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받으라(고후1:3-11)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10,206회
작성일
2001-10-27 22:15
***들어가는 말
세상사는 것이 많이 피곤하시지요? 요즈음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음을 우울하고 어둡게 합니다. “하늘 보아도 땅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쉴 곳이 없는 안개와 같은 우리네 인생을 사랑하신 주님”복음성가(724) 가사처럼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두려움이나 근심에 쌓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두렵게 여깁니까? 아마도 예고 없이 다가오는 환난과 고통일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질병이나 사고, 시련, 죽음 등의 환난도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어느 여 성도의 고백입니다.
“목사님, 내가 시집살이 하는 동안 우리 영감 때문에 그나마 살았답니다. 시어머니가 어찌나 못살게 하시던지 도저히 살수가 없었어요. 치마 뒤집어쓰고 깊은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고,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고도 했고,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밤에 밤들기 전에 말없이 제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답니다. 거칠거칠한 손, 고되게 일한 그 큰손으로 꼬옥 잡아 주면 눈물이 흘러 넘쳤지요.”
이제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그 여 성도는 남편 때문에 시집살이를 견디고 사셨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말없이 잡아주는 그 손길이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난만 예고하신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크고 많을수록 예비 된 ‘위로’도 더욱 풍성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고난과 위로는 항상 붙어 다니는 이웃사촌쯤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어려울 때마다 인자하신 손길로 우리를 꼬옥 잡아주십니다. 이사야46:3,4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노래로 고백해 봅시다. 복음성가 842번 “주님 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 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먼저, 위로가 필요한 성도의 현실을 봅시다.
성도,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대접을 우리도 받게 되리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5: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시면서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 받을 것과 그 이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통 받는 것이 싫어서 세상과 비슷한 색깔을 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타협적인 삶은 오히려 더욱 큰 고통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양심 때문에 세상에서의 즐거움도 마음대로 누릴 수가 없고,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하여 신앙의 기쁨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을 따르는 성도는 죄악으로 부패한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므로 세상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고난이 따릅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에서 성도가 당면하는 환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을 말합니다. 그 사실은 본문에 사용된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사용된 ‘환난’이라는 말은 ‘극심한 중압감’, ‘눌리고 짓밟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 밑에 깔려버린 가축을 연상케 하는 그런 말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 3-7절에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성도가 이렇게 고난을 당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위로해 줍니까? 오히려 말거리를 삼아 조롱하고 따돌립니다. 자신들의 어두움이 성도들의 밝음으로 인하여 드러나지 못하도록 거짓으로 헐뜯고 더욱 비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3:20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세상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이처럼 고난과 아픔만 주어진다면 아마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로 ‘위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야 합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있다고 해서 세상적인 위로를 구한다면 결코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를 위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인생의 모든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를 위로하십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한 가정이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 홀로 아들을 키워왔는데, 그 아들이 친구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난폭하게 달리다가 사고를 낸 것입니다. 가슴앓이로 몸져누운 그 성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목사님이 심방을 하고, 전도사가 심방을 하고, 성도들이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님은 좀처럼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있은 몇 주일 후 그 성도님이 많이 회복한 모습으로 교회를 왔습니다. 다음 날 심방을 한 저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가난한 가정의 노 성도님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노 성도님은 특이한 병으로 아들을 둘씩이나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던 분이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목회자의 위로보다도 성도들의 위로보다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는 이러한 위로입니다. 극한 가난과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모진 고통과 멸시를 받으시고, 끝내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곧 본문5,6절에서 하시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위로를 바라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의 위로가 현실적이며 동시에 소망을 든든하게 하는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계속 고난만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의 체질과 형편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환난을 받은 만큼 위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4:16절 말씀처럼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과 위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환난을 허용하시고, 또한 위로를 베푸시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성도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매일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따진다면 바울을 따를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 바울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 만큼’고생을 한 이유가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부족함이 없고 편안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더라도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큰 소망이 있든지, 인생이 힘들고 괴로움이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의지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난과 위로를 통하여 성도들이 서로를 위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이 모질어지거나 낙심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 중의 감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입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하여 성도가 할 수 있는 큰 도움은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고난 중에 다른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것이 큰 힘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인내를 이루게 하고 그 인내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을 잊지 맙시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서로를 위로하며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충만한 삶이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사는 것이 많이 피곤하시지요? 요즈음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음을 우울하고 어둡게 합니다. “하늘 보아도 땅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쉴 곳이 없는 안개와 같은 우리네 인생을 사랑하신 주님”복음성가(724) 가사처럼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두려움이나 근심에 쌓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두렵게 여깁니까? 아마도 예고 없이 다가오는 환난과 고통일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질병이나 사고, 시련, 죽음 등의 환난도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어느 여 성도의 고백입니다.
“목사님, 내가 시집살이 하는 동안 우리 영감 때문에 그나마 살았답니다. 시어머니가 어찌나 못살게 하시던지 도저히 살수가 없었어요. 치마 뒤집어쓰고 깊은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고,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고도 했고,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밤에 밤들기 전에 말없이 제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답니다. 거칠거칠한 손, 고되게 일한 그 큰손으로 꼬옥 잡아 주면 눈물이 흘러 넘쳤지요.”
이제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그 여 성도는 남편 때문에 시집살이를 견디고 사셨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말없이 잡아주는 그 손길이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난만 예고하신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크고 많을수록 예비 된 ‘위로’도 더욱 풍성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고난과 위로는 항상 붙어 다니는 이웃사촌쯤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어려울 때마다 인자하신 손길로 우리를 꼬옥 잡아주십니다. 이사야46:3,4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노래로 고백해 봅시다. 복음성가 842번 “주님 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 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먼저, 위로가 필요한 성도의 현실을 봅시다.
성도,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대접을 우리도 받게 되리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5: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시면서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 받을 것과 그 이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통 받는 것이 싫어서 세상과 비슷한 색깔을 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타협적인 삶은 오히려 더욱 큰 고통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양심 때문에 세상에서의 즐거움도 마음대로 누릴 수가 없고,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하여 신앙의 기쁨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을 따르는 성도는 죄악으로 부패한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므로 세상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고난이 따릅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에서 성도가 당면하는 환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을 말합니다. 그 사실은 본문에 사용된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사용된 ‘환난’이라는 말은 ‘극심한 중압감’, ‘눌리고 짓밟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 밑에 깔려버린 가축을 연상케 하는 그런 말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 3-7절에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성도가 이렇게 고난을 당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위로해 줍니까? 오히려 말거리를 삼아 조롱하고 따돌립니다. 자신들의 어두움이 성도들의 밝음으로 인하여 드러나지 못하도록 거짓으로 헐뜯고 더욱 비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3:20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세상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이처럼 고난과 아픔만 주어진다면 아마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로 ‘위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야 합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있다고 해서 세상적인 위로를 구한다면 결코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를 위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인생의 모든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를 위로하십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한 가정이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 홀로 아들을 키워왔는데, 그 아들이 친구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난폭하게 달리다가 사고를 낸 것입니다. 가슴앓이로 몸져누운 그 성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목사님이 심방을 하고, 전도사가 심방을 하고, 성도들이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님은 좀처럼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있은 몇 주일 후 그 성도님이 많이 회복한 모습으로 교회를 왔습니다. 다음 날 심방을 한 저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가난한 가정의 노 성도님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노 성도님은 특이한 병으로 아들을 둘씩이나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던 분이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목회자의 위로보다도 성도들의 위로보다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는 이러한 위로입니다. 극한 가난과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모진 고통과 멸시를 받으시고, 끝내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곧 본문5,6절에서 하시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위로를 바라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의 위로가 현실적이며 동시에 소망을 든든하게 하는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계속 고난만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의 체질과 형편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환난을 받은 만큼 위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4:16절 말씀처럼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과 위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환난을 허용하시고, 또한 위로를 베푸시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성도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매일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따진다면 바울을 따를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 바울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 만큼’고생을 한 이유가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부족함이 없고 편안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더라도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큰 소망이 있든지, 인생이 힘들고 괴로움이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의지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난과 위로를 통하여 성도들이 서로를 위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이 모질어지거나 낙심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 중의 감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입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하여 성도가 할 수 있는 큰 도움은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고난 중에 다른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것이 큰 힘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인내를 이루게 하고 그 인내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을 잊지 맙시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서로를 위로하며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충만한 삶이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