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속지 않도록 진리에 서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940회 작성일 2021-01-13 15:39
*** 속지 않도록 진리에 서십시오. / 데살로니가후서 2:1-12
 
 데살로니가후서 2:1-12,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니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 질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궁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성경말씀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천국은 어떤 곳일까? 나는 구원을 받았을까? 정말 하나님께서 내 마음까지도 아실까? 과연 종말이 올까?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까? 등등. 지금 이 시점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아마도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는 초대 기독교 시대부터 이어져왔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종말과 재림에 대한 관심들이 많아졌고 예언들도 많이 쏟아졌습니다. 본문말씀의 주된 관심도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본문 1-2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관심을 끄는 것은 환난을 동반하는 종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2000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세계는 두 번째 밀레니엄(millennium, 천년 단위로 연도를 끊은 것)을 앞두고 ‘종말’에 대한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말에 대한 인식이 사그라졌는지 근래에는 종말에 대한 말들이 거의 들리지 않다가 요즘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의 종말이라는 때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를 의미합니다. 즉 메시아가 오신 때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이미 종말의 때를 2000년이나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때를 ‘말세지말(末世之末)’ 즉 ‘종말 중에서도 마지막 때’라고 일컫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종말, 종말 하는데 뭘 보고 종말이라고 하느냐? 세상이 그대로 있는데” 이런 현상을 이미 아셨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4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종말의 때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때에 갑자기 다가오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야 무관심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이며, 본문이 있는 후서는 두 번째 편지로 신약성경의 열네 번째 서신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첫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약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다시 두 번째 편지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를 쓴 시기는 50-52년경입니다. 바울이 두 번째 편지를 쓴 이유는 첫 번째 편지를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교회의 상태를 자세히 기록한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매일 흥분된 마음으로 할 일조차 하지 않고 열광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전에 재림을 암시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일하며 생활에 힘쓰도록 권면합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이 급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광신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의 때에 나타날 징조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드린 말씀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은 속사람인 “영혼이 잘되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모든 것의 기초이며, 영적인 삶의 설계도면이기 때문입니다. 설계도에 따라 조립을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고, 육신도 강건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의 정상적인 순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31-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지금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진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재림신앙입니다.
 
이 재림신앙은 본문말씀에도 기록되었듯이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생겨났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보듯이 초대교회는 재산을 공유하면서 늘 성전에 모여서 함께 먹으며 예배하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사도들은 한 사람씩 순교를 당하게 되고 박해만 심해져 갔습니다. 결국 초대교회는 재림신앙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환경과 상황을 통하여 재정립하게 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지만 재림의 때에 대하여는 섣불리 생각하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4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일들과 그 상황을 소개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예수님의 재림 전에 나타날 일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 배교’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배교의 배경은 박해입니다. 이 박해의 배경은 계시록 13장에 상세하게 나오는데 15-17절을 봅시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5절의 “그가”라고 지칭한 존재는 본문 4절에서 말씀하는 “대적하는 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5-8절에는 사탄의 하수인인 ‘대적 자’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때가 이를 때까지 막는 존재가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9-12절에는 ‘대적하는 자’가 어떤 존재이고,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까지 상세하게 밝힙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대적 자를 통한 미혹의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 불의한 자들을 심판 자리에 서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을 봅시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 말씀은 대적하는 자가 나타나서 하는 일들인데 요한계시록에 자세하게 나타납니다. 계시록 13:12-14절을 봅시다.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하더라.” 이 말씀들에서 가장 주의를 요하게 하는 말씀은 ‘거짓 기적으로 미혹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본문 12절에 있습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세우시기 위하여 거짓을 따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거짓에 미혹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깨어있음은 곧 진리에 서는 것입니다.
 
※ 재림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사도 바울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서 매우 큰 배도가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배반하는 신앙적인 변절(變節)은 기독교가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부터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워진 이후 타락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 초기부터 ‘그노시스(영지주의)’라는 이단을 필두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단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단을 통하여 진리에 서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르던 거짓 교인들이 걸러져 왔습니다. 지금처럼 종말에 서서히 다가서고 있는 이 시기에는 더욱 이단과 거짓된 세력들의 위력이 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마가복음 13:21-22절입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그리고 계시록 12: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마귀는 사람들과 환경들을 이용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진리에서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봤을 듯한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이 횡단보도 앞에서 막 건너려고 할 때, 어느 중년부인이 그 사람의 팔을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빨간 불이 켜진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라고 하자, 청년은 겸연쩍게 대답했습니다. “저기 보세요. 건너가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뭘” 부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지 마세요. 신호등을 보고 가야지요!”
 
신호등보다는 적당하게 지나가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면 영적인 삶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앙생활도 적당하게 하지 뭐.’라는 유혹이 일어납니다. 진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씩 적당하게 하다보면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유혹에 빠져버립니다. 이렇게 미혹에 빠져도 ‘설마 괜찮겠지!’라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버려두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2:10-11절을 봅시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 말씀이 우리를 대단히 두렵게 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시며,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는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며 진리에 서도록 힘써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부철학 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그의 저서인 ‘사랑과 희망’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을 분별하는 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의 표를 몸에 지니고,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며, 함께 할렐루야를 노래하고, 함께 세례를 받으며, 교회에 다니고, 회당의 벽을 세우지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사랑밖에는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신앙의 법 최고봉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살아갑시다. 지금 세상은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르지 않는 교인들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조금 더 힘들고, 조금 더 손해를 보고, 조금 더 수고롭더라도 진리로 살아간다면 결코 마귀의 권세인 세상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 이런 삶을 이루도록 힘써서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두렵지 않는 준비된 주님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Total 1,390건 1 페이지 RSS
설교모음 목록
No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설교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선의 삶
  • 늘푸른
  • 03-26
  • 358
설교문
이기적인 세상, 진실하게 살기
  • 늘푸른
  • 11-19
  • 951
설교문
인생 최고의 기회
  • 늘푸른
  • 09-03
  • 1048
설교문
세상을 이기는 능력
  • 늘푸른
  • 08-13
  • 1034
설교문
내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려면
  • 늘푸른
  • 06-25
  • 1258
설교문
내 삶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 늘푸른
  • 10-24
  • 2109
설교문
내 그릇만큼 채우십니다.
  • 늘푸른
  • 09-20
  • 2188
설교문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
  • 늘푸른
  • 11-16
  • 2195
설교문
알면 알수록 복이 되는 이름
  • 늘푸른
  • 11-08
  • 1814
설교문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
  • 늘푸른
  • 10-17
  • 1313
설교문
하나님의 최고의 보답
  • 늘푸른
  • 09-28
  • 1411
설교문
쓴 물을 달게 바꾸시는 주님
  • 늘푸른
  • 09-15
  • 1692
설교문
지금 필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 늘푸른
  • 08-22
  • 1625
설교문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 늘푸른
  • 08-01
  • 1229
설교문
영적인 메아리의 원리
  • 늘푸른
  • 07-19
  • 1840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