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선입견(막6:1-6)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930회 작성일 2001-07-20 23:40
Title 선입견 / Scripture 막6:1-6 / Space 대복교회

*** 들어가는 말

목수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들고 건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전 세상 직업이 목수였습니다. 요한복음14:2-3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건축하시니 확실한 목수이심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인하여 무한한 능력이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시던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지혜가 번뜩였고, 그의 행하시는 큰 권능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머무신 세상적인 환경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들은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능력을 출신 환경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습니다. 우리 옛 선조들도 ‘분수에 맞게 살아야 된다.’는 뜻으로, ‘지렁이는 흙을 먹고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출신답지 않고 분수에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천한 삶을 자청하고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가 이름도 없는 나사렛에서 나겠느냐? 그리고 더욱이 비천하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겠느냐? 라는 것이 그들의 선입견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선입견에는 일가견이 있는 민족입니다. 예로부터 사람의 됨됨이보다는 출신지와 계급과 신분이 우선되었습니다. 양반, 상놈을 구별 지어 놓고, 아무리 덜 떨어진 사람이라도 양반 출신이면 존경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똑똑해도 백정 가문 출신이면 경멸뿐만 아니라 모든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사상이 아직 교회에 마저 남아있습니다. 교회에서마저 가난한 자와 부자를 구별하고, 출신학교와 사회적 지위를 구별하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이런 행태는 당장 버려야 합니다. 출신지나 환경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런 사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제거되어야 할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20).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실 때는 결코 선입견을 갖지 않으십니다. 부모덕에 천국 가는 사람도, 아내 덕에 천국 가는 남편도 없을 것이고, 수단 좋고 말 잘한다고 천국 가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각자 행한 대로 판단하시고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이빨이 시릴 일은 없다’(렘31:29)고 하셨고,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지라.’(겔18:2-4)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가 막혀 하시는 당장 버려야 할 선입견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 선입견은 진실을 가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입사 시험을 위하여 남자들이 여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메이커 업’을 하고, ‘성형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첫 인상에서 풍기는 선입견을 줄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겠지요. 사람들은 외모에서 풍기는 모습에서 1차 평가를 내립니다. ‘도적 같은 인상이다.’, ‘샌님 같다.’등등. 그리고 출신 학교, 출신 지역, 가문 등을 두고 2차, 3차의 평가를 내립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편견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애써 부정하려고만 했습니다. 이 같은 선입견은 사람들의 진가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외모에 치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성인군자 같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무덤 속에는 송장이 썩고 있는데, 무덤의 바깥쪽은 하얀 회를 칠해서 더러움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식적임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사람이므로 마땅히 영이 아름답고 생활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마음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2. 선입견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좌절을 일으킵니다.

요즈음 방송에서 ‘개인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학교나 직장에서조차 ‘개인기’가 없으면 대우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토크쇼’에서 연예인들은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흥미를 돋우기 위하여 ‘꾸며진 말’에 열을 올립니다. 그뿐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번지는 병이 있습니다. ‘다이어트 열병’입니다. 이는 지금의 세상이 사람들의 말주변과 외적인 흥미, 외모로 평가되는 세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소외’되지 않으려고, ‘왕따’되지 않으려고 함께 열을 올립니다.
하지만 목수이신 예수님은 목재의 재질을 보시고 건축 가능성을 봅니다. 일반인들은 아무런 쓸모를 발견하지 못하는 버려진 나무에서도 목수는 쓰임새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나무의 모양새를 보고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열매를 보고 평가하십니다.

1)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라고 선입견을 나타내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요9:1-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눅6:43-4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적인 모습과 세상적인 능력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인 영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2)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법대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영적인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요한복음8:4-5절을 봅시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10-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3)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행위를 낭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내면에 있는 영적인 목적을 보셨습니다. ꁾ 마26:6-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4) 사람들이 가까이 있기조차 꺼려하는 죄인이 있었습니다. 난쟁이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이 그 가정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눅19:1-10)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평가했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쓸모없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심지어 악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잠언 16:4절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것이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여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 또한 외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좌절과 절망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오히려 불신앙의 요소입니다.

3. 선입견은 주님의 능력을 가로막습니다.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선입견에 의한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편견들이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언의 은사나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방언 등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을 사모합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은사의 추구는 신앙에 대한 편견을 부릅니다. 은사의 목적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은사만 추구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앞서게 되고,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가로막게 됩니다.

마가복음 9장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 산에 오르신 후, 귀신들린 아들과 함께 그의 부친이 남은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미심쩍은 청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아이 아버지의 불신앙은 제자들의 무능의 경험으로 인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저 모양인데 선생인들 능력이 있을까?’ 라는 반신반의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선입견도 좋지 못한데 주님께 대한 선입견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진리에 대한 신뢰이며,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현재적입니다.

여러분은 불합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지난 일들이나 어떤 사람의 지난 모습들로 인하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대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지금의 모습과 그 내면을 봅시다. 그리하여 지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늘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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