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아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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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1-12 22:31
♡♥♡ 자리를 아는 사람 / 삼하17:27-29
*** 들어가는 말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어느 봄날, 오하이오 주에 있는 ‘테일러’라는 사람의 큰 농장에 ‘짐’ 이라는 소년이 일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주인 테일러 씨는 짐 소년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짐은 여름내 땔나무를 준비하고 소를 맡아 키우는 등 일을 성실하게 잘했습니다. 짐 소년은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잤습니다. 일년이 채 지나기 전에 짐은 주인 테일러 씨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모욕적인 언사로, ‘너와 같은 돈도 없고 이름도 없고 장래성이 없는 사람에게 나의 딸을 결혼시킬 수 없다.’고 냉정히 잘라버렸습니다. 짐은 아무 말 없이 자기의 소유물을 챙겨 가지고 그 농장을 떠났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농장주인 테일러 씨는 건초 창고를 부수고 새로운 시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짐 소년이 자던 한 구석에 짐이 자기의 성과 이름을 기둥에 파서 새겨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이름은 ‘제임스 A. 가필드’였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었습니다. ‘가필드’는 오하이오 주 오렌지카운티에서 태어나 1881년에 미국 20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조금만 생각을 달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앞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으로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움은 이런데서 빛을 발합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안타까움이 아니라, 정말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이 돋보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에는 다윗이 위기를 당했을 때 그와 그의 군대를 도운 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그들입니다. 특히 바르실래는 ‘바실래’라고도 불리며, 나이가 많은 길르앗 사람이면서 거부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면서도 좋은 선택을 하여서,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며 선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총애를 받았던 바르실래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리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실래는 나이가 80이나 되는 노인이었고 또한 ‘암몬’족속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좋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그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잠깐 살펴봅시다.
바실래가 다윗을 도운 때는 다윗의 세 번째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다윗은 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쫓겨나서 ‘마하나임’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 ‘마하나임’은 요단 동쪽에 있는 천연 요새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몇 년 동안 백성들의 마음을 사서는 어느 날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습니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압살롬을 지지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외모와 인기로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고 아버지를 배반한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급하게 도망쳐 나온 ‘다윗’과 그를 추종하던 신복 일행은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 일행을 위하여 선행을 베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암몬 족속에 속한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였습니다. 이들은 피난길에 지치고 굶주린 다윗과 그 일행에게 씻을 수 있게 해주었고, 쉴 곳과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대접은 매우 극진했고, 풍성했습니다.
패자에게 선을 베푼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겠습니까? 사무엘하16:5-8절에는 다윗이 일행과 함께 도망을 치던 때에, ‘때는 이때다’하고 다윗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대가 어수선해지면 머리가 바빠집니다. 어느 쪽의 힘이 강한지를 저울질하고 강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지금의 우리 정치계를 보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느 모로 보나 이미 세력이 기울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기울고 있는 세력을 돕는다는 것은 분명 모험입니다. 신흥 세력에 의하여 해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그러한 계산을 하지 않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윗 일행을 선대했습니다. 본문29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고 그들이 다윗 일행을 도운 동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실래의 올바른 가치관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성도는 시대적인 상황이나 자신의 손익을 떠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올바른 삶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변하는 가치관이나,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는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나, 재물과 신앙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사람, 자신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 등.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결코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까? 골로새서1:23절을 봅시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고 했습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이 흔들려서 결국은 죽임을 당한 ‘발람’ 선지자가 있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와 물질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떠난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욕심을 가지고 세상적인 것에 현혹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필요에 의해서 조금씩 욕심이 생기면서 결국 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바바 하리다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숲 속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성전 한 권을 주고 갔습니다. 그 사람은 날마다 그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쥐가 책을 쏠아버린 것을 보고 쥐를 쫓기 위해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게 됐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게 먹일 우유가 필요하게 되자 젖소를 키웠습니다. 그러자 이 짐승들을 혼자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젖소를 돌봐줄 여자 한 사람을 구했습니다. 숲 속에서 몇 해를 지내는 동안 커다란 집과 아내와 두 아이와 고양이 떼와 젖소, 그리고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자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혼자 살 때,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신을 생각하는 대신 아내와 자식들과 젖소와 고양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를 곰곰히 명상해 보니, 한 권의 책이 이토록 엉뚱한 사태를 몰고 온 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지었습니다.
이 성자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소유물과 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게 되는 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실래는 자신이 평생토록 살아왔던 그 모습대로 다윗 일행을 대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게 해줍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삼하19:31-39절에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 올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위기의 때에 도왔던 바실래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바실래를 왕궁에 두고 그의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결코 사양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김함’이라는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김함’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바실래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이는 바실래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귀영화와 권세를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실래는 아무른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세상적인 풍조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17:7-10절에서 ‘종의 자세’를 가르치시면서 결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 사회에 바실래와 같은 사람이 많다면, 한결 사는 맛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 맛을 냅시다.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어느 봄날, 오하이오 주에 있는 ‘테일러’라는 사람의 큰 농장에 ‘짐’ 이라는 소년이 일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주인 테일러 씨는 짐 소년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짐은 여름내 땔나무를 준비하고 소를 맡아 키우는 등 일을 성실하게 잘했습니다. 짐 소년은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잤습니다. 일년이 채 지나기 전에 짐은 주인 테일러 씨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모욕적인 언사로, ‘너와 같은 돈도 없고 이름도 없고 장래성이 없는 사람에게 나의 딸을 결혼시킬 수 없다.’고 냉정히 잘라버렸습니다. 짐은 아무 말 없이 자기의 소유물을 챙겨 가지고 그 농장을 떠났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농장주인 테일러 씨는 건초 창고를 부수고 새로운 시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짐 소년이 자던 한 구석에 짐이 자기의 성과 이름을 기둥에 파서 새겨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이름은 ‘제임스 A. 가필드’였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었습니다. ‘가필드’는 오하이오 주 오렌지카운티에서 태어나 1881년에 미국 20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조금만 생각을 달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앞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으로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움은 이런데서 빛을 발합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안타까움이 아니라, 정말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이 돋보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에는 다윗이 위기를 당했을 때 그와 그의 군대를 도운 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그들입니다. 특히 바르실래는 ‘바실래’라고도 불리며, 나이가 많은 길르앗 사람이면서 거부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면서도 좋은 선택을 하여서,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며 선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총애를 받았던 바르실래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리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실래는 나이가 80이나 되는 노인이었고 또한 ‘암몬’족속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좋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그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잠깐 살펴봅시다.
바실래가 다윗을 도운 때는 다윗의 세 번째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다윗은 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쫓겨나서 ‘마하나임’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 ‘마하나임’은 요단 동쪽에 있는 천연 요새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몇 년 동안 백성들의 마음을 사서는 어느 날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습니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압살롬을 지지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외모와 인기로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고 아버지를 배반한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급하게 도망쳐 나온 ‘다윗’과 그를 추종하던 신복 일행은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 일행을 위하여 선행을 베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암몬 족속에 속한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였습니다. 이들은 피난길에 지치고 굶주린 다윗과 그 일행에게 씻을 수 있게 해주었고, 쉴 곳과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대접은 매우 극진했고, 풍성했습니다.
패자에게 선을 베푼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겠습니까? 사무엘하16:5-8절에는 다윗이 일행과 함께 도망을 치던 때에, ‘때는 이때다’하고 다윗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대가 어수선해지면 머리가 바빠집니다. 어느 쪽의 힘이 강한지를 저울질하고 강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지금의 우리 정치계를 보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느 모로 보나 이미 세력이 기울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기울고 있는 세력을 돕는다는 것은 분명 모험입니다. 신흥 세력에 의하여 해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그러한 계산을 하지 않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윗 일행을 선대했습니다. 본문29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고 그들이 다윗 일행을 도운 동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실래의 올바른 가치관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성도는 시대적인 상황이나 자신의 손익을 떠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올바른 삶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변하는 가치관이나,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는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나, 재물과 신앙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사람, 자신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 등.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결코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까? 골로새서1:23절을 봅시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고 했습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이 흔들려서 결국은 죽임을 당한 ‘발람’ 선지자가 있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와 물질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떠난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욕심을 가지고 세상적인 것에 현혹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필요에 의해서 조금씩 욕심이 생기면서 결국 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바바 하리다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숲 속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성전 한 권을 주고 갔습니다. 그 사람은 날마다 그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쥐가 책을 쏠아버린 것을 보고 쥐를 쫓기 위해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게 됐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게 먹일 우유가 필요하게 되자 젖소를 키웠습니다. 그러자 이 짐승들을 혼자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젖소를 돌봐줄 여자 한 사람을 구했습니다. 숲 속에서 몇 해를 지내는 동안 커다란 집과 아내와 두 아이와 고양이 떼와 젖소, 그리고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자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혼자 살 때,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신을 생각하는 대신 아내와 자식들과 젖소와 고양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를 곰곰히 명상해 보니, 한 권의 책이 이토록 엉뚱한 사태를 몰고 온 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지었습니다.
이 성자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소유물과 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게 되는 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실래는 자신이 평생토록 살아왔던 그 모습대로 다윗 일행을 대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게 해줍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삼하19:31-39절에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 올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위기의 때에 도왔던 바실래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바실래를 왕궁에 두고 그의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결코 사양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김함’이라는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김함’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바실래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이는 바실래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귀영화와 권세를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실래는 아무른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세상적인 풍조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17:7-10절에서 ‘종의 자세’를 가르치시면서 결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 사회에 바실래와 같은 사람이 많다면, 한결 사는 맛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 맛을 냅시다.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명성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