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온전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813회
작성일
2002-06-29 21:11
♡♥♡ 너희도 온전하라. / 마태복음 5:38-48
*** 들어가는 말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포함하는 마태복음 5장 - 7장까지를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계 문학의 백미(白眉)라고 할 만큼 믿음의 세계나 불신의 세계를 막론하고 빼어난 교훈입니다.
이 본문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본문의 말씀처럼 살기는 힘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나 여러분들이나 ‘이 말씀대로 살고 있노라.’고 장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한 부분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그림 중에 ‘버림받은 예수’라는 제목의 비유적인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변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을 탐독하는 청년이 있고,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가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예배당에서 잘 준비된 예배를 하고, 봉사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토론도 하지만, 정작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모습은 영락없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사야1:12절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고, 에스겔33:30,31절에서는,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고 형식적인 예배와 모양뿐인 경건의 모습을 탄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확실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손해가 오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저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본문의 말씀을 의미 깊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온전한 인간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1. 이 명령을 주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38절에서 42절까지에는 ‘무저항의 삶’을 말씀하시며, 43절에서 47절까지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의 말씀이 모두 구약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8절과 43절에서 “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시면서, 율법과 반대되는 새로운 명령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시거나 파기하시고 전혀 새로운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본문의 앞부분에서 ‘살인’과 ‘간음’과 ‘맹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정신을 더욱 완벽하게 실현시키시는 것입니다. 본문 앞쪽의 17절을 봅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허락하시고, 동해 보복법(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과 같이 해를 받은 것과 똑같이 보복하도록 제정된 법)을 허용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성급하고 악한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시려고 이런 율법의 규정들을 주신 것입니다. 완전히 못하도록 한다면 사람들이 아예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는 것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에 처음부터 적군을 만나게 하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적군을 만나서 전쟁을 하게 되면 가나안에 가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의 자세를 가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온전한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이 명하신 온전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신 온전한 삶은 2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무저항과 관용의 삶이며, 두 번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라도 포용하고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살아야할 이유는 단 하나, 본문 48절 말씀처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1) 무저항과 관용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욕에 대한 자세입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아픔’을 주는 것도 있지만 ‘모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상대가 오른 손으로 나의 오른 뺨을 때린다는 것은 손등으로 때리는 행위입니다. 유대 랍비의 가르침에 보면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두 배나 모욕을 가하는 일로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상대편이 악한 사람이어서 지독한 모욕을 가해 왔을 때에라도 복수 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많이 당할 수 있습니다. 고의적인 모욕과 악의에 찬 대적을 당한다 할지라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더 배려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송사에 대한 자세입니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머리로부터 내려오는 통으로 짠 ‘키톤’이라는 속옷과 길이가 약 2M 폭이 약 1M쯤 되는 담요처럼 된 ‘히마티온’이라는 겉옷을 입었습니다. 겉옷은 속옷보다 값이 배나 더 나가며, 낮에는 옷으로 걸치고 다니고, 밤에는 담요처럼 깔거나 덥고 잤습니다. 겉옷은 저당잡거나 빼앗을 수 없도록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24:12,13절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질 때에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겉옷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지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속옷을 가지고자 한다면 겉옷까지라도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비록 법적으로 보장을 받은 권리라 할지라도 그것마저 이웃을 위하여 내어 놓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강압적인 권력에 대한 자세입니다. “너로 억지로 오리(五里)를 가게 하거든 십리(十里)를 동행(同行)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당시의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로마군은 점령지의 사람들에게 강제로 징발하여 군수물자를 운반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운반비를 주는 것도 아니며, 거역할 수도 없었습니다. 로마군의 압력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나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강압적인 봉사를 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당연히 분노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관대함에 대한 자세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자세는 정말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들이 의미하는 것은 이웃을 향하여 열려진 마음 자세와 주님을 닮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사랑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대하여는 타당성을 입증하는 예화까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리도 하는 일이며, 형제들에게 문안하는 일은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차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차별된 삶은 예수님께서 먼저 본이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로마서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계단식 논을 아래위로 소유한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계단식 논이어서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아래 웅덩이에서 물을 져다 날라야 하는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위쪽의 논을 가진 농부가 매일같이 가파른 비탈 아래의 웅덩이로부터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려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의 논을 가진 농부는 위쪽의 논에 물이 고여 있을 때 논두렁에 구멍을 내어 자신의 논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위쪽 논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싸우러 가는 길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전처럼 계속 물을 끌어 올리고 아무 알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농부는 목사님의 권면대로 꾹 참으며 매일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농부는 여전히 물꼬를 빼돌렸습니다. 참다못한 농부는 며칠이 지난 뒤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단계를 일러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 농부는 아래 논에 먼저 물을 대어 준 다음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삼일이 지났지만 두 농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삼일이 지났을 때 저녁 무렵에 아래쪽 논의 농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집사님은 노점상에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를 전도하려고 일년을 과일을 사가면서 안 좋은 것만 골라서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집사님의 사랑에 녹아서 주님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내 생명과 내 모든 삶을 주님께 내려놓으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길입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이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이 길로 갑시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한 마음으로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함께 갑시다.
*** 들어가는 말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포함하는 마태복음 5장 - 7장까지를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계 문학의 백미(白眉)라고 할 만큼 믿음의 세계나 불신의 세계를 막론하고 빼어난 교훈입니다.
이 본문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본문의 말씀처럼 살기는 힘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나 여러분들이나 ‘이 말씀대로 살고 있노라.’고 장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한 부분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그림 중에 ‘버림받은 예수’라는 제목의 비유적인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주변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을 탐독하는 청년이 있고,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가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예배당에서 잘 준비된 예배를 하고, 봉사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토론도 하지만, 정작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모습은 영락없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사야1:12절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고, 에스겔33:30,31절에서는,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고 형식적인 예배와 모양뿐인 경건의 모습을 탄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확실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손해가 오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저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본문의 말씀을 의미 깊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온전한 인간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1. 이 명령을 주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38절에서 42절까지에는 ‘무저항의 삶’을 말씀하시며, 43절에서 47절까지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의 말씀이 모두 구약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8절과 43절에서 “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시면서, 율법과 반대되는 새로운 명령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시거나 파기하시고 전혀 새로운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본문의 앞부분에서 ‘살인’과 ‘간음’과 ‘맹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정신을 더욱 완벽하게 실현시키시는 것입니다. 본문 앞쪽의 17절을 봅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허락하시고, 동해 보복법(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과 같이 해를 받은 것과 똑같이 보복하도록 제정된 법)을 허용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성급하고 악한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시려고 이런 율법의 규정들을 주신 것입니다. 완전히 못하도록 한다면 사람들이 아예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는 것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에 처음부터 적군을 만나게 하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적군을 만나서 전쟁을 하게 되면 가나안에 가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의 자세를 가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온전한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이 명하신 온전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신 온전한 삶은 2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무저항과 관용의 삶이며, 두 번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라도 포용하고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살아야할 이유는 단 하나, 본문 48절 말씀처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1) 무저항과 관용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욕에 대한 자세입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아픔’을 주는 것도 있지만 ‘모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상대가 오른 손으로 나의 오른 뺨을 때린다는 것은 손등으로 때리는 행위입니다. 유대 랍비의 가르침에 보면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두 배나 모욕을 가하는 일로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상대편이 악한 사람이어서 지독한 모욕을 가해 왔을 때에라도 복수 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많이 당할 수 있습니다. 고의적인 모욕과 악의에 찬 대적을 당한다 할지라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더 배려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송사에 대한 자세입니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머리로부터 내려오는 통으로 짠 ‘키톤’이라는 속옷과 길이가 약 2M 폭이 약 1M쯤 되는 담요처럼 된 ‘히마티온’이라는 겉옷을 입었습니다. 겉옷은 속옷보다 값이 배나 더 나가며, 낮에는 옷으로 걸치고 다니고, 밤에는 담요처럼 깔거나 덥고 잤습니다. 겉옷은 저당잡거나 빼앗을 수 없도록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24:12,13절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질 때에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겉옷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지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속옷을 가지고자 한다면 겉옷까지라도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비록 법적으로 보장을 받은 권리라 할지라도 그것마저 이웃을 위하여 내어 놓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강압적인 권력에 대한 자세입니다. “너로 억지로 오리(五里)를 가게 하거든 십리(十里)를 동행(同行)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당시의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로마군은 점령지의 사람들에게 강제로 징발하여 군수물자를 운반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운반비를 주는 것도 아니며, 거역할 수도 없었습니다. 로마군의 압력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나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강압적인 봉사를 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당연히 분노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관대함에 대한 자세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자세는 정말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들이 의미하는 것은 이웃을 향하여 열려진 마음 자세와 주님을 닮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사랑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대하여는 타당성을 입증하는 예화까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리도 하는 일이며, 형제들에게 문안하는 일은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차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차별된 삶은 예수님께서 먼저 본이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로마서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계단식 논을 아래위로 소유한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계단식 논이어서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아래 웅덩이에서 물을 져다 날라야 하는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위쪽의 논을 가진 농부가 매일같이 가파른 비탈 아래의 웅덩이로부터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려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의 논을 가진 농부는 위쪽의 논에 물이 고여 있을 때 논두렁에 구멍을 내어 자신의 논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위쪽 논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싸우러 가는 길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전처럼 계속 물을 끌어 올리고 아무 알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농부는 목사님의 권면대로 꾹 참으며 매일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농부는 여전히 물꼬를 빼돌렸습니다. 참다못한 농부는 며칠이 지난 뒤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단계를 일러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 농부는 아래 논에 먼저 물을 대어 준 다음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삼일이 지났지만 두 농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삼일이 지났을 때 저녁 무렵에 아래쪽 논의 농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집사님은 노점상에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를 전도하려고 일년을 과일을 사가면서 안 좋은 것만 골라서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집사님의 사랑에 녹아서 주님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내 생명과 내 모든 삶을 주님께 내려놓으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길입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이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이 길로 갑시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한 마음으로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함께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