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필요한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523회
작성일
2002-04-06 18:18
♤♠♤ 가장 필요한 것 / 시91:1-16
*** 들어가는 말
본 시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이 없는 아름다운 신뢰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인은 인생의 모든 여정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확고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중요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 계시며, 하나님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공간을 내어 드리고 있습니까?
오래 전에 한 청년의 간증 속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시골에서 살았는데, 읍내로 가기 위하여 항상 지나는 길에 쓰러져 가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일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날 때마다 거의 대부분은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든지,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년도 읍내의 교회에 다니는 터라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그 날은 시간도 넉넉히 남았고 해서 청년이 그 집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날도 여전히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열려져 있는 사립문을 지나서 “계십니까?”라고 인기척을 냈습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지나는 길에 들리는 찬송소리가 좋아서 한 번 방문했노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자그마한 방에는 오래 된 장농 하나와 이부자리가 전부였습니다. 정말 가난한 살림살이였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혼자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게 보였습니다. 청년은 가끔 이야기 소리가 들렸던 것을 생각하면서, “할머니, 손님이 종종오시나 보지요. 가끔 지나다 보면 이야기 소리가 들리 든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하, 내가 주인과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구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은 “할머니가 집 주인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주님이 내 주인이시고, 이 집의 주인이시라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야기도 하고 찬송도 하고 심심하지도 외롭지도 않고, 가난하지만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모셨고, 할머니처럼 주님을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마음의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시인은 본 시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시며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위대한 약속을 받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감리교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요한 웨슬레’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 가운데 천국의 문으로 자신이 이끌려 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웨슬레는 그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 천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웨슬레는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천국에 와 있습니까?” 천사는 큰 책을 조심스럽게 뒤져보고 나서, “가톨릭 신자는 천국에 없군요.” 웨슬레는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장로 교인들은 천국에 와 있습니까?” 천사는, “장로 교인도 없는데요.” 역시 별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파를 다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오.”였습니다. 웨슬레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교파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감리 교인들은 천국에 몇 사람이나 와 있습니까?” 천사는 “감리 교인도 하나도 없군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 웨슬레는 흥분된 어조로 외쳤습니다. “천국에는 가톨릭 신자도 없고, 장로 교인도 없고, 침례 교인도 없고, 감리 교인도 없다면, 도대체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 와 있습니까?” 천사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웨슬레 씨, 천국에 와 있는 사람들은 단지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신앙 연륜도, 깊은 신앙심도, 교파도, 높은 학식도, 부하고 가난함도 모두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합니까? 아니면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잘 알지를 못합니까? 본 시편을 통하여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1.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본문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선포합니다.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존자(至尊者, The Most High)이시며, 전능자(全能者, Almighty)이심을 선포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안식을 누립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을 잘 알고 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은밀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들이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은 특권이며 위안입니다. 그 이유는 지존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2. 일반적인 진리를 자신의 입장으로 선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자연스럽게 자기의 입장에다 적용시킵니다. 본문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점입니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책을 통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그 말씀을 하십니다. 14: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고, 15: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절에는 시인의 각오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 하리라.’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마후짐(Mahuzzim), 곧 ‘크게 견고한 산성’(단11:39)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 곧 자기의 요새로 의지했으며,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완전한 신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진실한 신뢰의 삶과 이를 전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하며, 얼굴에 행복이 그려지게 됩니다. 굳이 ‘사랑하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생활과 모습에서 사랑을 읽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함으로서 경험했던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행하도록 경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증언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①삶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3-8절). ②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환난에 대한 가능성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절대적인 섭리의 하나님으로 증언(9-13절)합니다.
인생에게 닥치는 위험은 밤낮이 따로 없고, 방법 또한 제한이 없습니다. ①부주의함으로 인하여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 걸리듯, 원수의 모함에 걸릴 수도 있고, ②극한 염병과 같은 죽음의 위기, ③밤과 낮이 따로 없이 들이닥쳐 인생을 파멸케 하는 불의의 사고들(5-6절), ④수많은 사람을 파멸케 하는 재난들, ⑤그리고 3절처럼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중첩되는 고난들, 등. 이 숱한 재난으로부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보호까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9-13절).
시인이 이처럼 확신 있고 담대하게 증언하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이 경험했을 때 증거하는 능력이 있게 됩니다.
요즈음 TV쇼핑몰에서 쇼 호스트들이 물건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소개하면서 입어보기도 하고, 먹어보기도 하면서 이 제품이 안전하고 효력이 있음을 경험적으로 나타내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제품은 그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서 이렇게 되었노라고 신제 인물을 등장시켜서 선전합니다. 이것도 역시 경험을 토대로 하는 선전의 효과를 위해서입니다. 만일 제품을 선전하는 사람이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누가 그 제품을 신뢰하고 사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되어지고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활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하는 생활 속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4.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있습니다.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구원’과 ‘높임’과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함께 동행 하면서 위기에서 구원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고, 만족케 하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 권력, 출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응답을 듣는 복된 삶이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 시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이 없는 아름다운 신뢰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인은 인생의 모든 여정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확고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중요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 계시며, 하나님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공간을 내어 드리고 있습니까?
오래 전에 한 청년의 간증 속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시골에서 살았는데, 읍내로 가기 위하여 항상 지나는 길에 쓰러져 가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일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날 때마다 거의 대부분은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든지,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년도 읍내의 교회에 다니는 터라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그 날은 시간도 넉넉히 남았고 해서 청년이 그 집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날도 여전히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열려져 있는 사립문을 지나서 “계십니까?”라고 인기척을 냈습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지나는 길에 들리는 찬송소리가 좋아서 한 번 방문했노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자그마한 방에는 오래 된 장농 하나와 이부자리가 전부였습니다. 정말 가난한 살림살이였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혼자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게 보였습니다. 청년은 가끔 이야기 소리가 들렸던 것을 생각하면서, “할머니, 손님이 종종오시나 보지요. 가끔 지나다 보면 이야기 소리가 들리 든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하, 내가 주인과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구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은 “할머니가 집 주인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주님이 내 주인이시고, 이 집의 주인이시라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야기도 하고 찬송도 하고 심심하지도 외롭지도 않고, 가난하지만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모셨고, 할머니처럼 주님을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마음의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시인은 본 시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시며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위대한 약속을 받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감리교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요한 웨슬레’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 가운데 천국의 문으로 자신이 이끌려 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웨슬레는 그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 천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웨슬레는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천국에 와 있습니까?” 천사는 큰 책을 조심스럽게 뒤져보고 나서, “가톨릭 신자는 천국에 없군요.” 웨슬레는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장로 교인들은 천국에 와 있습니까?” 천사는, “장로 교인도 없는데요.” 역시 별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파를 다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오.”였습니다. 웨슬레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교파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감리 교인들은 천국에 몇 사람이나 와 있습니까?” 천사는 “감리 교인도 하나도 없군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 웨슬레는 흥분된 어조로 외쳤습니다. “천국에는 가톨릭 신자도 없고, 장로 교인도 없고, 침례 교인도 없고, 감리 교인도 없다면, 도대체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 와 있습니까?” 천사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웨슬레 씨, 천국에 와 있는 사람들은 단지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신앙 연륜도, 깊은 신앙심도, 교파도, 높은 학식도, 부하고 가난함도 모두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합니까? 아니면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잘 알지를 못합니까? 본 시편을 통하여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1.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본문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선포합니다.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존자(至尊者, The Most High)이시며, 전능자(全能者, Almighty)이심을 선포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안식을 누립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을 잘 알고 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은밀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들이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은 특권이며 위안입니다. 그 이유는 지존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2. 일반적인 진리를 자신의 입장으로 선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자연스럽게 자기의 입장에다 적용시킵니다. 본문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점입니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책을 통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그 말씀을 하십니다. 14: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고, 15: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절에는 시인의 각오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 하리라.’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마후짐(Mahuzzim), 곧 ‘크게 견고한 산성’(단11:39)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 곧 자기의 요새로 의지했으며,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완전한 신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진실한 신뢰의 삶과 이를 전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하며, 얼굴에 행복이 그려지게 됩니다. 굳이 ‘사랑하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생활과 모습에서 사랑을 읽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함으로서 경험했던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행하도록 경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증언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①삶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3-8절). ②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환난에 대한 가능성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절대적인 섭리의 하나님으로 증언(9-13절)합니다.
인생에게 닥치는 위험은 밤낮이 따로 없고, 방법 또한 제한이 없습니다. ①부주의함으로 인하여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 걸리듯, 원수의 모함에 걸릴 수도 있고, ②극한 염병과 같은 죽음의 위기, ③밤과 낮이 따로 없이 들이닥쳐 인생을 파멸케 하는 불의의 사고들(5-6절), ④수많은 사람을 파멸케 하는 재난들, ⑤그리고 3절처럼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중첩되는 고난들, 등. 이 숱한 재난으로부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보호까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9-13절).
시인이 이처럼 확신 있고 담대하게 증언하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이 경험했을 때 증거하는 능력이 있게 됩니다.
요즈음 TV쇼핑몰에서 쇼 호스트들이 물건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소개하면서 입어보기도 하고, 먹어보기도 하면서 이 제품이 안전하고 효력이 있음을 경험적으로 나타내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제품은 그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서 이렇게 되었노라고 신제 인물을 등장시켜서 선전합니다. 이것도 역시 경험을 토대로 하는 선전의 효과를 위해서입니다. 만일 제품을 선전하는 사람이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누가 그 제품을 신뢰하고 사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되어지고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활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하는 생활 속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4.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있습니다.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구원’과 ‘높임’과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함께 동행 하면서 위기에서 구원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고, 만족케 하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 권력, 출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응답을 듣는 복된 삶이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