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두려워하느냐?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561회
작성일
2002-03-17 21:14
♡♥♡ 왜 두려워하느냐? / 마10:24-33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두려워하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이나 일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링컨’은 믿음의 인물로 손꼽힙니다. 그가 생전에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성경 구절 중에 유독 손가락 자국이 남도록 손때 묻은 곳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시편34: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차라리 안심할 수 있는 것이 더 적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작은 두려움에서부터,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건강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해와 삶의 터전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두려움까지 숱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으며, 때로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도피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사람이 절대적인 존재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적으로는 부와 힘과 권력을 의존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종교적인 성향은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1:10절 말씀을 봅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고, 요한복음14: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의 삶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존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담대한 믿음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왜 두려움이 있습니까?
두려움의 제일 되는 원인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녁이면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었지만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는 죄를 알지도 못했고, 죄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처음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의 원인은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두려움을 불러옵니다. 마태복음14:31절에서 물위를 걷다가 빠져가면서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또한 마가복음4:40절에서는 폭풍우를 만나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두려움이 찾아올 때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죄와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는다.’고 비웃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귀신들린 자라는 비웃음입니다(마9:32-34, 12:22-24).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시면서, ‘너희 선생이자 주인인 나를 이처럼 귀신의 왕이라고 하면서 핍박하는데, 너희들에게는 더욱 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고난을 당하는데 제자가 어찌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며, 상전이 고통을 당하는데 종이 어찌 평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지금은 진실이 숨겨져서 악인들이 득세하고 횡횡한다 할지라도, 장차 하나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사람의 의로움과 불의가 밝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오해받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그들의 진실과 노력이 밝혀질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증거하고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4:5절에서,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 하셨으며, 갈라디아서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7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과 교훈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타내며 전파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때때로 다가오는 오해와 불신과 핍박과 환경으로 인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을 지켜갑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28절을 봅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제일 무서운 사람은 흉악한 살인마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는 창조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에게는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육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참새의 생명을 예로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1/16데나리온. 장정 1일 임금을 4만원으로 볼 때, 2500원 정도이다.)에 팔릴 만큼 보잘 것 없지만 그 생명도 하나님께서 하락하셔야만 죽일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2장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앗사리온 둘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 마리를 사면 한 마리를 덤으로 끼워줄 만큼 보잘 것 없는 생명임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 세상의 부귀영화, 힘과 권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준 사람들일 뿐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담대하게 대하십시오. 비록 사단이라 할지라도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도 앞에서는 물러갈 뿐입니다. 요한일서5: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31:6절에서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믿는다면 여러분 자신의 생명은 누구의 권한에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28: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보약을 먹고 불로초를 찾습니다. 아니면 ‘어차피 죽을 인생 즐겨나 보자.’라는 막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니 이런 막가는 인생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길, 성실한 삶을 이루는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사는 것과 죽는 것, 복과 저주가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의 보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히브리서6:1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말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누구입니까?
본문28절 하반절에서,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신명기30:19-20절의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유대의 「요하난」이란 랍비의 이야기입니다. 랍비가 병들었을 때, 그의 제자가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랍비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자가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둥이 되시는 랍비여, 왜 우십니까?” 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만일 내가 인간의 왕 앞에 끌려가 섰다면, 왕이 내게 노하더라도 그 노는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요, 왕이 나를 옥에 가두어도 그 투옥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왕이 나를 사형시켜도 그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왕을 말로 설득하고, 돈으로 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만군의 여호와 앞에 끌려갔을 때, 하나님이 노하시면 그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죽음을 내리면 그 죽음은 영원한 것이니, 내가 어찌 울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일하는 사람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다가오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역대하16:9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처럼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함과 전심으로 나아가서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두려워하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이나 일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링컨’은 믿음의 인물로 손꼽힙니다. 그가 생전에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성경 구절 중에 유독 손가락 자국이 남도록 손때 묻은 곳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시편34: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차라리 안심할 수 있는 것이 더 적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작은 두려움에서부터,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건강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공해와 삶의 터전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두려움까지 숱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으며, 때로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도피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사람이 절대적인 존재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적으로는 부와 힘과 권력을 의존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종교적인 성향은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1:10절 말씀을 봅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고, 요한복음14: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의 삶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존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담대한 믿음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왜 두려움이 있습니까?
두려움의 제일 되는 원인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녁이면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었지만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는 죄를 알지도 못했고, 죄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처음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의 원인은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두려움을 불러옵니다. 마태복음14:31절에서 물위를 걷다가 빠져가면서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또한 마가복음4:40절에서는 폭풍우를 만나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두려움이 찾아올 때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죄와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는다.’고 비웃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귀신들린 자라는 비웃음입니다(마9:32-34, 12:22-24).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시면서, ‘너희 선생이자 주인인 나를 이처럼 귀신의 왕이라고 하면서 핍박하는데, 너희들에게는 더욱 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고난을 당하는데 제자가 어찌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며, 상전이 고통을 당하는데 종이 어찌 평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지금은 진실이 숨겨져서 악인들이 득세하고 횡횡한다 할지라도, 장차 하나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사람의 의로움과 불의가 밝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오해받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그들의 진실과 노력이 밝혀질 것이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증거하고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4:5절에서,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 하셨으며, 갈라디아서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7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과 교훈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타내며 전파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때때로 다가오는 오해와 불신과 핍박과 환경으로 인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을 지켜갑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28절을 봅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제일 무서운 사람은 흉악한 살인마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는 창조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에게는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육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참새의 생명을 예로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1/16데나리온. 장정 1일 임금을 4만원으로 볼 때, 2500원 정도이다.)에 팔릴 만큼 보잘 것 없지만 그 생명도 하나님께서 하락하셔야만 죽일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2장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앗사리온 둘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 마리를 사면 한 마리를 덤으로 끼워줄 만큼 보잘 것 없는 생명임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 세상의 부귀영화, 힘과 권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준 사람들일 뿐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담대하게 대하십시오. 비록 사단이라 할지라도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도 앞에서는 물러갈 뿐입니다. 요한일서5: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31:6절에서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믿는다면 여러분 자신의 생명은 누구의 권한에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28: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보약을 먹고 불로초를 찾습니다. 아니면 ‘어차피 죽을 인생 즐겨나 보자.’라는 막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니 이런 막가는 인생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길, 성실한 삶을 이루는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사는 것과 죽는 것, 복과 저주가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의 보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히브리서6:1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말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누구입니까?
본문28절 하반절에서,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신명기30:19-20절의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유대의 「요하난」이란 랍비의 이야기입니다. 랍비가 병들었을 때, 그의 제자가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랍비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자가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둥이 되시는 랍비여, 왜 우십니까?” 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만일 내가 인간의 왕 앞에 끌려가 섰다면, 왕이 내게 노하더라도 그 노는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요, 왕이 나를 옥에 가두어도 그 투옥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왕이 나를 사형시켜도 그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왕을 말로 설득하고, 돈으로 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만군의 여호와 앞에 끌려갔을 때, 하나님이 노하시면 그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죽음을 내리면 그 죽음은 영원한 것이니, 내가 어찌 울지 않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일하는 사람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다가오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역대하16:9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처럼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함과 전심으로 나아가서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