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적당한 때, 나의 자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779회 작성일 2002-03-02 17:20
♡♥♡ 적당한 때, 나의 자리 / 요7:1-13

***들어가는 말

여러분, 하고 싶은 일 많이 있지요?
저 역시도 이런 저런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고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에게 주어진 능력이 있고, 적당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여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잠언25:11절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고, 사도행전1:4절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적당한 때의 적당한 말과 적당한 때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고, 전도서3:1절에서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그 일에 따르는 목적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람은 큰물에서 활동해야 하며, 큰 무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대도시로 몰리며, 인정을 받기 위하여 세계의 무대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넓은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만큼 유명해지고 유명해지는 만큼 자신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세상적인 관점이고 가치관인 ‘출세 지향적 삶’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와 같은 세상적인 법칙이 적용되겠습니까?

교회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 때인 중세기의 일입니다. ‘바젤’에 살던 ‘마틴’이라는 믿음의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마틴은 타락했던 당시 교회의 권세가 두려워서 감히 그 깨달은 바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주장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자기 거실의 벽돌 하나를 빼내고 양피지(가죽종이)에 다음과 같이 쓴 글을 넣어놓았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나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음을 압니다. 거룩하신 예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바젤의 ‘마틴’이 써서 감추어둔 이 글은 약 200년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도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견하고는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하셨는데. 왜 내가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나의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리오.”
마틴 루터의 목숨을 건 결단의 행동은 세계의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이 개혁으로 오늘의 개혁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상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8:35절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좌우됨을 말씀합니다. 이시간의 본문의 말씀 속에서 나타난 주님의 삶의 모습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신 후,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곧 초막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행하는 이 큰 일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넓은 유대로 가서 행하소서. 자신을 나타내려면 이 좁은 갈릴리에 묻혀서는 안 됩니다.”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동생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그 큰 능력과 엄청난 설교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큰 능력과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지 않겠습니까? 나타내지 않는 예수님의 사역방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갈릴리 사람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마침 때가 좋아서 초막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이기에 최적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던 동생들이 가진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면서 동생들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형제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간 후, 비밀리에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루 찾으며 예수님을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명절의 중간 쯤 되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거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형제들의 생각이 전혀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즉 동생들의 생각은 순전히 세상적인 출세 방법임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내 때”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 거절의 뜻이 무엇임을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는 순간’이며, 곧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동생들의 생각처럼 능력을 나타냄으로서 유명해지는 것이나, 출세를 위항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을 이루기 위한 나타냄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서 벗어나면 세상에서는 인정받고 유명해 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밀한 행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동생들의 뜻을 거절하시고는 나중에 혼자 비밀스럽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처음에는 안 가시겠다고 하고 나중에는 올라가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초막절의 의미를 회복하려 하심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형식적인 절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절기가 아니었습니다. 초막절은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와 함께 출애굽 때의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물에 관한 의식을 행합니다. 제사장은 일주일동안 매일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의 제단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외쳤습니다. 이처럼 초막절은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로암 못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어 제단에 부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막절에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이 의식은 성령과 관계된 의식이었습니다. 이 물은 에스겔서 47장에 나오는,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성전 문지방으로 흘러나오는 그 생명의 물을 기다리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생명의 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니 초막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물이고, 물은 바로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을 마셔야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의 흘러나리라.”라고 외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나타내심은 모든 일이 적당한 때에 제자리를 찾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때와 나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살게 하시고 이 자리를 주신 것은 여기에 우리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이나 또는 육신적인 풍요함과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이 세상과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 가운데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셨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사람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고, 권세가 있고, 좋은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공허한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되면 될수록 무엇인가에 빠지려고 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에 자신을 던지고, 사업에 미치려고 하고, 쾌락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세상적인 자신의 삶을 가리기 위하여 형식적인 믿음만을 나타내고 있는 자리는 아닙니까? 여러분도 혹시 예수님의 동생들처럼 겉으로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지만 마음은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생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삶의 갈증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생수는 자연스럽게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면서 더욱 충만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마련하신 때와 자리에서 묵묵히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부족함도 죄이지만 지나침도 죄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부르심의 뜻을 따라서, 주어진 때에 지금 머물게 하신 자리에서 신실함과 충성된 삶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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