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그리스도로(갈1:11-2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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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4-08 20:32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듯 하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따라가면 쉬운 길이지만, 주님을 홀로 두고 모든 것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게 되면 어려운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생의 어렵고 무거운 짐을 당신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시오. 거지 오쟁이 짊어지듯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참고,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가방 같은 자루’를 말함). 즉 ‘죽으나 사나 오직 예수님께 푹 빠져라.’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해 미친다.’고 고백했습니다. 확실히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표어는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이든지 신앙에 있어서든지 열광적이 아니고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정열이 없습니다. 설령 정열이 있다고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쇼윈도 속에 잘 진열되어 있는 물건을 구경하거나 혹은 남에게 보이고자 하듯 마음만 설래이다가 마는 그런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을 나타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속에 푹 빠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신 야고보를 통한 하나님의 표현을 보십시오. 야고보서4:2하-3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부터 3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에서 3년이라는 수는 매우 의미 있는 기간입니다.
①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의 광야 수련 기간을 3년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본문18절), ②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거하시면서 가르치셨던 기간도 3년이었습니다. ③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기를 기다린 기간이 3년이었습니다(눅13:6-7,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④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가르쳤던 기간이 삼년이었습니다(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5:9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요구하신 제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짐승으로써 삼년 된 재물을 최상의 재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행하실 때는 거의 <3> 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3년이라는 기간은 곧 하나님의 정하신 완전한 때를 의미합니다. 즉 인생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완전한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영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보이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시다.
먼저, 바울의 변화 전 모습을 봅시다.
본문13-14절을 읽어봅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의 모습은 13-14절에서 살짝 보여주는 것처럼, 지극히 오만했고 잘못된 자기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행7:54-8:3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부터 시작하여, 사울의 그리스도인 박해에 대한 화려한 전적이 나타나고, 9:1-22에는 사울의 회심과 바울로 거듭나는 과정이 그려져 있음).
사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박해자였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소멸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예법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는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핍박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행9:4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복음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었습니다. 경찰이 하는 일을 방해하면 무슨 죄입니까? 공무집행 방해죄입니다. 국가가 세운 법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질서 유지를 방해해도 큰 죄가 되는데, 사울은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니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사울의 훼방을 행8:3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ꁾ(현대인의 성경)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훼방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은 더욱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핍박 자들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고,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사울의 죄는 복음의 방해꾼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14절을 보십시오.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 동족 중에 자기의 열심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십계명 외에 랍비들이 만든 613개의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율법들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애 버려야 할 암적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그리스도교도들을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었고, 잡아들이는 일에 형사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오만 불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는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잘못된 열심의 소유자였지만, 열정을 가진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ꁾ(참고, 비느하스의 열정). 민25:4-13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나 성도들까지도 이와 같은 열정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열정이 있습니까?
그러면, 바울의 변화와 그 후의 삶을 봅시다.
본문11-12절을 봅시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기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배우거나 익혀서 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기원도 이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누가 나를 전도했고, 누가 나를 가르쳤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ꁾ 고전3:5-9,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ꌀꌀꌀ”
변화의 주도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계획되고, 진행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ꁾ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본문15-17절을 봅시다. 성도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 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복음의 일을 할 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회심 후에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머문 이유도 하나님과만 교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절에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서 “혈육과 의논”이라는 말은 ‘인간적인 어떤 의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내 속에 새로운 것을 넣기 위해서는 있던 것을 비워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일은 복음의 일을 하는 것보다 우선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아시아 지역으로의 전도여행을 계획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본문 앞쪽의 10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바로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 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의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18:6을 통하여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알았으며, 누구를 의지해야 할런지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울이 바울로 된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정하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인내하면서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게 나아갑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듯 하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따라가면 쉬운 길이지만, 주님을 홀로 두고 모든 것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게 되면 어려운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생의 어렵고 무거운 짐을 당신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시오. 거지 오쟁이 짊어지듯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참고,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가방 같은 자루’를 말함). 즉 ‘죽으나 사나 오직 예수님께 푹 빠져라.’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해 미친다.’고 고백했습니다. 확실히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표어는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이든지 신앙에 있어서든지 열광적이 아니고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정열이 없습니다. 설령 정열이 있다고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쇼윈도 속에 잘 진열되어 있는 물건을 구경하거나 혹은 남에게 보이고자 하듯 마음만 설래이다가 마는 그런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을 나타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속에 푹 빠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신 야고보를 통한 하나님의 표현을 보십시오. 야고보서4:2하-3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부터 3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에서 3년이라는 수는 매우 의미 있는 기간입니다.
①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의 광야 수련 기간을 3년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본문18절), ②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거하시면서 가르치셨던 기간도 3년이었습니다. ③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기를 기다린 기간이 3년이었습니다(눅13:6-7,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④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가르쳤던 기간이 삼년이었습니다(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5:9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요구하신 제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짐승으로써 삼년 된 재물을 최상의 재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행하실 때는 거의 <3> 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3년이라는 기간은 곧 하나님의 정하신 완전한 때를 의미합니다. 즉 인생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완전한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영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보이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시다.
먼저, 바울의 변화 전 모습을 봅시다.
본문13-14절을 읽어봅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의 모습은 13-14절에서 살짝 보여주는 것처럼, 지극히 오만했고 잘못된 자기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행7:54-8:3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부터 시작하여, 사울의 그리스도인 박해에 대한 화려한 전적이 나타나고, 9:1-22에는 사울의 회심과 바울로 거듭나는 과정이 그려져 있음).
사울은 하나님의 복음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박해자였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소멸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예법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는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핍박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행9:4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복음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었습니다. 경찰이 하는 일을 방해하면 무슨 죄입니까? 공무집행 방해죄입니다. 국가가 세운 법을 집행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질서 유지를 방해해도 큰 죄가 되는데, 사울은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니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사울의 훼방을 행8:3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ꁾ(현대인의 성경)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훼방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은 더욱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핍박 자들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고, 현실은 또 어떠합니까?
사울의 죄는 복음의 방해꾼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14절을 보십시오.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 동족 중에 자기의 열심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십계명 외에 랍비들이 만든 613개의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율법들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애 버려야 할 암적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그리스도교도들을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었고, 잡아들이는 일에 형사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오만 불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는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잘못된 열심의 소유자였지만, 열정을 가진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ꁾ(참고, 비느하스의 열정). 민25:4-13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나 성도들까지도 이와 같은 열정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열정이 있습니까?
그러면, 바울의 변화와 그 후의 삶을 봅시다.
본문11-12절을 봅시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기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배우거나 익혀서 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기원도 이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누가 나를 전도했고, 누가 나를 가르쳤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ꁾ 고전3:5-9,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ꌀꌀꌀ”
변화의 주도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계획되고, 진행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ꁾ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본문15-17절을 봅시다. 성도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 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복음의 일을 할 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회심 후에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머문 이유도 하나님과만 교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절에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서 “혈육과 의논”이라는 말은 ‘인간적인 어떤 의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내 속에 새로운 것을 넣기 위해서는 있던 것을 비워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일은 복음의 일을 하는 것보다 우선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아시아 지역으로의 전도여행을 계획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본문 앞쪽의 10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바로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 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의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18:6을 통하여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알았으며, 누구를 의지해야 할런지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울이 바울로 된 것처럼, 우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정하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인내하면서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