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는 줄(시102:12-22)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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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1-01 21:32
♥♡♥ 끊어지지 않는 줄 / 시102:12-22 ♥♡♥
*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돈? 권력? 명예? 지식? 재능? 아니면 땅? 자녀? 쾌락?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이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까? 특히, 사는 것이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말입니다.
제게는 ‘소망’입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세우신 계획이 이루는 것’과 ‘영원한 나라에서의 행복한 삶’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마도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이 생을 유지하는 큰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는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소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어떤 약하게 보이는 한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에 수건을 싸매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손에는 조그마한 비파가 하나 들려 있습니다. 그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하여 캄캄하고,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한 줄을 가지고 계속 비파를 탑니다. 그 줄이 바로 소망의 줄이며, 뒤에서 홀로 반짝이는 별은 소망의 별입니다.
소망의 힘은 위대합니다.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며, 인내하게 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어느 상점이 화재가 나서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 이와 같은 소망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시의 표제를 보면,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제처럼 시의 내용도 처절한 비탄의 시입니다. 시편에는 7편의 ‘참회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본 시입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저자는 바벨론 포로시기 이거나 그 시기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포로 생활의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회복을 처절하게 간구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하셨는데, 본시의 저자의 신앙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지나 온 한 해가 국내외적으로 정말 끔찍하도록 온통 어수선했습니다. 모 방송에서는 올해는 정말 ‘송년회’가 아니라, ‘잊을 망’자 ‘망년회’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잊고 싶은 일들이 너무도 많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워보려고 술을 의지하고 쾌락에 의지해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세대가 어둡고 어수선할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돌아보면서, 새롭게 이루실 은혜를 믿음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사람이라고 하면 ‘다윗’을 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을 체험했고, 친한 친구의 배반, 가족의 배반, 수없이 많은 생명의 위기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시편39:7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본 시의 시인도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그처럼 간절하고도 솔직히 아뢰는 가운데, 점차로 하나님을 깊이 소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비록 백성들이 범죄 했을지라도 회개하는 자에게 무한한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언약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시온을 구원하시고 선민을 고통 중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 영광 중에 나타내사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 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구원을 마치 과거에 체험한 것인 양 고백하는 확신의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근거한 확신의 신앙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가복음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나온 일년 동안 여러분이 계획했던 일들이 얼마나 이루어졌습니까? 도무지 생활의 진전이 없어서 실망스럽습니까? 위를 바라봅시다. 우리의 모든 소망이 되시고 생명과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이사야45:1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장래 일을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므로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부탁합시다.
2. 맡겨진 일을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합니다.
환경과 여건이 변한다고 맡겨진 일을 중단하거나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은 신뢰받지 못할 조건이 됩니다.
20여 년 전에 제가 부산 송도에 있는 ‘은성교회’에 있을 때였습니다. 집은 교대가 있는 거제동에 있었기 때문에 차를 두 번씩 타고 1시간여가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아동부가 시작되는 9시 이전에 교회에 도착해서 모든 예배와 청년회 모임이 끝나고 밤11시 무렵에서야 집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점심과 저녁 식사는 교회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꼼짝없이 굶은 날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장년부 낮 예배가 마친 후, 북한 전투기가 침공했다는 방송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교회가 썰렁해졌습니다. 전쟁이 났다고 모두가 급하게 집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더욱 가관은 상점의 쌀과 라면 등 식량들이 바닥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꼴딱 굶식을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추석 명절이 낀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장년부 낮 예배 후에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날따라 먹거리를 파는 포장마차도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아버린 탓에 점심도 저녁도 굶었습니다.
나중에야 청년 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들 정말 너무했다고!’ 말입니다. 그제서야 그들도 머리를 긁적이면서 미안해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나루를 심겠다.”고 했다는데, 말만 들어도 심지가 곧은 사람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은 결코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거나 사람의 기분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사야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해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시간도, 하나님의 역사도 아무런 변함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편리를 위하여 일정하게 정해진 한 기간이 지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기간을 마무리 지으면서 맡겨진 일을 점검하고 더욱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마치는 결산의 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바로 그 때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시인은 소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절망의 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뢰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3.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인이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은 이것만이 영원한 소망이며, 끊어지지 아니하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1-4절을 봅시다.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신분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천국 적이어야 하고, 위엣 것인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히긴스’ (Marguerite Higgins) 기자는 한국 전쟁을 취재하여 ‘풀리쳐 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중공군과의 전투로 몹시 지친 해병중대를 찾았습니다. 그때 병사들은 얼어붙은 콩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병사에게,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병사는 “Give me tomorrow.”(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병사의 대답의 의미는 ‘미래가 약속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8:18절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병사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즉 오늘 우리들에게는 평안과 행복과 영광으로 대변되는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의 골로새서3:4절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지나간 시간들이 비록 힘들고 어려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약속된 위엣 것을 바라보면서 지금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계속해 갑시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돈? 권력? 명예? 지식? 재능? 아니면 땅? 자녀? 쾌락?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이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까? 특히, 사는 것이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말입니다.
제게는 ‘소망’입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세우신 계획이 이루는 것’과 ‘영원한 나라에서의 행복한 삶’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마도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이 생을 유지하는 큰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는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소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어떤 약하게 보이는 한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에 수건을 싸매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손에는 조그마한 비파가 하나 들려 있습니다. 그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하여 캄캄하고,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한 줄을 가지고 계속 비파를 탑니다. 그 줄이 바로 소망의 줄이며, 뒤에서 홀로 반짝이는 별은 소망의 별입니다.
소망의 힘은 위대합니다.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며, 인내하게 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어느 상점이 화재가 나서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나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 이와 같은 소망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시의 표제를 보면,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제처럼 시의 내용도 처절한 비탄의 시입니다. 시편에는 7편의 ‘참회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본 시입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저자는 바벨론 포로시기 이거나 그 시기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포로 생활의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회복을 처절하게 간구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하셨는데, 본시의 저자의 신앙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지나 온 한 해가 국내외적으로 정말 끔찍하도록 온통 어수선했습니다. 모 방송에서는 올해는 정말 ‘송년회’가 아니라, ‘잊을 망’자 ‘망년회’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잊고 싶은 일들이 너무도 많은 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워보려고 술을 의지하고 쾌락에 의지해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세대가 어둡고 어수선할 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돌아보면서, 새롭게 이루실 은혜를 믿음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사람이라고 하면 ‘다윗’을 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을 체험했고, 친한 친구의 배반, 가족의 배반, 수없이 많은 생명의 위기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시편39:7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본 시의 시인도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그처럼 간절하고도 솔직히 아뢰는 가운데, 점차로 하나님을 깊이 소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비록 백성들이 범죄 했을지라도 회개하는 자에게 무한한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언약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시온을 구원하시고 선민을 고통 중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 영광 중에 나타내사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 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구원을 마치 과거에 체험한 것인 양 고백하는 확신의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근거한 확신의 신앙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가복음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나온 일년 동안 여러분이 계획했던 일들이 얼마나 이루어졌습니까? 도무지 생활의 진전이 없어서 실망스럽습니까? 위를 바라봅시다. 우리의 모든 소망이 되시고 생명과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이사야45:1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장래 일을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므로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부탁합시다.
2. 맡겨진 일을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합니다.
환경과 여건이 변한다고 맡겨진 일을 중단하거나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은 신뢰받지 못할 조건이 됩니다.
20여 년 전에 제가 부산 송도에 있는 ‘은성교회’에 있을 때였습니다. 집은 교대가 있는 거제동에 있었기 때문에 차를 두 번씩 타고 1시간여가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아동부가 시작되는 9시 이전에 교회에 도착해서 모든 예배와 청년회 모임이 끝나고 밤11시 무렵에서야 집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점심과 저녁 식사는 교회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꼼짝없이 굶은 날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장년부 낮 예배가 마친 후, 북한 전투기가 침공했다는 방송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교회가 썰렁해졌습니다. 전쟁이 났다고 모두가 급하게 집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더욱 가관은 상점의 쌀과 라면 등 식량들이 바닥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꼴딱 굶식을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추석 명절이 낀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장년부 낮 예배 후에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날따라 먹거리를 파는 포장마차도 가게들도 모두 문을 닫아버린 탓에 점심도 저녁도 굶었습니다.
나중에야 청년 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들 정말 너무했다고!’ 말입니다. 그제서야 그들도 머리를 긁적이면서 미안해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나루를 심겠다.”고 했다는데, 말만 들어도 심지가 곧은 사람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은 결코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거나 사람의 기분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사야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해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시간도, 하나님의 역사도 아무런 변함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편리를 위하여 일정하게 정해진 한 기간이 지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기간을 마무리 지으면서 맡겨진 일을 점검하고 더욱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마치는 결산의 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바로 그 때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시인은 소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절망의 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뢰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3.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인이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은 이것만이 영원한 소망이며, 끊어지지 아니하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1-4절을 봅시다.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신분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천국 적이어야 하고, 위엣 것인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히긴스’ (Marguerite Higgins) 기자는 한국 전쟁을 취재하여 ‘풀리쳐 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중공군과의 전투로 몹시 지친 해병중대를 찾았습니다. 그때 병사들은 얼어붙은 콩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병사에게,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병사는 “Give me tomorrow.”(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병사의 대답의 의미는 ‘미래가 약속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8:18절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병사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즉 오늘 우리들에게는 평안과 행복과 영광으로 대변되는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의 골로새서3:4절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지나간 시간들이 비록 힘들고 어려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약속된 위엣 것을 바라보면서 지금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계속해 갑시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