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역사를 예비하십시오.(마17:14-20, 막9:14-29)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885회
작성일
2001-01-23 21:57
♣ 들어가는 말
이 시간에는 지금 대복교회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계획대로라면 이 시간에는 열왕기하19:1-8절의 말씀으로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있어서 말씀이 지금 이 말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말부터 제 나름대로 깊은 고민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해답도 보이지 않고, 길도 보이지 않아 답답함만 더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도망치고 허우적거릴수록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과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교회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만 계속되었습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세력도 대단히 거세었고, 영적인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는 마음에 결단을 촉구하는 강력한 힘을 느껴졌고, 기도의 줄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교회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주님의 뜻으로 알고 추구했던 나 자신의 행동과 확신들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번 주일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순간에, 지금 가장 긴급한 말씀이 이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강권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형식이나 행사나 상투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마음과 생명을 불사하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지금 대복교회 성도들이 영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도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삶의 우선권을 확보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삶의 우선권이 확보되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위한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확보해야 하는 우선권은 무엇입니까?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은 같은 사건에 대한 상호 보완적인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마태복음은 요약된 말씀입니다.
1. 말씀의 배경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의 모습을 나타내셨고, 세 제자들은 두려움과 함께 더할 수 없는 영광에 매료되어 그곳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산 아래의 남은 아홉 제자들은 영적인 실패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벙어리 되고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여 진땀을 흘리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닙니까? 산 위에서는 주님의 신적인 영광이 나타나서 세 제자들이 천국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아홉 제자들이 영적인 실패의 늪에서 좌절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왜 같은 제자들이 이처럼 판이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무엇이 이토록 극과 극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2. 실패의 원인
주님께서는 세 제자들의 환상을 뒤로하시고 서둘러 산을 내려 오셨습니다. 기다리던 제자들의 시선도,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시선도 주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아들의 병세와 제자들의 무능했던 그 동안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제자들의 무능함으로 인하여 불신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반신반의하는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아들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후의 일까지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주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우선권의 문제를 찾아내셨습니까? 영광의 자리와 실패의 자리의 차이를 찾아내셨습니까?
3.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요청
오전에 잠깐 가사를 인용했던 복음송을 기억하십니까? 한 번 불러 볼까요?! ꁾ 복음송, ‘에바다’(악보준비)
영의 삶을 사는 성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주님이 함께 하시느냐?’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동일합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 보여주시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의 모든 삶의 문제가 그러했으며, 신약에서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만 항해할 때, 고통과 죽음의 위기가 있었으며, 주님이 계셨지만 주무시도록 방치했을 때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이 없이는 빈 그물이었지만, 주님이 함께 하실 때는 만선을 이루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신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문제도 하상 주님이 함께 하셨지만, 많은 부분에서 주무시도록 방치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실패했던 아홉 제자들처럼 엉뚱한 열심에 빠져서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주무시도록 방치하거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은 바로 이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길을 열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권을 확보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확보해야 할 우선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는 기도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활동하는 믿음과 기도는 밀접한 연관이 있으면서도 다른 두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패했던 제자들처럼 기도가 없이는 믿음이 활동하지 못합니다. 이는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잘 닦여진 도로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자동차라면, 기도는 도로이며, 주님의 역사는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입니다. 훌륭한 믿음과 끊어지지 아니하는 기도의 교통과 주님의 역사는 땔 레야 땔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입니다.
오전에 드린 말씀과 함께 이 시간의 말씀을 종합하면, 우선권을 확보하고 실천하라는 주님의 요구이십니다. 우선권은 주님의 역사와 활동하는 믿음과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를 충만하게 베푸시기 위한 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강권하심을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주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는 지금 대복교회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계획대로라면 이 시간에는 열왕기하19:1-8절의 말씀으로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있어서 말씀이 지금 이 말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말부터 제 나름대로 깊은 고민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해답도 보이지 않고, 길도 보이지 않아 답답함만 더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도망치고 허우적거릴수록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과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교회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만 계속되었습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세력도 대단히 거세었고, 영적인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는 마음에 결단을 촉구하는 강력한 힘을 느껴졌고, 기도의 줄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교회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주님의 뜻으로 알고 추구했던 나 자신의 행동과 확신들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번 주일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순간에, 지금 가장 긴급한 말씀이 이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강권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형식이나 행사나 상투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마음과 생명을 불사하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지금 대복교회 성도들이 영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도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삶의 우선권을 확보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삶의 우선권이 확보되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위한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확보해야 하는 우선권은 무엇입니까?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은 같은 사건에 대한 상호 보완적인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마태복음은 요약된 말씀입니다.
1. 말씀의 배경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의 모습을 나타내셨고, 세 제자들은 두려움과 함께 더할 수 없는 영광에 매료되어 그곳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산 아래의 남은 아홉 제자들은 영적인 실패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벙어리 되고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여 진땀을 흘리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닙니까? 산 위에서는 주님의 신적인 영광이 나타나서 세 제자들이 천국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산 아래에서는 아홉 제자들이 영적인 실패의 늪에서 좌절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왜 같은 제자들이 이처럼 판이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무엇이 이토록 극과 극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2. 실패의 원인
주님께서는 세 제자들의 환상을 뒤로하시고 서둘러 산을 내려 오셨습니다. 기다리던 제자들의 시선도,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시선도 주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아들의 병세와 제자들의 무능했던 그 동안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제자들의 무능함으로 인하여 불신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반신반의하는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아들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후의 일까지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주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우선권의 문제를 찾아내셨습니까? 영광의 자리와 실패의 자리의 차이를 찾아내셨습니까?
3.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요청
오전에 잠깐 가사를 인용했던 복음송을 기억하십니까? 한 번 불러 볼까요?! ꁾ 복음송, ‘에바다’(악보준비)
영의 삶을 사는 성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주님이 함께 하시느냐?’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동일합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 보여주시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의 모든 삶의 문제가 그러했으며, 신약에서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만 항해할 때, 고통과 죽음의 위기가 있었으며, 주님이 계셨지만 주무시도록 방치했을 때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이 없이는 빈 그물이었지만, 주님이 함께 하실 때는 만선을 이루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신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문제도 하상 주님이 함께 하셨지만, 많은 부분에서 주무시도록 방치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실패했던 아홉 제자들처럼 엉뚱한 열심에 빠져서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주무시도록 방치하거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은 바로 이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길을 열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권을 확보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확보해야 할 우선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는 기도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활동하는 믿음과 기도는 밀접한 연관이 있으면서도 다른 두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패했던 제자들처럼 기도가 없이는 믿음이 활동하지 못합니다. 이는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잘 닦여진 도로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자동차라면, 기도는 도로이며, 주님의 역사는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입니다. 훌륭한 믿음과 끊어지지 아니하는 기도의 교통과 주님의 역사는 땔 레야 땔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입니다.
오전에 드린 말씀과 함께 이 시간의 말씀을 종합하면, 우선권을 확보하고 실천하라는 주님의 요구이십니다. 우선권은 주님의 역사와 활동하는 믿음과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를 충만하게 베푸시기 위한 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강권하심을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주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