군의 반문 속에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균형 잃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예수’의 그림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현대 기독인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가? 나는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는 외적인 목적은 ‘사람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지는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무리가 피곤과 굶주림에 지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서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전합니다. 마태복음 15:32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가 마치 인간의 영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육신의 생활이 있고, 그 육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십니다. 굶주리고 지쳐 있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육신의 음식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성도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써야 할 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생활의 필요를 돌보셨음을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됩니다.
- 마라나-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