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대 속에서 이룬 꿈 / 마15:21-28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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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1-26 22:16
♡♥♡ 냉대 속에서 이룬 꿈 / 마15:21-28
***들어가는 말
사람의 생애 중에는 여러 가지 환경과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기쁨이 있고 흡족한 환경과 일이 있는가 하면, 원하지 않는 슬픔이나 아픔을 주는 환경과 일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힘을 잃게 하고 마음이 서글퍼지게 하는 것은 환경이나 일이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차가운 냉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나 시끄럽게 굴었든지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시끄러우니 빨리 소원을 들어주어 보내시지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부르스’라는 왕이 이웃 왕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져 깊은 산골 조그만 오두막에 몰래 숨어 있었습니다. 오랜 싸움에 몹시 지친 왕은 절망 속에서 비통해 하고 있었습니다. “아! 정말 피곤하구나. 이젠 내 몸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도 끝이구나!”라며 탄식했습니다.
이렇게 슬픔과 탄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은행 알만한 거미 한마리가 처마 끝에서 나오더니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처마 밑이 꽤나 미끄러웠는지 거미줄 한 쪽 끝이 좀처럼 달라붙지를 않았습니다.
뒷다리로 거미줄 끝을 처마에 붙이고는 꽁무니에서 줄을 뽑으며 내려오다가는 ‘툭’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서 또 붙입니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거미는 끈질기게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거미그물을 완성했습니다.
이를 끝까지 지켜 본 부르스 왕은 거미의 끈질긴 행동에 다시 용기를 내어 군사를 규합하고 훈련을 시켜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 지르던 여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냉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서 길을 막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냉대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천대하는 투의 거절을 했습니다.<br><br>가나안 여인은 그 자존심 구기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국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답변을 받아냈습니다.<br><br>예수님께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신 사람은 불과 두 사람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은 마태복음8:5-13절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이며, 또 한 사람이 본문의 ‘가나안’ 여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의 태도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1. 먼저, 여인의 현실입니다.
여인은 유대인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딸의 고통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 여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소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던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수많은 무리를 뚫고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인에게는 위신과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오히려 서러운 냉대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가서 길을 막고 꿇어 엎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더욱 심한 냉대를 표현하셨습니다.
2. 여기에서, 예수님의 반응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여인의 적극적이고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무나 냉랭했습니다. 여인의 처음 부르짖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무반응’입니다. 여인의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주변의 제자들이 귀찮은, 혹은 동정심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예수님께 적당히 고쳐서 보내시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저 여인은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정도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돌아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유대교를 믿거나 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개종자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여인이 당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특히 간절함을 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여인을 자극합니다. 예수님 앞에 와서 절하며 간청하는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현대어 성경의 번역을 봅시다.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개’를 ‘강아지’로 번역한 것이 다른 데, 이는 거리를 배회하는 사납고 더러운 개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하는 듯한 표현을 하신 것은 이 이방 여인이 당시의 관습을 잘 알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방인을 개로, 유대인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다는 것은 ‘개’를 ‘강아지’로 표현하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신뢰도와 간절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3.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자세를 배웁시다.
여인의 현실도 보았고,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의미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소망의 성취 부분이 남았습니다. 크게 세 차례로 나누어진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은 점차 강도가 더한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항은 여인의 자세 또한 깊이를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여인은 자신의 소망을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무반응에 대하여 더욱 간절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냉대에 대하여,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와서 길을 막고 엎드렸습니다. 네 번째, 신분을 구별하는 예수님의 차별에 대하여, 여인은 사실대로 인정하면서 강아지를 향하는 주인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스펄전’목사님이 자기 제자들을 런던 거리에서 옥외집회를 열도록 보냈습니다. 날마다 그들이 보고하러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공했고 다른 이들은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은사와 재능을 거의 못 갖춘 젊은이가 풀이 죽은 채 목사님께 왔습니다.
“목사님, 나는 왜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옥외집회에 참석해서 충실히 설교도 하고 죽을 힘을 다했는데, 나의 호소에 응답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그 젊은이를 보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시리라고 기대합니까?” 그 젊은이는 당황스러워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죠. 나는 추측 못합니다. 당연히 못하지요. 나는 그것을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직 교육도 마치지 못했고. 다른 이들처럼 많은 은사와 재능도 없습니다. 아니. 나는 틀린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 때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결과를 못 보는 이유입니다.”
그 젊은이는 믿음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결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여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믿음의 결과를 간절하게 기대했기 때문에 그처럼 끈질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대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딸을 고쳐주겠다.’든지, ‘귀신을 명하여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여인이 ‘기대하고 있는 소망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온 목적을 이루고 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이며, 둘째는 어떠한 방해와 냉대가 있더라도 그럴수록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셋째는 소망하는 결과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방법은 예수님께서 여러 곳에서 거듭 강조하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환경이 어둡습니까? 아니면 냉대가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입니다. 이 여인처럼 주님을 향하는 신뢰와 더욱 간절함과 성취에 대한 기대로 주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복된 삶이 항상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