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데서 온전해 지는 능력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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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3-02 17:22
♡♥♡ 약한 데서 온전해 지는 능력 / 고후12:7-10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세상적인 사상과는 반대되는 역설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거의 절반인 13권을 쓴 위대한 바울에게는 ‘사단의 가시’로 불리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세 번 가시를 제거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능력’ 이것은 분명 세상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좀처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실수라 할지라도 끝까지 변명하며 아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은 어떠하겠습니까? 야고보서4:14절에서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으며, 시편78:39절에서는,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하셨으며, 이사야45:9절에서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화가인 ‘고호’는 젊었을 때, 광산에서 전도사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호는 광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셔츠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원래 포장한 물건에 쓰여 있던 글씨였습니다. 거기에는 ‘부서지기 쉬우니 주의해서 다룰 것’이라는 글입니다. 이 때 고호는 광부가 입었던 그 옷의 글씨를 보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우리 사람은 ‘질그릇’과 같아서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한 것처럼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약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7절을 봅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시”라는 말은 ‘말뚝’, ‘파편’, ‘뾰족한 창’이라는 의미입니다. ‘육체에 가시’는 ‘몸에 박힌 말뚝’이라는 뜻으로,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가시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단의 사자’로 불릴 만큼 바울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가시를 주신 목적이 바울의 교만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는 너무나 신비스럽고 큰 것이어서 교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오늘에 이런 큰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유명해지고 교만해졌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가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가시가 자신의 육체의 질병일 수도 있고, 어려운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스러운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의 영혼이 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무엇에 약한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 약한 부분이 사단으로부터 뚫리지 않도록 깨어있게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서울 광림교회 이경옥 집사의 간증입니다. 10여년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순탄한 삶과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수련회가 끝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동안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야맹증과 같이 밤에는 계단을 잘 내려가지 못하던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왼쪽 눈의 신경이 너무 상해서 실명위기까지 왔으며, 오른쪽 눈도 많이 상해 있어서 절망적입니다.”라는 의사의 말과 함께 “녹내장 중증”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순탄하게 직장생활을 잘하고 신앙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왔기 때문에 이 집사 부부는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청천벽력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 부부는 고통 속에서 기도했고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 여 년 동안의 신앙생활이 ‘나’ 중심의 신앙생활, ‘내 가족만을 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는, “내가 좋아 성가대를 하고, 내가 좋아 선교와 봉사를 하며, 내가 좋으면 무슨 일이든 해왔던 나와 남편은 이런 고통 속에서 자아가 깨어지고 성령의 체험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후로 이 집사 부부의 생활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눈도 계속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가시는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인생의 가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인생의 가시가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 자체가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가시로 말미암아 더욱 타락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는 오히려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1:27-29절을 봅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자와는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함이 있고 고통과 고난의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미국 ‘앨라배마’주 남부 ‘엔터프라이즈’에는 세계 유일의 벌레를 위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1895년 멕시코산 목화 바구미가 엔터프라이즈에 생기기 시작, 앨라배마 주의 목화 생산은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목화 농부들은 생존을 위해 다각적인 농업 운영을 계획하여 목화 대신 옥수수, 감자, 낙화생을 재배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목화 바구미가 나타난 지 25년 후인 1919년, 그곳의 낙화생 생산량은 엄청났으며, 수입은 목화 재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해 주민들은 기념탑을 하나 세웠습니다. “벌레가 번영의 전령자로서 이루어 놓은 거대한 업적을 감사하며 엔터프라이즈 전 주민의 이름으로 이 탑을 세우노라.” 탑에 새겨진 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성도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합시다. 더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세상적인 사상과는 반대되는 역설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거의 절반인 13권을 쓴 위대한 바울에게는 ‘사단의 가시’로 불리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세 번 가시를 제거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능력’ 이것은 분명 세상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좀처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실수라 할지라도 끝까지 변명하며 아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은 어떠하겠습니까? 야고보서4:14절에서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으며, 시편78:39절에서는,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하셨으며, 이사야45:9절에서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화가인 ‘고호’는 젊었을 때, 광산에서 전도사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호는 광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셔츠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원래 포장한 물건에 쓰여 있던 글씨였습니다. 거기에는 ‘부서지기 쉬우니 주의해서 다룰 것’이라는 글입니다. 이 때 고호는 광부가 입었던 그 옷의 글씨를 보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우리 사람은 ‘질그릇’과 같아서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한 것처럼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약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7절을 봅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시”라는 말은 ‘말뚝’, ‘파편’, ‘뾰족한 창’이라는 의미입니다. ‘육체에 가시’는 ‘몸에 박힌 말뚝’이라는 뜻으로,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가시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단의 사자’로 불릴 만큼 바울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가시를 주신 목적이 바울의 교만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는 너무나 신비스럽고 큰 것이어서 교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오늘에 이런 큰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유명해지고 교만해졌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가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가시가 자신의 육체의 질병일 수도 있고, 어려운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스러운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의 영혼이 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무엇에 약한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 약한 부분이 사단으로부터 뚫리지 않도록 깨어있게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서울 광림교회 이경옥 집사의 간증입니다. 10여년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순탄한 삶과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수련회가 끝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동안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야맹증과 같이 밤에는 계단을 잘 내려가지 못하던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왼쪽 눈의 신경이 너무 상해서 실명위기까지 왔으며, 오른쪽 눈도 많이 상해 있어서 절망적입니다.”라는 의사의 말과 함께 “녹내장 중증”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순탄하게 직장생활을 잘하고 신앙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왔기 때문에 이 집사 부부는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청천벽력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 부부는 고통 속에서 기도했고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 여 년 동안의 신앙생활이 ‘나’ 중심의 신앙생활, ‘내 가족만을 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는, “내가 좋아 성가대를 하고, 내가 좋아 선교와 봉사를 하며, 내가 좋으면 무슨 일이든 해왔던 나와 남편은 이런 고통 속에서 자아가 깨어지고 성령의 체험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후로 이 집사 부부의 생활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눈도 계속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가시는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인생의 가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인생의 가시가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 자체가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가시로 말미암아 더욱 타락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는 오히려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1:27-29절을 봅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자와는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함이 있고 고통과 고난의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미국 ‘앨라배마’주 남부 ‘엔터프라이즈’에는 세계 유일의 벌레를 위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1895년 멕시코산 목화 바구미가 엔터프라이즈에 생기기 시작, 앨라배마 주의 목화 생산은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목화 농부들은 생존을 위해 다각적인 농업 운영을 계획하여 목화 대신 옥수수, 감자, 낙화생을 재배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목화 바구미가 나타난 지 25년 후인 1919년, 그곳의 낙화생 생산량은 엄청났으며, 수입은 목화 재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해 주민들은 기념탑을 하나 세웠습니다. “벌레가 번영의 전령자로서 이루어 놓은 거대한 업적을 감사하며 엔터프라이즈 전 주민의 이름으로 이 탑을 세우노라.” 탑에 새겨진 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성도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합시다. 더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