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유익한 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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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6-23 20:52
♡♥♡ 아름답고 유익한 일 / 디도서 3:3-11
*** 들어가는 말
본문 중에서 8-10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모두가 진실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이러한 점들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착한 일에 전념하도록 가르치시오. 이것이야말로 곧 올바르고도 보람 있는 일입니다. 쓸데없이 족보 이야기나 온당치 않은 논쟁에 말려들지 마시오.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두고 토론이나 싸움을 하지 마시오. 그런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를 가져올 뿐입니다. 만일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가 있거든 한두 차례 엄하게 경고해 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어 버리시오.” 본문에서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며, 두 번째는 무익하고 헛된 일이며, 세 번째는 아예 멀리해야 할 일입니다.
디도서는 목회서신으로서 사도 바울이 목회자 디도에게 보낸 개인 서신입니다. 특히 디도가 사역하고 있던 그레데 섬 지역의 교회에는 유대 주의자와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단적인 신앙을 배격하고,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의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 한양 가는 길목에는 80리마다 신나무가 지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새 짚신을 신으면 80리 안팎에서 해어진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짚신이 낡고 떨어지면 신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진 짚신을 신나무에 걸어 두지 않으면 발병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럽의 십자군 수칙을 보면, 해진 신발은 반드시 불에 태워 없애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태우지 않고 버리면 악마가 신게 되어 자신에게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 낡아진 신발의 처리를 두고도 동양의 의식과 서양의 의식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서양 사람은 쓰레기는 태워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절대 함부로 땅에 버리지 않지만, 동양 사람은 땅에 버리면 썩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의식화되면 공산주의 방식대로 살게 되고, 개인주의 사상에 물들면 개인주의 방식대로 살게 됩니다. 의식이란 바로 이러합니다. 의식은 그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고 생활의 모양을 좌지우지 합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를 받아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의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천이,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의식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의식뿐만 아니라 소속과 신분이 다르고, 소망이 다르고, 영의 유무(有無)까지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2:12절에서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차별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좀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1.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 있습니다.
본문3-7절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말씀합니다. 3절의 모습은 영이 죽어 있던 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의 옛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4-7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새 사람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8절에서는 ‘이 사실을 굳세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선한 일에 힘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불러 각자에게 바구니를 주면서 임무를 주었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감사’를 담아오도록 했으며, 또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도록 했습니다. 천사들이 파송된 후 얼마 있지 않아서 한 천사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는 천사였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바쁘게 다니는 천사는 ‘소원’을 거두는 천사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부르실 때까지 ‘감사’를 거두는 천사는 한 바구니도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는 잘 잊어버리지만,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는 끈질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사야1: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는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이는 한갓 미물들도 받은바 은혜를 알지만,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인간은 받은바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늘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감사합시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2. 무익하고 헛된 일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도가 피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익하고 헛된 것이 무엇임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변론’이란, 성경의 어려운 내용이나 성경에 없는 내용, 구원과 무관한 일 등으로 무익한 논쟁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족보 이야기’란, 유대 랍비들이 족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족보를 연구하며, 선조들의 신앙적인 업적들을 들먹임으로써, 자신들의 부족한 신앙을 채우려고 했던 것을 말합니다. ‘분쟁’이란, 고린도전서 3장에서처럼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당을 짓고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들에게 위임된 사명은 생명과 진리를 모르는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신의 신앙이나 지식을 자랑하는 변론과 다툼은 아닙니다. 자기 신앙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행위를 자랑하는 일들은 일체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3.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10-11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이단에 대한 대처는 단호해야 합니다. 인정에 이끌리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을 용납하거나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묵인하면 자신도 그 어리석은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이서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첨단 과학의 산물이 우주 왕복선은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빠지거나 고장을 일으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나 성도 개개인에 있어서도 작은 이단적인 요소를 방치한다면 그로 인하여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의식 자체부터 그리스도화 되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밀’은,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즉 끈은 매일 다시 매어야 하듯, 사람도 그 결심한 일을 매일 거듭 여며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여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구별된 삶을 살아갑시다.
*** 들어가는 말
본문 중에서 8-10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모두가 진실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이러한 점들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착한 일에 전념하도록 가르치시오. 이것이야말로 곧 올바르고도 보람 있는 일입니다. 쓸데없이 족보 이야기나 온당치 않은 논쟁에 말려들지 마시오.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두고 토론이나 싸움을 하지 마시오. 그런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를 가져올 뿐입니다. 만일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가 있거든 한두 차례 엄하게 경고해 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어 버리시오.” 본문에서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며, 두 번째는 무익하고 헛된 일이며, 세 번째는 아예 멀리해야 할 일입니다.
디도서는 목회서신으로서 사도 바울이 목회자 디도에게 보낸 개인 서신입니다. 특히 디도가 사역하고 있던 그레데 섬 지역의 교회에는 유대 주의자와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단적인 신앙을 배격하고,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의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 한양 가는 길목에는 80리마다 신나무가 지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새 짚신을 신으면 80리 안팎에서 해어진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짚신이 낡고 떨어지면 신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진 짚신을 신나무에 걸어 두지 않으면 발병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럽의 십자군 수칙을 보면, 해진 신발은 반드시 불에 태워 없애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태우지 않고 버리면 악마가 신게 되어 자신에게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 낡아진 신발의 처리를 두고도 동양의 의식과 서양의 의식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서양 사람은 쓰레기는 태워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절대 함부로 땅에 버리지 않지만, 동양 사람은 땅에 버리면 썩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의식화되면 공산주의 방식대로 살게 되고, 개인주의 사상에 물들면 개인주의 방식대로 살게 됩니다. 의식이란 바로 이러합니다. 의식은 그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고 생활의 모양을 좌지우지 합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를 받아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의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천이,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의식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의식뿐만 아니라 소속과 신분이 다르고, 소망이 다르고, 영의 유무(有無)까지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2:12절에서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차별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좀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1.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 있습니다.
본문3-7절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말씀합니다. 3절의 모습은 영이 죽어 있던 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의 옛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4-7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새 사람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8절에서는 ‘이 사실을 굳세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선한 일에 힘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불러 각자에게 바구니를 주면서 임무를 주었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감사’를 담아오도록 했으며, 또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도록 했습니다. 천사들이 파송된 후 얼마 있지 않아서 한 천사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는 천사였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바쁘게 다니는 천사는 ‘소원’을 거두는 천사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부르실 때까지 ‘감사’를 거두는 천사는 한 바구니도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는 잘 잊어버리지만,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는 끈질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사야1: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는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이는 한갓 미물들도 받은바 은혜를 알지만,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인간은 받은바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늘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감사합시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2. 무익하고 헛된 일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도가 피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무익하고 헛된 것이 무엇임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변론’이란, 성경의 어려운 내용이나 성경에 없는 내용, 구원과 무관한 일 등으로 무익한 논쟁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족보 이야기’란, 유대 랍비들이 족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족보를 연구하며, 선조들의 신앙적인 업적들을 들먹임으로써, 자신들의 부족한 신앙을 채우려고 했던 것을 말합니다. ‘분쟁’이란, 고린도전서 3장에서처럼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당을 짓고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들에게 위임된 사명은 생명과 진리를 모르는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신의 신앙이나 지식을 자랑하는 변론과 다툼은 아닙니다. 자기 신앙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행위를 자랑하는 일들은 일체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3.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10-11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이단에 대한 대처는 단호해야 합니다. 인정에 이끌리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을 용납하거나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묵인하면 자신도 그 어리석은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이서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첨단 과학의 산물이 우주 왕복선은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빠지거나 고장을 일으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나 성도 개개인에 있어서도 작은 이단적인 요소를 방치한다면 그로 인하여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의식 자체부터 그리스도화 되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밀’은,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즉 끈은 매일 다시 매어야 하듯, 사람도 그 결심한 일을 매일 거듭 여며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여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구별된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