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소경입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712회
작성일
2002-06-29 21:12
♡♥♡ 누가 소경입니까? / 요한복음 9:1-12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소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 문헌들을 참고해 볼 때,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소경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등장하는 ‘라오디게아’지역은 ‘안약’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영적인 소경을 육신적인 소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도 소경이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날 때부터 육신적으로 소경이 된 사람을 통하여, 당시의 영적인 소경들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본문이 있는 9장 마지막 부분인 39-4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고 말씀의 의도를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경과 우리 사람들이 말하는 소경에 대한 것입니다.
1. 사람들이 말하는 소경은 이러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사람들이 남의 고난을 볼 때에 다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과 죄를 직결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불행에 대해서는 의(義)때문이라 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의를 위하여 고생하고, 다른 사람의 고생은 벌 받는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 또는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까?’ 이렇게 상대방의 깊은 고통을 이해해주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 시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대방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은 예외 규정에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남을 쉽게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대뜸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물음이 사람들이 소경을 보는 관점입니다.
이 물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소경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소경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떤 죗값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이 죄인인 것은 분명한데 다만 누구의 죄 때문인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온갖 것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마치 그것이 사실인 냥 매도해 버립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만 해도 당시의 카톨릭은 ‘지구가 네모난 땅이며 우주의 중심으로서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천동설’을 정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정죄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지식으로 고집하다가 사실이 밝혀지면서 낭패를 당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소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경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보실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보셨습니다. 사실 이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소경이라고 하니까 소경인가 보다 생각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경 된 자신은 불행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는 제자들이나 당시의 지도자들이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영적 문제를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날 때부터의 소경이 자신의 불행을 모르듯이, 영적인 소경된 당시의 사람들도 자신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불행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소경은, 자신의 영적인 현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선천적으로 영적인 소경들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영적으로 볼 때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1:8-9절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두신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소경입니다. 육신의 소경이야 세상만 보지 못할 뿐이지만, 영적인 소경은 영원한 삶과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 시대에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했을 때 엘리사가 미리 알고 이스라엘로 방비하게 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먼저 없애려고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을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선지자의 사환이 온 성이 적군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영의 세계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영안이 열린 사환은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왕하6:8-23).
이처럼 진정한 소경은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소경됨을 시인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영적으로 소경이면서도 소경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완전히 소경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소경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소경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영이 살아있고 영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악한 마음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까?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여 답답하십니까?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 하지 말고 우리의 주인이시며 인도자이신 주님께 묻고 의뢰하십시오. 우리를 보내신 주님께서 인도하시며 이루실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소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 문헌들을 참고해 볼 때,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소경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등장하는 ‘라오디게아’지역은 ‘안약’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영적인 소경을 육신적인 소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도 소경이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날 때부터 육신적으로 소경이 된 사람을 통하여, 당시의 영적인 소경들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본문이 있는 9장 마지막 부분인 39-4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고 말씀의 의도를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경과 우리 사람들이 말하는 소경에 대한 것입니다.
1. 사람들이 말하는 소경은 이러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사람들이 남의 고난을 볼 때에 다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과 죄를 직결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불행에 대해서는 의(義)때문이라 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의를 위하여 고생하고, 다른 사람의 고생은 벌 받는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 또는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까?’ 이렇게 상대방의 깊은 고통을 이해해주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 시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대방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은 예외 규정에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남을 쉽게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대뜸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물음이 사람들이 소경을 보는 관점입니다.
이 물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소경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소경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떤 죗값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이 죄인인 것은 분명한데 다만 누구의 죄 때문인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온갖 것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마치 그것이 사실인 냥 매도해 버립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만 해도 당시의 카톨릭은 ‘지구가 네모난 땅이며 우주의 중심으로서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천동설’을 정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정죄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지식으로 고집하다가 사실이 밝혀지면서 낭패를 당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소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경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보실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보셨습니다. 사실 이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소경이라고 하니까 소경인가 보다 생각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경 된 자신은 불행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는 제자들이나 당시의 지도자들이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영적 문제를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날 때부터의 소경이 자신의 불행을 모르듯이, 영적인 소경된 당시의 사람들도 자신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불행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소경은, 자신의 영적인 현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선천적으로 영적인 소경들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영적으로 볼 때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1:8-9절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두신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소경입니다. 육신의 소경이야 세상만 보지 못할 뿐이지만, 영적인 소경은 영원한 삶과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 시대에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했을 때 엘리사가 미리 알고 이스라엘로 방비하게 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먼저 없애려고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을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선지자의 사환이 온 성이 적군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영의 세계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영안이 열린 사환은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왕하6:8-23).
이처럼 진정한 소경은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소경됨을 시인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영적으로 소경이면서도 소경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완전히 소경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소경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소경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영이 살아있고 영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악한 마음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37절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까?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하여 답답하십니까?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 하지 말고 우리의 주인이시며 인도자이신 주님께 묻고 의뢰하십시오. 우리를 보내신 주님께서 인도하시며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