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개가를 위하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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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4-06 18:11
♡♡♡ 승리의 개가를 위하여 / 빌3:10-16
*** 들어가는 말
‘승리!’ 이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찬 감격을 부르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군들 이기고 싶지 않고, 승리나 성공을 싫어하겠습니까? 세상의 일에 있어서도 성공이나 승리의 개가가 이렇게 좋고 기쁘다면, 영원한 생명과 삶을 얻는 승리의 개가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오늘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이자 감격의 날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삶이 주어진 감격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군왕들이나 사람들이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그렇게 동경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세상 사람이 가는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거저 얻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개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부활의 생명’이 기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5:17-19절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되시고, 장차 우리도 얻게 될 승리의 개가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일을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1. 먼저 관심사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관심사의 전환이란, 우리가 각 자의 삶에서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부활의 삶’에 맞추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입니다. 영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썩지 않을 새로운 육체로 다시 지음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영의 부활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부활은 죽음 이후에 경함하게 될 육신의 부활이 아닙니다. 이미 영의 부활을 통하여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타내야 할 현실적인 부활의 권능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하여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한다.’고 표현한 대로 우리에게도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재적인 삶에서 기쁨이나 평안이나 감사로 인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부활을 아는 것 같은데 막상 그 의미를 말하기가 쉽지 않고,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에서 실천하기는 더더욱 힘든 것입니다.
서울 올림픽 공원에는 채색 타일로 구성된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가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보면 여러 색깔의 타일만 눈에 들어오지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보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한 폭의 그림으로 보입니다.
또한, 거대한 숲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숲 속에 있으면 많은 나무들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숲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서 보면 그 숲 전체가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사도 그러합니다. 바로 눈앞의 이익과 육신의 삶만 생각하면서 사노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의 권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의 일상생활에 매여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큰 뜻과 계획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눈앞의 작은 생활공간을 벗어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야곱이 형인 에서에게 돌아갈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는 형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멀리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다가 하룻밤을 머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 베게 했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내가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 돌을 세운 곳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란에 도착한 야곱은 20년을 자기 삶을 가꾸느라 자신의 서원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조차 잊고 삶에 바쁜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상의 환경이 두려워서 인간적인 술수를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야곱을 그래도 계속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시 세겜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딸 ‘디나’가 그곳 사람으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피의 보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래야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야곱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그제야 야곱은 온 가족의 마음을 정비하고 벧엘로 향하게 됩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세상을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위대하신 뜻을 이루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영광의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계속 깊이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고난을 말합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할 이유는 영광의 부활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부활의 승리를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승리의 개가를 부를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가 육신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신의 완전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을 알기를 힘쓰고, 수고와 애씀으로 봉사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베드로전서2:19절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로 베드로전서4:13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얻고 영광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에도 함께 참예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아무것도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세상 즐거움을 누리려 한다면, 아직 자신이 낮아지지 못했고 또한 주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고난이 따릅니다. 왜냐고요?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죄를 벗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4: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또한 고난 없이는 승리의 개가도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도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삶을 위하여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3.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하여 나아가지만, 성도 각자에게는 자신이 머물 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같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지만, 신앙의 성숙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부활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이전의 연약함과 무지한 신앙에 비하여 많이 성장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각자의 신앙의 분량에 따라 일을 맡기시며 또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따라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8: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다만 마땅히 성장해야 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당연히 책망이 따르겠지요. 신앙은 누가 자신의 자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자신의 자리를 만들며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종합해 봅시다.
우리가 기쁘게 부를 승리의 개가를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의 관심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 관심사의 주된 주제는 내가 누리기를 원하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며 고난까지라도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삶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고난에 참예하는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장의 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자신의 관심을 주님께로 돌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자유가 없으며, 모든 것을 누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생활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숙된 신앙을 누리고 있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삶이 기쁨과 평안과 만족함이 따르며, 이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 복된 부활절을 지나면서 다신 한 번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부활의 기쁨뿐만 아니라, 온전한 부활을 이루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승리!’ 이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찬 감격을 부르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군들 이기고 싶지 않고, 승리나 성공을 싫어하겠습니까? 세상의 일에 있어서도 성공이나 승리의 개가가 이렇게 좋고 기쁘다면, 영원한 생명과 삶을 얻는 승리의 개가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오늘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이자 감격의 날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삶이 주어진 감격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군왕들이나 사람들이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그렇게 동경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세상 사람이 가는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거저 얻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개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부활의 생명’이 기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5:17-19절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되시고, 장차 우리도 얻게 될 승리의 개가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일을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1. 먼저 관심사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관심사의 전환이란, 우리가 각 자의 삶에서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부활의 삶’에 맞추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입니다. 영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썩지 않을 새로운 육체로 다시 지음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영의 부활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부활은 죽음 이후에 경함하게 될 육신의 부활이 아닙니다. 이미 영의 부활을 통하여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타내야 할 현실적인 부활의 권능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하여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한다.’고 표현한 대로 우리에게도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재적인 삶에서 기쁨이나 평안이나 감사로 인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부활을 아는 것 같은데 막상 그 의미를 말하기가 쉽지 않고,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에서 실천하기는 더더욱 힘든 것입니다.
서울 올림픽 공원에는 채색 타일로 구성된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가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보면 여러 색깔의 타일만 눈에 들어오지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보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한 폭의 그림으로 보입니다.
또한, 거대한 숲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숲 속에 있으면 많은 나무들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숲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서 보면 그 숲 전체가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사도 그러합니다. 바로 눈앞의 이익과 육신의 삶만 생각하면서 사노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의 권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의 일상생활에 매여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큰 뜻과 계획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눈앞의 작은 생활공간을 벗어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야곱이 형인 에서에게 돌아갈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는 형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멀리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다가 하룻밤을 머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 베게 했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내가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 돌을 세운 곳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란에 도착한 야곱은 20년을 자기 삶을 가꾸느라 자신의 서원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조차 잊고 삶에 바쁜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상의 환경이 두려워서 인간적인 술수를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야곱을 그래도 계속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시 세겜 땅에 주저앉았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딸 ‘디나’가 그곳 사람으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피의 보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래야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야곱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그제야 야곱은 온 가족의 마음을 정비하고 벧엘로 향하게 됩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세상을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위대하신 뜻을 이루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영광의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계속 깊이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고난을 말합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할 이유는 영광의 부활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부활의 승리를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승리의 개가를 부를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가 육신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신의 완전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을 알기를 힘쓰고, 수고와 애씀으로 봉사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베드로전서2:19절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로 베드로전서4:13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얻고 영광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에도 함께 참예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아무것도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세상 즐거움을 누리려 한다면, 아직 자신이 낮아지지 못했고 또한 주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고난이 따릅니다. 왜냐고요?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죄를 벗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4: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또한 고난 없이는 승리의 개가도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도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삶을 위하여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3.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하여 나아가지만, 성도 각자에게는 자신이 머물 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같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지만, 신앙의 성숙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부활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이전의 연약함과 무지한 신앙에 비하여 많이 성장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각자의 신앙의 분량에 따라 일을 맡기시며 또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따라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8: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다만 마땅히 성장해야 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당연히 책망이 따르겠지요. 신앙은 누가 자신의 자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자신의 자리를 만들며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종합해 봅시다.
우리가 기쁘게 부를 승리의 개가를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의 관심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 관심사의 주된 주제는 내가 누리기를 원하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며 고난까지라도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삶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고난에 참예하는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장의 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자신의 관심을 주님께로 돌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자유가 없으며, 모든 것을 누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생활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숙된 신앙을 누리고 있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삶이 기쁨과 평안과 만족함이 따르며, 이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 복된 부활절을 지나면서 다신 한 번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부활의 기쁨뿐만 아니라, 온전한 부활을 이루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