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를 좇으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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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6-23 20:49
♡♥♡ 그 뒤를 좇으라 / 여호수아 3:1-6
*** 들어가는 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목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목표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과는 삶의 방법이나 가치관, 의식 등 모든 것에서 차이를 나타냅니다.
고사성어 중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깊고 깊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몹시 나쁜 사이를 두고 ‘오월지간(吳越之間)’이라고 합니다. 와신상담은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말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와 월, 두 나라가 서로의 원한을 갚기 위한 오직 한 목표로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원한을 갚기 위한 목표로 이렇게 고통을 감내한다면, 영생을 위한 목표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도바울도 빌립보서3:13-14절에서 자신의 목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길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을 목표로, 세상의 일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들마저 떨쳐버리고 전력 질주한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삽니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아니면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고 있습니까?
저나 여러분은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목표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지고 위대한 것입니다. 즉 완전한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의 자리인 하나님의 나라가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이루시면서 이미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형성되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나라를 이룰 ‘가나안’땅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나안은 완전하지도 못했고, 낙원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가나안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는 힘이 여기에 있으며, 부귀영화와 쾌락과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목표가 매일의 삶에서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삶이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목표를 매일의 삶에서 분명하게 느끼며 살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1.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가나안은 아무에게나 그냥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혹독한 광야가 있고, 반드시 건너야 할 죽음의 강인 요단강이 있습니다. 광야와 요단강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가나안을 얻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맴돌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모든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요소들이 고난의 삶을 통하여 녹아졌습니다. 이제 광야의 끝자락인 ‘싯딤’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으로 향합니다. 이른 아침,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르렀습니다. 이 요단만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서두르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일 후에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점검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모든 준비를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준비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결 작업을 거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크고 위대한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받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일들이지만, 성도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또한 땀을 흘리는 수고와 헌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골로새서1:29절에서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계시록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수고와 헌신을 마다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침 일찍부터 최선의 각오로 일에 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고 하루를 부탁드릴 겨를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바쁘게 서둘러 일터로 향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목표를 생각하며 수고와 헌신을 각오하지도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불편함과 고생만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인하여 그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목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고와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나를 위하여 예비 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십시오.
2. 담대하게 믿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본문 3,4절을 봅시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매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전진하되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의 법칙이 있습니다. ①제사장들이 언약궤 메는 것을 보아야 하고, ②지금의 자리를 떨치고 출발해야 하며, ③언약궤의 뒤를 좇아야 하며, ④언약궤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두어야 하는 것, 이 네 가지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이스라엘이 따라야 하는 것은 언약궤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움직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며,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야 합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즉 십계명을 새긴 돌판,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에서 먹었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 고라당이 반역할 때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나타내셨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은 두 그룹을 새긴 황금뚜껑으로서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의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보다 앞선다든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주님을 따르는 데는 세상의 지혜나 자신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 ‘헨리 무어 하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주 힘든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근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기 부인의 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자신이 오는 것을 본 소아마비에 걸린 그의 어린 딸 ‘미니’가 기쁘게 반겼습니다.
그는 딸을 안고 입 맞춘 후, “엄마는 어디에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이층에 계셔요.” “그래, 엄마에게 줄 짐 꾸러미가 있단다.” 그러자 딸이, “아빠, 그것 내가 엄마에게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나섰습니다. “아니다 아가. 네가 어떻게 들고 가니? 너 혼자서는 못 들고 가잖니?” 그러나 딸은 애교를 부리면서 “그건 그래요 아빠. 하지만 짐은 내가 들고 아빠가 나를 안고 가시면 되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린 딸 ‘미니’와 짐을 함께 안고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안고 가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입술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삶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께서 나를 안고 가신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을 잃지 않으려면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르면 “너희 행할 길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이 비록 처음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면 비록 처음 가는 알지 못하는 길이라도, 또는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길이라도 목적지를 잃지 않고 능히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뒤를 따릅시다. 잠시 머물다가 떠날 세상에 정을 두게 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고귀한 만큼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함을 각오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결을 유지하면서, 앞서 가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갑시다.
*** 들어가는 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목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목표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과는 삶의 방법이나 가치관, 의식 등 모든 것에서 차이를 나타냅니다.
고사성어 중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깊고 깊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몹시 나쁜 사이를 두고 ‘오월지간(吳越之間)’이라고 합니다. 와신상담은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말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와 월, 두 나라가 서로의 원한을 갚기 위한 오직 한 목표로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원한을 갚기 위한 목표로 이렇게 고통을 감내한다면, 영생을 위한 목표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도바울도 빌립보서3:13-14절에서 자신의 목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길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을 목표로, 세상의 일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들마저 떨쳐버리고 전력 질주한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삽니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아니면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고 있습니까?
저나 여러분은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목표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지고 위대한 것입니다. 즉 완전한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의 자리인 하나님의 나라가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이루시면서 이미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형성되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나라를 이룰 ‘가나안’땅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나안은 완전하지도 못했고, 낙원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가나안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는 힘이 여기에 있으며, 부귀영화와 쾌락과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목표가 매일의 삶에서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삶이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목표를 매일의 삶에서 분명하게 느끼며 살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1.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가나안은 아무에게나 그냥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혹독한 광야가 있고, 반드시 건너야 할 죽음의 강인 요단강이 있습니다. 광야와 요단강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가나안을 얻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맴돌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모든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의 요소들이 고난의 삶을 통하여 녹아졌습니다. 이제 광야의 끝자락인 ‘싯딤’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으로 향합니다. 이른 아침,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르렀습니다. 이 요단만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서두르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일 후에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점검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모든 준비를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준비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결 작업을 거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크고 위대한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받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일들이지만, 성도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또한 땀을 흘리는 수고와 헌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골로새서1:29절에서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계시록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수고와 헌신을 마다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침 일찍부터 최선의 각오로 일에 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고 하루를 부탁드릴 겨를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바쁘게 서둘러 일터로 향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목표를 생각하며 수고와 헌신을 각오하지도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불편함과 고생만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인하여 그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목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고와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나를 위하여 예비 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십시오.
2. 담대하게 믿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본문 3,4절을 봅시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매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전진하되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의 법칙이 있습니다. ①제사장들이 언약궤 메는 것을 보아야 하고, ②지금의 자리를 떨치고 출발해야 하며, ③언약궤의 뒤를 좇아야 하며, ④언약궤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두어야 하는 것, 이 네 가지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이스라엘이 따라야 하는 것은 언약궤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움직이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며,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야 합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즉 십계명을 새긴 돌판,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에서 먹었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 고라당이 반역할 때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나타내셨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은 두 그룹을 새긴 황금뚜껑으로서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의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보다 앞선다든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주님을 따르는 데는 세상의 지혜나 자신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 ‘헨리 무어 하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주 힘든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근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기 부인의 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자신이 오는 것을 본 소아마비에 걸린 그의 어린 딸 ‘미니’가 기쁘게 반겼습니다.
그는 딸을 안고 입 맞춘 후, “엄마는 어디에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이층에 계셔요.” “그래, 엄마에게 줄 짐 꾸러미가 있단다.” 그러자 딸이, “아빠, 그것 내가 엄마에게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나섰습니다. “아니다 아가. 네가 어떻게 들고 가니? 너 혼자서는 못 들고 가잖니?” 그러나 딸은 애교를 부리면서 “그건 그래요 아빠. 하지만 짐은 내가 들고 아빠가 나를 안고 가시면 되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린 딸 ‘미니’와 짐을 함께 안고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안고 가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입술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삶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께서 나를 안고 가신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을 잃지 않으려면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르면 “너희 행할 길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이 비록 처음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면 비록 처음 가는 알지 못하는 길이라도, 또는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길이라도 목적지를 잃지 않고 능히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뒤를 따릅시다. 잠시 머물다가 떠날 세상에 정을 두게 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고귀한 만큼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함을 각오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결을 유지하면서, 앞서 가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갑시다.