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변질 / 엡4:21-2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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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2-02 22:36
♡♥♡ 변화와 변질 / 엡4:21-24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 세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처럼 변화와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또 있겠습니까? 사람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 모두 적절한 시기에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흉하게 변질되거나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장을 담기 위하여 배추나 무를 소금에 절일 때에, 무작정 오래 절이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깨끗한 물로 소금기를 씻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기에 부적합하게 되겠지요. 매실을 설탕에 절일 때에도 적당한 기간이 있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숙성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시기를 넘기면 신맛이 나와서 적당한 매실차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된장도 적당한 시기가 있습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된장과 간장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썩어버립니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적당한 시기가 있으며 그 시기가 지나면 변화해야 합니다.
곤충이나 파충류 중에는 허물을 벗는 종류들이 있습니다. 애벌레나 유충기 때부터 점점 성장하면서 작아진 껍질을 벗어버리고 변이를 하게 됩니다. 만일 허물을 벗고 변이해야 할 시기를 놓치면 성장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변화나 개혁은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들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ꊉ대원군의 부패 ꊊ민비의 간교함 ꊋ백성들의 무지함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와그너’교수는 그 이유를 한마디로 “관료나 국민 모두, 외부의 변화를 읽지 못해서 개혁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변화’가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자다가 깰 때”라고 하셨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고,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변화의 시기를 넘기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극도로 타락하고 변질된 것은 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부터 교회는 박해의 시기를 마감하고 태평성대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무가 되어, 성도들은 평안함에 안주하면서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변절자나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단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가 변질되고 사회와 나라가 부패했습니다. 결국 세계적인 종교개혁을 통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여년이 지났습니다. 온 세계의 교회가 변질된 진리로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관심이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성공에 있고, 가치관이 세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서조차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졌고, 하나님의 복음만이 참 진리이며 생명의 길임을 말하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다시 세상적인 허물을 벗어야 할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가치관의 중심을 삼고 모든 관심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로마서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변화는 어떤 새로운 것으로 바뀌도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으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하고 변질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3:12절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 애가3:40절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했으며, 호세아6:1절에서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사람이 신앙의 근본적인 대상인 하나님께로 변화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인 ‘간하베’ 선교사가 한 때 우리나라에서 창녀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창녀들을 전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주고 바른 길로 교도하는 방법이며, 둘째는 그들의 영을 주님께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방법으로 전도를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창녀로 돌아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간하베 선교사는 창녀촌에 가서 그녀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낮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그녀들은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여기저기서 모여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창녀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선교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일단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기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창녀 생활을 합리화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하베 선교사가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열 명의 창녀 중 여덟 명은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그날로 그곳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가정부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거나, 길거리에서 행상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숨어서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 주는 일을 합니다.
변화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을 바꾸고, 일을 바꾸고, 바른 삶을 가르쳐도 근본적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외적인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영이 새롭게 되어야 삶이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합니까?
“나는 한평생 성경만을 생각했습니다. 자면서도 성경을 생각했고, 생각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기록하곤 했습니다. 자식들 얼굴 색깔이 변해가는 모습도 모른 채 오로지 성경만을 위해 일생을 사노라 했지만, 그러나 큰일을 해내진 못했습니다.” 이 말은 어느 신학교 채플에서 있었던 설교 시간에 외친 박윤선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개혁이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를 따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인생은 일생동안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의 변화와 개혁은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불신과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두가 ‘네 탓’이라고 외칩니다. 정치인들이 썩었고, 교육자들이 썩었고, 법조인들이 썩었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면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옛말까지도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두가 자신의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을 탓하는 형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또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새 사람’으로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해야 할 때를 놓치면 변질되고 맙니다. 신앙의 변질은 곧 죽음입니다. 이제는 세상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실한 신앙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의 땅인 ‘벧엘’로 향하다가 ‘밧단아람’을 거쳐 ‘세겜 성’에 머물면서 지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아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단을 쌓고 경배하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세상을 기웃거리며 머뭇거린다면 결코 평안도 만족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살아야 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며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길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록 험하고 부패하여 마음 둘 곳이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향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평안과 만족함을 누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 세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처럼 변화와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또 있겠습니까? 사람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 모두 적절한 시기에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흉하게 변질되거나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장을 담기 위하여 배추나 무를 소금에 절일 때에, 무작정 오래 절이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깨끗한 물로 소금기를 씻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기에 부적합하게 되겠지요. 매실을 설탕에 절일 때에도 적당한 기간이 있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숙성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시기를 넘기면 신맛이 나와서 적당한 매실차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된장도 적당한 시기가 있습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된장과 간장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썩어버립니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적당한 시기가 있으며 그 시기가 지나면 변화해야 합니다.
곤충이나 파충류 중에는 허물을 벗는 종류들이 있습니다. 애벌레나 유충기 때부터 점점 성장하면서 작아진 껍질을 벗어버리고 변이를 하게 됩니다. 만일 허물을 벗고 변이해야 할 시기를 놓치면 성장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변화나 개혁은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들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ꊉ대원군의 부패 ꊊ민비의 간교함 ꊋ백성들의 무지함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와그너’교수는 그 이유를 한마디로 “관료나 국민 모두, 외부의 변화를 읽지 못해서 개혁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변화’가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자다가 깰 때”라고 하셨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고,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변화의 시기를 넘기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극도로 타락하고 변질된 것은 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부터 교회는 박해의 시기를 마감하고 태평성대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무가 되어, 성도들은 평안함에 안주하면서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변절자나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단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가 변질되고 사회와 나라가 부패했습니다. 결국 세계적인 종교개혁을 통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여년이 지났습니다. 온 세계의 교회가 변질된 진리로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관심이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성공에 있고, 가치관이 세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서조차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졌고, 하나님의 복음만이 참 진리이며 생명의 길임을 말하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다시 세상적인 허물을 벗어야 할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가치관의 중심을 삼고 모든 관심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로마서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변화는 어떤 새로운 것으로 바뀌도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으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하고 변질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3:12절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 애가3:40절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했으며, 호세아6:1절에서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사람이 신앙의 근본적인 대상인 하나님께로 변화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인 ‘간하베’ 선교사가 한 때 우리나라에서 창녀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창녀들을 전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주고 바른 길로 교도하는 방법이며, 둘째는 그들의 영을 주님께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방법으로 전도를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창녀로 돌아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간하베 선교사는 창녀촌에 가서 그녀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낮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그녀들은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여기저기서 모여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창녀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선교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일단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기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창녀 생활을 합리화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하베 선교사가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열 명의 창녀 중 여덟 명은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그날로 그곳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가정부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거나, 길거리에서 행상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숨어서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 주는 일을 합니다.
변화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을 바꾸고, 일을 바꾸고, 바른 삶을 가르쳐도 근본적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외적인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영이 새롭게 되어야 삶이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합니까?
“나는 한평생 성경만을 생각했습니다. 자면서도 성경을 생각했고, 생각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기록하곤 했습니다. 자식들 얼굴 색깔이 변해가는 모습도 모른 채 오로지 성경만을 위해 일생을 사노라 했지만, 그러나 큰일을 해내진 못했습니다.” 이 말은 어느 신학교 채플에서 있었던 설교 시간에 외친 박윤선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개혁이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를 따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인생은 일생동안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의 변화와 개혁은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불신과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두가 ‘네 탓’이라고 외칩니다. 정치인들이 썩었고, 교육자들이 썩었고, 법조인들이 썩었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면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옛말까지도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두가 자신의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을 탓하는 형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또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새 사람’으로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해야 할 때를 놓치면 변질되고 맙니다. 신앙의 변질은 곧 죽음입니다. 이제는 세상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실한 신앙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의 땅인 ‘벧엘’로 향하다가 ‘밧단아람’을 거쳐 ‘세겜 성’에 머물면서 지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아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단을 쌓고 경배하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세상을 기웃거리며 머뭇거린다면 결코 평안도 만족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살아야 하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며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길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록 험하고 부패하여 마음 둘 곳이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향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평안과 만족함을 누리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