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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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4-21 20:46
♡♥♡ 잊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강아지를 좋아합니까? 고양이를 좋아합니까?
강아지도 고양이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를 더 귀여워합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고양이는 앙칼진 면도 있지만 열 번 잘해 주다가 한 번 서운하게 하면 서운한 것만 기억하고 주인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열 번 서운하게 하다가도 한 번 잘해주면 그 한 번을 기억하고 주인을 따른다고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열 가지 좋은 일이 있다가 한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에 매여 원망하거나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큰 이적과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 헤아릴 수도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길이 험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물이 없다고 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엉뚱한 일을 벌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민수기14:22절에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다가도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으며,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하박국3:17-18절을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기를 지나오면서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신앙의 시작점에서 받은 은혜와 지금까지 누렸던 은혜를 잊고,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거나, 눈앞의 작은 어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즉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자신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서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듯”하는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혹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읽은 본문을 통하여 잊고 사는 것이 없는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1. 본문의 내용을 다시 풀어봅시다.
본문은 주님께서 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내는 과정과 그들에게 품값을 지불하는 과정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일이 시작되는 오전6시)에 품꾼을 모아서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오전 아홉 시 경에 장터에 가서 보니, 할일 없이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하고는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열두 시와 오후 3시에도 그때까지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런 약속 없이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제 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오후 5시(일과 종료 한 시간 전)에도 여전히 할일이 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긴 주인은 그들도 아무런 약속 없이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일과가 끝나는 오후 여섯시가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일당을 지급하라.’고 지시합니다. 일당은 마지막에 들어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부터 지급되었습니다. 청지기는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먼저 들어왔던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한 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우리는 먼저 들어왔으니까 더 많은 돈을 받겠지!’라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고, 정오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었습니다. 결국 가장 먼저 들어와서 12시간을 일한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불공평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들의 불평이 이해가 되시지요?
주인은 불평하며 원망하는 품꾼들에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니라.”고 불평을 일축시켰습니다.
2.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의미를 봅시다.
1) 부르심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품꾼들이 주인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간대가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부름 받을 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자신들의 힘이나 노력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생명으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소유나 학식 등을 평가하여 부르지 않으십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26-2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2) 결산의 시간과 일의 대가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부름 받은 시간이 다르고, 일한 시간의 양도 다릅니다. 그러나 결산의 시기는 똑 같으며, 일에 대한 기본적인 대가도 같습니다. 즉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일에 대한 결산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때입니다. 그리고 일의 대가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 즉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부르심은 받은 사람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차별도 없고 사람의 노력에 대한 대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에 따른 상급입니다. 히브리서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3:10-15절에서 공력에 따른 상급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의 상급이 있고, 전도자의 상급이 있고, 봉사자의 상급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10:40-4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먼저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결코 계약에 위반 된 것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일의 시간과 일의 양을 따지지 않으시고 동일한 대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오래 동안 믿었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에 따라서 죄의 양을 구별하여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여 주님께 속했다는 것만으로 죄의 양과 믿음의 시간에 관계없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오직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따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본문 16절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16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을 봅시다.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의 불평이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이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과 이렇게 하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품삯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시는 것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품꾼으로서는 자신을 일꾼으로 고용해 준 은혜에 감사할 것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터에서 할일 없이 서성거리고 있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시간부터 일한 사람 외에는 정한 품삯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놀고 있는 자신들에게 일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하루의 품삯을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고서도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감사를 잊은 사람들에게 16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에 감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7:12-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이적이 나옵니다. 열명이 모두 나음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인만 주님께 돌아와서 엎드려 절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병은 고쳤지만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심각하게 말한 신학적 표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 복음의 진리를 화장실의 변기 위에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친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 고백을 했습니다.
인간은 변기 위에서 가장 겸손해지고, 가장 숨김이 없고, 부끄러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고,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거지의 상태이고, 자신이 다 비어진 상태이므로, 그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는 거지처럼 내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의 은혜를 입고서도 무엇이 부족한 듯이 원망이나 불평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매일의 주시는 일에 충성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서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강아지를 좋아합니까? 고양이를 좋아합니까?
강아지도 고양이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를 더 귀여워합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고양이는 앙칼진 면도 있지만 열 번 잘해 주다가 한 번 서운하게 하면 서운한 것만 기억하고 주인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열 번 서운하게 하다가도 한 번 잘해주면 그 한 번을 기억하고 주인을 따른다고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열 가지 좋은 일이 있다가 한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에 매여 원망하거나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큰 이적과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 헤아릴 수도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길이 험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물이 없다고 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엉뚱한 일을 벌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민수기14:22절에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다가도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으며,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하박국3:17-18절을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기를 지나오면서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신앙의 시작점에서 받은 은혜와 지금까지 누렸던 은혜를 잊고,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거나, 눈앞의 작은 어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즉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자신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서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듯”하는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혹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읽은 본문을 통하여 잊고 사는 것이 없는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1. 본문의 내용을 다시 풀어봅시다.
본문은 주님께서 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내는 과정과 그들에게 품값을 지불하는 과정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일이 시작되는 오전6시)에 품꾼을 모아서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오전 아홉 시 경에 장터에 가서 보니, 할일 없이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하고는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열두 시와 오후 3시에도 그때까지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런 약속 없이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제 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오후 5시(일과 종료 한 시간 전)에도 여전히 할일이 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긴 주인은 그들도 아무런 약속 없이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일과가 끝나는 오후 여섯시가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일당을 지급하라.’고 지시합니다. 일당은 마지막에 들어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부터 지급되었습니다. 청지기는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먼저 들어왔던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한 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우리는 먼저 들어왔으니까 더 많은 돈을 받겠지!’라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고, 정오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었습니다. 결국 가장 먼저 들어와서 12시간을 일한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불공평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들의 불평이 이해가 되시지요?
주인은 불평하며 원망하는 품꾼들에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니라.”고 불평을 일축시켰습니다.
2.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의미를 봅시다.
1) 부르심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품꾼들이 주인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간대가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부름 받을 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자신들의 힘이나 노력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생명으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소유나 학식 등을 평가하여 부르지 않으십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26-2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2) 결산의 시간과 일의 대가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부름 받은 시간이 다르고, 일한 시간의 양도 다릅니다. 그러나 결산의 시기는 똑 같으며, 일에 대한 기본적인 대가도 같습니다. 즉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일에 대한 결산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때입니다. 그리고 일의 대가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 즉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부르심은 받은 사람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차별도 없고 사람의 노력에 대한 대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에 따른 상급입니다. 히브리서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3:10-15절에서 공력에 따른 상급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순교자의 상급이 있고, 전도자의 상급이 있고, 봉사자의 상급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10:40-4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먼저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결코 계약에 위반 된 것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일의 시간과 일의 양을 따지지 않으시고 동일한 대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오래 동안 믿었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에 따라서 죄의 양을 구별하여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여 주님께 속했다는 것만으로 죄의 양과 믿음의 시간에 관계없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오직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따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본문 16절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16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을 봅시다.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의 불평이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이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과 이렇게 하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품삯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시는 것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품꾼으로서는 자신을 일꾼으로 고용해 준 은혜에 감사할 것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터에서 할일 없이 서성거리고 있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시간부터 일한 사람 외에는 정한 품삯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놀고 있는 자신들에게 일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하루의 품삯을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고서도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감사를 잊은 사람들에게 16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에 감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7:12-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이적이 나옵니다. 열명이 모두 나음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인만 주님께 돌아와서 엎드려 절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병은 고쳤지만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심각하게 말한 신학적 표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 복음의 진리를 화장실의 변기 위에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친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 고백을 했습니다.
인간은 변기 위에서 가장 겸손해지고, 가장 숨김이 없고, 부끄러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고,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거지의 상태이고, 자신이 다 비어진 상태이므로, 그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는 거지처럼 내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의 은혜를 입고서도 무엇이 부족한 듯이 원망이나 불평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매일의 주시는 일에 충성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서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