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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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1-19 18:18
♡♥♡ 하나님의 시간표 / 요한복음11:1-6, 39-44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의 궁금증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것 중에는 ‘미래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찾고, 용하다는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고,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관심은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예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이루어질지의 여부, 그리고 직장이나 학교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또한 자신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것 중에 하나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삶’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인간은 무엇을 사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하엘’이란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일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베풀어져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미하엘이 일하는 구둣방에 왔습니다. 그는 미하엘에게 “한 일년 동안 신을 수 있는 튼튼한 구두를 만들어 주시오.”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미하엘이 보니 그 신사 옆에 죽음의 천사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1년…’운운하는 것을 본 미하엘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은 죽음의 시간임을 알고 엷게 웃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언27:1절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고, 야고보서4:14절에서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깨우치십니다.
이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성실하게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수없이 많은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그 중에서 ‘나사로’의 가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요약하여 정리해 봅시다.
나사로의 가족은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전부이며. 세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을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가장이자 기둥이었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두 자매는 급하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으니 빨리 와 주십시오.’라고 전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대답하시면서 태연하게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결국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음을 알리시면서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으며, 장사까지 치루고 난 후였습니다. 통곡하면서 예수님이 늦게 오셨음을 원망하는 자매를 위로하시면서 예수님은 ‘부활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사로는 시신을 샀던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이 사건 속에는 두 가지의 관점과 두 가지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사로의 병듦과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려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두 자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힘이 되어주던 오빠의 병으로 인한 위독함은 현실적인 삶의 위기였습니다. 이러한 다급함 속에서 능력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체하심으로 인하여 오빠는 죽음을 맞이했고, 자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매어달립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는 사람의 관점이며,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시간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느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자매의 다급하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시고서도 오히려 무엇을 기다리시듯 이틀을 더 지나고서야 베다니로 향하신 ‘예수님의 관점과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후, 그것도 나흘씩이나 지나서 장례는 치러졌고 이미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는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이며, 측정할 수 없는 ‘정한 때’를 나타내는 ‘카이로스’라는 시간입니다. 이 ‘정한 때’가 바로 하나님의 시간표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간표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뒤에 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뒤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일이든 주님보다 앞서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가 무엇엔가 쫓기면서 바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너무나 바쁘고 시간이 없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없고 찬송할 수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조용히 말씀을 읽고 주님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 일에 봉사할 일이 많기 때문에 말씀과 기도로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주님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농부는 창문을 활짝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농부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꽃은 모두 시들어 볼품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아름다운 일들을 보았지만, 다른 일들로 바빴기 때문에 한 번도 그 아름다움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어느 날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일에 바빠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주님과의 시간을 배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쁘다’, ‘시간이 없다.’, ‘차차 하지!’, ‘조금만 더 있다가!’, ‘이 일만 끝내고 하지!’ 하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을 앞세우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일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원을 준비도 못한 채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내가 바쁘다고 하나님도 바쁘십니까? 내가 서두른다고 하나님께서 내 뜻에 맞추어 서두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찍 오시는 법도 없으시고, 늦게 오시는 법도 없으십니다. 정확한 때 정확한 시간에 오십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은 위급한 일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긴급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아직 ‘정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지체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인 ‘정한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이것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면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1703-91)’는 시간을 아껴 쓴 사람으로 유명한데 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있어서 안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간을 낭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을 많이 하기로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1732-99)’을 꼽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는지’그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특별히 없습니다. 단지 날마다 4시에 일어나 남들이 자는 시간에 두 시간씩은 더 일을 한 것이지요. 습관이고 결심일 뿐입니다.”
시간과 밀물은 어떤 사람도 막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한다면 주님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바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떠오르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시간표를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의 시간표를 점검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무시하고 빠르게 달린다고 목적지에 먼저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지를 잃고 표류할 뿐입니다.
지난주 말씀 결론에서 제안한 두 가지를 기억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실천하고 계십니까? 이는 그냥 제안이 아니라 영의 성공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하루 한 시간씩을 하나님의 시간표를 점검하는 시간으로 하십시오. 하루 한 시간도 투자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6: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의 궁금증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것 중에는 ‘미래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찾고, 용하다는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고,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관심은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예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이루어질지의 여부, 그리고 직장이나 학교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또한 자신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될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것 중에 하나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삶’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인간은 무엇을 사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하엘’이란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일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베풀어져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미하엘이 일하는 구둣방에 왔습니다. 그는 미하엘에게 “한 일년 동안 신을 수 있는 튼튼한 구두를 만들어 주시오.”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미하엘이 보니 그 신사 옆에 죽음의 천사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1년…’운운하는 것을 본 미하엘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은 죽음의 시간임을 알고 엷게 웃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언27:1절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고, 야고보서4:14절에서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깨우치십니다.
이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성실하게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수없이 많은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그 중에서 ‘나사로’의 가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요약하여 정리해 봅시다.
나사로의 가족은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전부이며. 세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을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가장이자 기둥이었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두 자매는 급하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으니 빨리 와 주십시오.’라고 전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대답하시면서 태연하게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결국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음을 알리시면서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으며, 장사까지 치루고 난 후였습니다. 통곡하면서 예수님이 늦게 오셨음을 원망하는 자매를 위로하시면서 예수님은 ‘부활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사로는 시신을 샀던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이 사건 속에는 두 가지의 관점과 두 가지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사로의 병듦과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려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두 자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힘이 되어주던 오빠의 병으로 인한 위독함은 현실적인 삶의 위기였습니다. 이러한 다급함 속에서 능력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체하심으로 인하여 오빠는 죽음을 맞이했고, 자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매어달립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는 사람의 관점이며,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시간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느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자매의 다급하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시고서도 오히려 무엇을 기다리시듯 이틀을 더 지나고서야 베다니로 향하신 ‘예수님의 관점과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후, 그것도 나흘씩이나 지나서 장례는 치러졌고 이미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는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이며, 측정할 수 없는 ‘정한 때’를 나타내는 ‘카이로스’라는 시간입니다. 이 ‘정한 때’가 바로 하나님의 시간표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간표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뒤에 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뒤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일이든 주님보다 앞서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가 무엇엔가 쫓기면서 바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너무나 바쁘고 시간이 없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없고 찬송할 수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조용히 말씀을 읽고 주님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 일에 봉사할 일이 많기 때문에 말씀과 기도로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주님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농부는 창문을 활짝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농부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꽃은 모두 시들어 볼품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아름다운 일들을 보았지만, 다른 일들로 바빴기 때문에 한 번도 그 아름다움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어느 날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일에 바빠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주님과의 시간을 배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쁘다’, ‘시간이 없다.’, ‘차차 하지!’, ‘조금만 더 있다가!’, ‘이 일만 끝내고 하지!’ 하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을 앞세우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일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원을 준비도 못한 채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내가 바쁘다고 하나님도 바쁘십니까? 내가 서두른다고 하나님께서 내 뜻에 맞추어 서두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찍 오시는 법도 없으시고, 늦게 오시는 법도 없으십니다. 정확한 때 정확한 시간에 오십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은 위급한 일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긴급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아직 ‘정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지체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인 ‘정한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이것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면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1703-91)’는 시간을 아껴 쓴 사람으로 유명한데 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있어서 안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간을 낭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을 많이 하기로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1732-99)’을 꼽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는지’그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특별히 없습니다. 단지 날마다 4시에 일어나 남들이 자는 시간에 두 시간씩은 더 일을 한 것이지요. 습관이고 결심일 뿐입니다.”
시간과 밀물은 어떤 사람도 막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한다면 주님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바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떠오르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시간표를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의 시간표를 점검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무시하고 빠르게 달린다고 목적지에 먼저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지를 잃고 표류할 뿐입니다.
지난주 말씀 결론에서 제안한 두 가지를 기억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실천하고 계십니까? 이는 그냥 제안이 아니라 영의 성공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하루 한 시간씩을 하나님의 시간표를 점검하는 시간으로 하십시오. 하루 한 시간도 투자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6: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