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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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12-08 23:14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 마1:18-21
** 들어가는 말
‘스트로맨’이라는 신앙 연구원이 교회를 드나드는 청년 7천명을 대상으로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대하여 연구 조사했습니다. 그 내용 중의 일부를 보면,
1.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0%이상이 ‘선한생활에 힘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 하나님이 참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습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통계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통계에서 교회 안에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로주의는 자기 교만의 일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공로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2:8,9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공로를 쌓으려고 합니다. 성도들도 헌금, 봉사, 구제, 섬김, 심지어 전도와 기도와 예배생활까지 자신의 공로로 쌓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책망과 함께 천국 시민권마저 박탈당하게 됩니다. 마태복음7:21-23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음’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많은 공로를 쌓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의 말씀은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성실하고 의로운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인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상고해 봅시다.
1.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는 ‘요셉’이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요셉>은 예수님의 육신의 부친이 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요셉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와 애굽으로 피난할 때, 그리고 12세가 되어 하나님께 보이는 전례를 행할 때까지 잠깐씩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셉은 유다 지파에 속했으며, 베들레헴 출신으로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메시아가 예언된 가문입니다. 창세기49:8-10절에서 야곱의 12아들에 대한 축복을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실로’라는 말이 ‘메시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영광이 왜 장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네 번째 아들인 <유다>에게 주어졌겠습니까? 이는, 위로 세 형들이 모두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지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영적으로 장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장자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야곱’도 분명히 차자였고, ‘유다’는 네 번째였으며, ‘다윗’은 이새의 막내인 여덟 번째였습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영적인 장자의 복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그 원리는 같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며,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요셉의 가문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가문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면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부정하게 잉태했을 때는 율법의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신명기22:23-24절에서,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ꀞ”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요셉에게 있어서는 약혼녀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잉태했다는 사실은 어떤 관용도 베풀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혼인의 언약을 끊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성령께서 요셉에게 마리아에 대한 진상을 밝혀주셨습니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까?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의 부정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요셉은 의심 없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하시며,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의 선행은 자신의 공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마리아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성실함과 관용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나타내시며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면, 생활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한 일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면서 생활 속에서 선한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선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선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누가복음2:21-24절을 봅시다.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예수님이 탄생하자 요셉은 모세의 율법대로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했으며, 천사의 수태 고지 때 명령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정결법대로 33일 후에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명하신 ‘할례’와 장자에게 해당되는 ‘헌신례’와 여인의 ‘정결례’까지 빈틈없이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의 진실한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노라 하면서 그의 법을 어긴다면, 이는 외식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생활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고, 야고보서1: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워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이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며칠 뒤, 랍비는 그 젊은이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거들어 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해 돈을 보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생각한 건 이내 행위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 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만다. 마음을 밭갈이함은 두뇌를 밭갈이함보다 더 값지다.”
랍비의 가르침은 ‘바른 것을 배우기보다 바른 것을 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번 대강절과 2002 회기에는 말씀을 하나하나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이루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스트로맨’이라는 신앙 연구원이 교회를 드나드는 청년 7천명을 대상으로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대하여 연구 조사했습니다. 그 내용 중의 일부를 보면,
1.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0%이상이 ‘선한생활에 힘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 하나님이 참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습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통계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통계에서 교회 안에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로주의는 자기 교만의 일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공로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2:8,9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공로를 쌓으려고 합니다. 성도들도 헌금, 봉사, 구제, 섬김, 심지어 전도와 기도와 예배생활까지 자신의 공로로 쌓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책망과 함께 천국 시민권마저 박탈당하게 됩니다. 마태복음7:21-23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음’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많은 공로를 쌓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의 말씀은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성실하고 의로운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인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상고해 봅시다.
1.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는 ‘요셉’이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요셉>은 예수님의 육신의 부친이 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요셉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와 애굽으로 피난할 때, 그리고 12세가 되어 하나님께 보이는 전례를 행할 때까지 잠깐씩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셉은 유다 지파에 속했으며, 베들레헴 출신으로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메시아가 예언된 가문입니다. 창세기49:8-10절에서 야곱의 12아들에 대한 축복을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실로’라는 말이 ‘메시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영광이 왜 장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네 번째 아들인 <유다>에게 주어졌겠습니까? 이는, 위로 세 형들이 모두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지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영적으로 장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장자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야곱’도 분명히 차자였고, ‘유다’는 네 번째였으며, ‘다윗’은 이새의 막내인 여덟 번째였습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영적인 장자의 복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그 원리는 같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며,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요셉의 가문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가문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면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부정하게 잉태했을 때는 율법의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신명기22:23-24절에서,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ꀞ”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요셉에게 있어서는 약혼녀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잉태했다는 사실은 어떤 관용도 베풀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혼인의 언약을 끊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성령께서 요셉에게 마리아에 대한 진상을 밝혀주셨습니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까?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의 부정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요셉은 의심 없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하시며,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의 선행은 자신의 공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마리아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성실함과 관용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나타내시며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면, 생활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한 일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면서 생활 속에서 선한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선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선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누가복음2:21-24절을 봅시다.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예수님이 탄생하자 요셉은 모세의 율법대로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했으며, 천사의 수태 고지 때 명령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정결법대로 33일 후에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명하신 ‘할례’와 장자에게 해당되는 ‘헌신례’와 여인의 ‘정결례’까지 빈틈없이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의 진실한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노라 하면서 그의 법을 어긴다면, 이는 외식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생활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고, 야고보서1: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워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이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며칠 뒤, 랍비는 그 젊은이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거들어 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해 돈을 보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생각한 건 이내 행위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 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만다. 마음을 밭갈이함은 두뇌를 밭갈이함보다 더 값지다.”
랍비의 가르침은 ‘바른 것을 배우기보다 바른 것을 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번 대강절과 2002 회기에는 말씀을 하나하나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이루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