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행9:36-43)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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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11-05 11:03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이며, 교회는 지금도 이 둘을 모두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모임이 금요기도회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모임이 주일예배입니다. 물론 주일예배는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예수님으로 인한 부활의 기쁨과 감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활절도 아닌데 부활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장 활력 있게 하는 중심축이 ‘부활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부활과 부활신앙은 어떻게 다르고 왜 필요합니까?
처음 사람인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사람은 동물적인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람이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의 생명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영의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제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자 예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막10:45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위함이라고 믿기만 하면, 예수님께로 죄가 전가되어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거짓이 없는 진정한 것이라면 즉시 죄 사함이 이루어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죄의 종’의 신분에서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유의 사람은 속전을 지불하신 하나님께로 속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도’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이 영의 생명이 회복되는 순간이며 영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 곧 영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영의 생명을 회복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로서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부활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삶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던 가치관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인 가치관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생활은 부활신앙이 중심이 되어야 영이 성장하고 각종 영적인 삶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즉 성령의 열매(갈5:22,23)들과 빛의 열매(엡5:9), 평안과 기쁨과 만족과 감사, 삶의 형통함이 이루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밥과 고기를 먹고 뛰어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 정상적인 성장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영적인 출생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이 거듭나서 부활의 사람이 된 것으로 능력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많은 유혹과 염려와 불안, 고통 등의 환경 속에서 부활신앙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영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장성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이 사실들을 확인하게 해 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 부활의 생명은 성도의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1) 먼저 본문을 이해합시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비다’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인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여제자입니다. 성경은 다비다가 행한 “선행과 구제의 일이 심히 많았다”고 증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에는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증거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다비다의 죽음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들은 다비다의 생전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적을 바라고, ‘룻다’에 머물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생전에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가를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다비다의 생명을 간구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베드로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다비다의 생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하여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실제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부활의 현재성을 말씀하셨고, 고린도후서5:17절 말씀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생활 속에서 부활의 삶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다비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2) 부활의 생명은 말씀으로 인하여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표구되어 벽에 걸려 있는 성도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활 속에서 활동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도들은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보다 많은 말씀을 접하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삶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무능해졌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니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지를 않습니다. 그저 항상 듣는 좋은 말로 지나쳐 버립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는 능력을 행하실 수 없어서 다만 몇몇 병자들만 고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막6:4-6).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무능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함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다시 살리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는 그들을 내어 보내고, 하나님께 간구 했고, 하나님께서는 다비다의 생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이는 다비다가 살아 있을 당시의 삶의 결과이며, 주변 인물들의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믿음은 능력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오늘 암울한 우리 시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버린 우리의 가슴에서, 말씀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3) 부활의 생명은 실천되는 생활 속에서 나타납니다.
다비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말씀을 녹여 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주변에는 과부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삶의 열매였습니다.
<소금>은 모든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명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소금이 녹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맛을 내지 않는 소금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을 살게 하는 절대적인 생명적 요소입니다. 신명기8:3절 하반 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으로 살게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도, 성도의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27절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비다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사도들의 말씀 증거와 성도들의 말씀 실천에 있었습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말씀에 근거한 성도들의 피땀 어린 봉사가 합하여질 때 교회는 부흥하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여러분은 영의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확실하게 믿는다면, 이제 내게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와 감사가 넘치는 능력 있는 생활을 이루기 위해서 두 가지를 분명히 합시다.
첫째, 내 생명과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실천할 때 우리의 영과 육신의 삶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하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약속하신다면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할 때에 아멘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이며, 교회는 지금도 이 둘을 모두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모임이 금요기도회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모임이 주일예배입니다. 물론 주일예배는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예수님으로 인한 부활의 기쁨과 감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활절도 아닌데 부활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장 활력 있게 하는 중심축이 ‘부활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부활과 부활신앙은 어떻게 다르고 왜 필요합니까?
처음 사람인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사람은 동물적인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람이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의 생명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영의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제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자 예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막10:45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위함이라고 믿기만 하면, 예수님께로 죄가 전가되어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거짓이 없는 진정한 것이라면 즉시 죄 사함이 이루어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죄의 종’의 신분에서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유의 사람은 속전을 지불하신 하나님께로 속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도’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이 영의 생명이 회복되는 순간이며 영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 곧 영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영의 생명을 회복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로서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부활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삶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던 가치관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인 가치관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생활은 부활신앙이 중심이 되어야 영이 성장하고 각종 영적인 삶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즉 성령의 열매(갈5:22,23)들과 빛의 열매(엡5:9), 평안과 기쁨과 만족과 감사, 삶의 형통함이 이루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밥과 고기를 먹고 뛰어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 정상적인 성장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영적인 출생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이 거듭나서 부활의 사람이 된 것으로 능력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많은 유혹과 염려와 불안, 고통 등의 환경 속에서 부활신앙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영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장성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이 사실들을 확인하게 해 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 부활의 생명은 성도의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1) 먼저 본문을 이해합시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비다’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인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여제자입니다. 성경은 다비다가 행한 “선행과 구제의 일이 심히 많았다”고 증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에는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증거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다비다의 죽음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들은 다비다의 생전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적을 바라고, ‘룻다’에 머물고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생전에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가를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다비다의 생명을 간구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베드로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다비다의 생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하여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실제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부활의 현재성을 말씀하셨고, 고린도후서5:17절 말씀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생활 속에서 부활의 삶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다비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2) 부활의 생명은 말씀으로 인하여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표구되어 벽에 걸려 있는 성도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활 속에서 활동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도들은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보다 많은 말씀을 접하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삶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무능해졌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니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지를 않습니다. 그저 항상 듣는 좋은 말로 지나쳐 버립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는 능력을 행하실 수 없어서 다만 몇몇 병자들만 고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막6:4-6).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무능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함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다시 살리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는 그들을 내어 보내고, 하나님께 간구 했고, 하나님께서는 다비다의 생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이는 다비다가 살아 있을 당시의 삶의 결과이며, 주변 인물들의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믿음은 능력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오늘 암울한 우리 시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버린 우리의 가슴에서, 말씀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3) 부활의 생명은 실천되는 생활 속에서 나타납니다.
다비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말씀을 녹여 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주변에는 과부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삶의 열매였습니다.
<소금>은 모든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명적 요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소금이 녹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맛을 내지 않는 소금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을 살게 하는 절대적인 생명적 요소입니다. 신명기8:3절 하반 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으로 살게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도, 성도의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1:27절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비다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사도들의 말씀 증거와 성도들의 말씀 실천에 있었습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말씀에 근거한 성도들의 피땀 어린 봉사가 합하여질 때 교회는 부흥하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여러분은 영의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확실하게 믿는다면, 이제 내게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와 감사가 넘치는 능력 있는 생활을 이루기 위해서 두 가지를 분명히 합시다.
첫째, 내 생명과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실천할 때 우리의 영과 육신의 삶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하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약속하신다면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할 때에 아멘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